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걸그룹은 보이그룹과 달리 팬덤이 약해 지속가능한 수익 모델을 창출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컸다. 하지만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걸그룹도 보이그룹과 맞먹는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고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토양 위에서 (여자)아이들, 아이브, 에스파, 르세라핌, 뉴진스 등 4세대 걸그룹이 부상해 음악, 산업의 관점에서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팬덤의 화력에 힘입어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고안하고, 궁극적으로 제품화를 꾀하고 있다. 각 그룹별 인기 요인은 멤버들의 전방위적 참여, 차별화된 스토리텔링, 자연스러움과 편안한 매력 등으로 제각각이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음악의 수익화를 위한 매개체로서 디자인 요소를 강조한 굿즈, 독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웹툰과 웹소설,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상 공간 등을 활용하며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2022년, K팝에서의 가장 큰 사건은 ‘걸그룹의 부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20여 년 전인 2009년의 ‘걸그룹 대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다수의 걸그룹이 경쟁하고 있다. 대중적인 인기도 높다. 업계 전문가들은 종종 ‘넥스트 BTS는 걸그룹이 될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걸그룹의 인기는 분명히 사회적인 요인과 비즈니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강타한 미투 운동과 남자 아이돌의 성폭력 범죄 등 크고 작은 사건을 계기로 문화예술계의 여성 소비자들 사이에는 ‘남자 아티스트를 좋아하기 어려워졌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런 기조 아래 전반적으로 여성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려는 경향이 생겼고, 특히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흐름을 반영한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이 대거 늘었다. 최근 걸그룹의 부상은 이런 인식 변화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변화는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을 보여준다. 아이돌 그룹의 비즈니스 모델은 ‘팬덤’이란 강력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구축된다. 그런데 이 팬덤 기반 모델에서는 보이그룹의 성공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실제로 걸그룹은 팬덤을 형성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규모를 기반으로 하는 콘서트나 투어, 굿즈 판매 등의 비즈니스 밸류체인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통념이다. 하지만 걸그룹의 영향력이 커지고, 팬덤이 조성되고, 음원 차트뿐 아니라 앨범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걸그룹을 둘러싼 ‘사업적 비전’도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글로벌 시장의 확립으로 인한 팬덤 확대, 수익성 개선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소위 ‘4세대 걸그룹’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들, 아이브, 에스파, 르세라핌, 뉴진스 등의 방향성과 특이점을 분석하면서 이런 변화의 가능성과 비즈니스적 시사점을 살펴볼 것이다. 단, 그전에 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8년 무렵으로 시간을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징후: 아이즈원, 트와이스, 블랙핑크
차우진nar75@naver.com
음악산업 평론가
차우진 평론가는 1999년부터 음악 산업에 대한 비평과 기획을 병행했다. 최근 5년간 메이크어스, 스페이스오디티 등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 및 구축했다. 2020년부터는 콘텐츠 비즈니스 관점으로 음악 산업을 분석하는 전문 미디어 TMI.FM(Tech/Media/Inspired)을 운영 중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현대카드 뮤직 콘텐츠 기획 및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하는 대중음악백서의 기획위원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