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파괴 없는 K-혁신 리포트: 모바일 환전 앱 트래블월렛

진정한 혁신은 파괴 아닌 ‘윈윈’

김동영 | 342호 (2022년 0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모바일 환전 앱 트래블월렛이 해외 결제의 비효율성을 혁신해 환전 수수료 무료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1. 창업 초기에 문제의 중요 이해관계자인 금융회사와의 협업을 통해 기존 시스템을 익혔다. 2. 글로벌 결제 회사인 비자로부터 검증받고 신뢰를 얻으면서 전 세계 금융회사와 협업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3. 신용 결제 확대라는 공통의 목표를 바탕으로 기존 금융기관과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해외 결제의 비효율성 혁신

국제 외환 결제는 여러 금융기관을 거치면서 수수료가 더해지는 비효율적인 구조다. 예컨대, 해외 식당에서 카드로 결제할 경우 내 계좌에서 식당 주인의 계좌로 돈이 이동하기까지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다. 결제 에이전트, VAN(부가가치통신망사업자), 현지 에이전시, 은행, 가맹점 등 10여 곳이 개입한다. (그림 1) 달러 이외의 통화는 달러로 바꿔서 정산했다가 다시 원화로 바꾸면서 환전 비용까지 발생한다. 보통 국내 카드사는 소비자로부터 최종적으로 브랜드사 수수료(1∼1.4%)와 해외 이용 수수료(0.18∼0.65%) 등을 받는다. 여기에 환전할 때 화폐에 따라 1∼5%가량 가산되는 ‘전산 환율’도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일반적인 카드로 해외에서 결제할 때 기준환율로 계산할 때 대비 2.2∼8.0%의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1

101


이런 비효율성을 해소하면 해외 결제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김형우 대표는 2017년 트래블월렛(travel Wallet)을 창업했다. 외환 시장의 비효율성은 기존 금융권에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결제 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5% 수준으로 미미할 뿐 아니라 너무 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국제금융센터에서 근무하고, 삼성자산운용 등을 거치며 외환 관리 노하우를 쌓은 김 대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2019년 5월 시장에 첫선을 보인 모바일 환전 앱 트래블월렛의 환전 수수료는 0원이다. 김 대표는 환전한 외화를 수수료 없이 현지 은행에서 직접 찾을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했다. 출시 6개월 만에 5만 명이 몰릴 정도로 여행자들의 필수 앱으로 입소문을 탔다. 현재 트래블월렛으로 15개 통화2 를 수수료 없이 환전할 수 있으며, 전 세계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고, 8000만 개의 가맹 상점에서 이용할 수 있다.

금융권과의 협업 시도와 실패

트래블월렛 비즈니스의 핵심은 ‘다단계 외환 정산 구조의 효율화’에 있다. 외환 정산 프로세스에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존재한다. 모두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해외 결제가 전체 결제 시장의 4∼5%에 불과해 굳이 개선해야 할 인센티브가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 대표는 이해관계자인 기존 금융권과의 협업에서부터 출발했다.

외환 결제 구조의 개선을 목표로 창업한 김 대표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기존 금융회사였다. 스타트업이라면 기존 금융회사가 제공하지 못하는 새로운 효율적인 서비스를 개발해 기존 금융회사와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 쉽다. 하지만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기존 금융회사를 비효율적인 혁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개선을 위해 협업해야 하는 파트너로 바라봤다. 오랜 시간 동안 효율성을 추구해온 금융은 바꿔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로 발전이 필요한 시스템이다. 그는 오히려 기존 금융회사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정산 시스템을 개선해보기로 결정했다. 기존 시스템의 ‘파괴’가 아닌 ‘협업’의 철학을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외환 정산 구조를 개선해 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대부분의 기존 금융회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계속되는 설득에 두세 군데 카드사가 공감하며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별도의 용역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산 구조가 개선되면 해외 결제액의 일정 비율을 트래블월렛에 수수료로 지급해주기로 약속했다. 카드사 입장에서도 외환 결제 구조가 효율화되면 그만큼 수수료를 아낄 수 있기에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김 대표는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우리나라 전체 외환 결제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해결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유로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과정이기에 경쟁자도 없었다. 전체 결제 시장의 4∼5%에 불과하지만 액수로는 50조 원에 달하는 큰 규모의 시장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붓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기존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2년 동안 수천 가지 이상 고심했지만 구현할 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외환 정산 구조를 효율화하려면 카드사를 새롭게 설립하는 방안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전체 결제액의 5%에 불과한 외환 결제를 위해 거액의 투자를 결정할 카드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김 대표는 그동안 쏟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업 중단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VISA와의 만남

그러던 와중에 뜻밖에도 글로벌 비자(VISA)가 손을 내밀었다. 비자는 다른 금융사들의 추천으로 트래블월렛의 존재를 알게 됐다. 비자 역시 글로벌 전용 페이먼트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국내 금융사를 찾아다녔지만 시장 규모가 적은 국제 결제에 선뜻 투자하려는 기업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두 곳이 아닌 금융회사들이 너도나도 트래블월렛을 추천하는 것을 보고 작은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동안 김 대표의 숨은 노력을 눈여겨봤던 카드사들이 적극 추천했다.

102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영업해온 비자는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해외 결제 서비스의 확대가 시급했다. 각국의 로컬 카드사가 성장하면서 비자와 마스터카드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해외 결제 기능이 부가된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소비자들이 비자 혹은 마스터카드를 선택했다. 이에 비자 또한 소비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카드 발급을 확대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가 아닌 로컬 카드사가 비자 혹은 마스터카드를 애초부터 정해 카드를 발급한다. 이렇게 로컬 카드사의 협상력이 커지면서 비자는 발급 장당 비용을 요구한다거나, 고객의 호텔 발렛 파킹 비용을 부과하는 등 로컬 카드사의 늘어나는 요구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 카드를 발급해도 해외 결제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자가 얻는 수수료는 해외 결제가 이뤄져야 얻을 수 있는데 발급된 카드의 90% 이상에서 해외 결제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비자는 해외 결제를 유도하기 위해 글로벌 전용 페이먼트 서비스를 별도로 개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비자가 한국의 카드사 정산 시스템을 모두 파악해 직접 솔루션을 개발하기는 사실상 무리였다. 트래블월렛은 비록 실패하긴 했어도 국내 카드사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로컬 카드사들의 시스템과 글로벌 정산 구조를 속속들이 학습한 바 있다. 비자는 이런 트래블월렛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면밀한 검토 끝에 비자는 트래블월렛에 협력의 최고 등급인 ‘Principal License’를 발급했다. 이는 비자와 가장 광범위한 협력을 할 수 있는 라이선스로 이를 받은 사업자는 비자와 직접 협력해 서비스 개발과 마케팅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그동안 이러한 자격을 부여받은 기관은 리스크 인수 및 신용 관리, 지급 관리 등을 수행해본 대규모 기업뿐이었다. 스타트업 중에 이 등급을 받은 곳은 전 세계에 딱 두 곳으로 영국의 스타트업 레볼룻(Revolut)과 트래블월렛이다. 레볼룻이 라이선스를 받을 당시 기업 가치가 36조 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트래블월렛은 비자로부터 최고 등급의 라이선스를 발급받은 최초의 스타트업이었다.

트래블월렛은 오랜 시간 고민해 온 문제를 비자와의 협력으로 풀 수 있게 됐다. 비자와 실시간으로 오류 없이 승인 정보를 확인하고,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외환 정산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플레이어 없이 해외 결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또 비자가 부여한 ‘Principal License’는 글로벌 시장에서 보증 수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현실적으로 핀테크 스타트업이 기존 금융권과 협업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서비스의 경우 협업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금세탁방지(AML, Anti-Money Laundering) 시스템과 고객확인제도(KYC, Know-Your-Customer Rule) 구축 여부 때문인데 이 두 이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금융기관은 물론이거니와 연계된 기업 모두가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기존 금융권 입장에서는 스타트업의 기술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협업을 결정하기가 부담될 수밖에 없다. 비자 역시 트래블월렛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자는 6개월에 한 번씩 트래블월렛의 모든 시스템을 샅샅이 점검했다. 이로도 부족해 외부 감사 기관을 통해 1년에 한 번씩 점검을 실시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까다로운 감사는 트래블월렛 입장에서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모두 문서화돼 공유된 감사 자료는 전 세계 금융기관들과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를 기반으로 트래블월렛은 환전 수수료가 존재하지 않는 다이렉트 정산 구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103


기존 금융권의 보완재로 성장

외환 정산 구조의 효율화는 트래블월렛이 기존 플레이어들과 갈등이 아닌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다이렉트 구조로 바꾸는 과정에서 기존에 구축된 수많은 인프라(계좌, 자동입출금 시스템 등)가 필요했는데 이를 제공하는 주체들 역시 기존 금융기관들이었다. 트래블월렛은 같은 주체들이 제공하는 인프라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국내 은행이나 카드사 혹은 국내에 있는 해외 금융기관들 입장에서 해외 결제의 정산 과정에서 받는 수수료는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수수료 수입을 포기하더라도 효율 개선 과정에 동참해 장기적으로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 핀테크 스타트업과는 달리 산업은행 등 전통적인 기존 금융 기업들3 이 트래블월렛에 투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드사 역시 환영했다. 카드사의 수익은 여신으로부터 창출된다. 더 많은 신용 결제가 발생할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전체 결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외환 정산 결제 과정을 개선하기보다 수수료를 지급하는 게 타산에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트래블월렛이 비자와의 협업으로 외환 정산 수수료를 없애고, 거의 모든 국가에서 활용 가능한 멀티커런시(multicurrency) 기능을 갖추자 카드사 입장에서는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기존 카드에 트래블월렛의 제로 수수료의 외환 결제 서비스를 더하면 이전보다 더 많은 해외 결제를 유도할 수 있고 수익 창출의 기반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트래블월렛은 외환 결제의 정산 구조 개선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기존 금융권의 가치를 높여주는 보완재로 부상했다. 트래블월렛과 금융회사는 서로가 서로의 성공을 도와주는 윈윈(win-win) 전략을 구축했다.

위기를 기회로, 트래블페이 출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막히면서 외화 환전과 송금이 주 타깃인 트래블월렛에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는 오히려 신속하게 비즈니스를 확장하는 기회가 됐다. 해외 직구가 늘어나는 트렌드에 발맞춰 해외 결제와 외화 결제 솔루션 비즈니스로 발 빠르게 서비스를 확장했다. 외환 결제의 다단계 구조를 다이렉트로 바꾼 그간의 노력은 외화 결제가 필수인 해외 직구에 큰 강점이 됐다. 처음 모바일 환전 앱을 만든 것도 외환 솔루션 기업이 되기 위한 여정의 첫 단추였다. 팬데믹은 사업 확장의 시기와 속도를 앞당겼다.

104

빠르게 움직였다. 트래블월렛은 2021년 2월, 글로벌 지급 결제 서비스인 ‘트래블페이’를 출시했다. 트래블페이는 트래블월렛 앱을 이용해 기존에 서비스 가능한 15개 통화 가운데 필요한 외화를 전용 카드에 미리 충전하고, 충전된 외화로 수수료 없이 해외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다. 결제 수수료는 무료이며 외환을 충전할 때 발생하는 환전 수수료 역시 달러와 유로, 엔화는 무료, 그 외 통화에 대해서만 0.5%의 수수료를 부과한다. 국내 최저 수준이다. (그림 3, 4)

그뿐만 아니라 해외 직구족이 많이 사용하는 아마존(Amazon), 알리익스프레스(AliExpress). 24S, 매치스패션(MATCHESFASHION), 아이허브(iHerb) 등 해외 유명 온라인 쇼핑몰과 제휴해 트래블페이로 결제할 경우 10% 추가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수수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해외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배송비와 별도로 물건값의 2.5%가량의 거래 수수료가 붙는다. 원화로 결제된 물건값이 현지 통화로 바뀌는 중간 과정마다 수수료가 책정되는 탓이다. 하지만 트래블월렛을 통하면 수수료가 0원이다. 환전 앱을 만들면서 비효율적인 외환 시장 구조를 효율화한 결과다. 트래블페이 출시 이후 트래블월렛의 가입자는 10만 명을 넘어섰다.4

106


성공 요인 및 시사점

오늘날 많은 스타트업이 기존 기업들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트래블월렛이 보여준 혁신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많은 VC가 투자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파괴적 능력’을 혁신성의 척도로 삼는 경향이 짙다. 기존의 방식을 뒤집고, 기존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혁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블록체인도, 코인도 모두 그렇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은 윈윈을 추구한다. 누구도 파괴되지 않고 다음 단계를 향해 함께 성장한다. 이 과정을 의심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주체만이 파괴될 뿐이다. 트래블월렛이 이뤄낸 혁신이 이와 같다. 이들은 비자로부터, 국내외 금융권으로부터 제공받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기존 금융권과의 하모니를 이루면서도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해냈다.

1. 문제를 푸는 과정이 곧 사회적 합의

‘외환 정산 구조의 효율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협업해 온 트래블월렛의 노력은 지름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김 대표는 문제를 어렵고 힘들게 풀 때 지속가능성과 안정성, 사회적 통용성이 생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모든 이해관계자가 갈등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들의 기존 영역을 최대한 침해하지 않으려는 전제하에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적 합의’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혁신적인 노력으로 불리는 많은 새로운 서비스가 초기에 소비자로부터 얻는 환호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와 달리 엄청난 규모의 VC머니가 등장하고, 이는 많은 스타트업의 지름길 역할을 했다. 즉,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들이 내실을 갖추기 전에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지름길을 통하면 기존 사회에 녹아들거나 이해관계자를 설득하려는 노력 없이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미뤄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뤄둔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 결국 오늘날 목격하는 많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트래블월렛의 노력은 혁신과 사회적 합의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개념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다.

2. 평소에 잘해둬야 어려울 때 빛을 발한다

한편, 혁신을 구현할 수 있으려면 잘할 수 있을 때가 아닌 평소에 많은 이해관계자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이전에 기울인 노력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초반의 외환 정산 프로세스 개선 노력도 이런 시각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가 비효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개선 가능성이 낮은 분야였지만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협력을 이끌어냈다. 불가능이라 평가받는 영역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금융회사들은 외환 정산 프로세스의 세부적인 부분을 트래블월렛에 개방했다. 비록 초기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이는 이후 비자와 협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초기 이해관계자들과 협업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비자의 최고 등급 라이선스를 받은 이후에도 다이렉트 정산 구조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산을 위한 인프라는 기존 금융권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초기 협력을 위한 과정을 생략했다면 단지 비자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금융사들이 트래블월렛에 선뜻 자신들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쌓아둔 노력이 진짜 필요할 때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김 대표는 이런 시각을 과거의 직장 경험에서 배웠다. 과거 펀드매니저였던 김 대표는 말하자면 갑의 위치에 있었다. 주식이나 채권을 살 때 증권사에 주문을 내고, 증권사는 그 주문에 따라 수수료 수익을 얻는다. 많은 증권사는 주문을 얻어내기 위해 선물을 보내고 식사 대접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들이 협력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노력의 효과는 모두가 어려울 때 나타난다. 몇 년에 한 번씩은 펀드매니저가 힘들어질 때가 온다. 조선•해양 분야 전체가 어려워졌던 당시가 대표적이다. 산업 자체가 힘들어지면 국민연금이나 우정사업본부로부터 해당 주식을 모두 처분하라는 지시가 전달된다. 문제는 모든 펀드매니저가 팔아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주식 가격이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팔리지 않는 상황까지 발생하다. 팔아야 하는 주식은 100개인데 살 사람은 10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차이가 눈에 띈다. 평소 협력적 파트너로 행동했던 펀드매니저의 어려움은 밖에서 먼저 알아줬다. 김 대표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잘나갈 때가 아니라 그전부터 많은 이해관계자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3. 혁신을 위한 신뢰의 중요성

혁신은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사회는 제로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믿고,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함께 고민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신뢰의 형태와 범위는 달라졌다. 레이체 보츠먼 옥스퍼드대 사이드경영대학원 초빙교수는 책 『신뢰이동(Who can you trust)』을 통해 오늘날 신뢰가 모두가 아는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서의 ‘지역적 신뢰(local trust)’에서 조직화된 산업사회에서 중개자를 중심으로 한 계약과 법정, 상표 형태로 나타나는 ‘제도적 신뢰(institutional trust)’를 거쳐 ‘분산적 신뢰(distributed trust)’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협업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신뢰의 범위를 넓혔다.

이 같은 방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뢰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신뢰하지 않는 사회, 신뢰를 쌓고, 관리하고, 상실하고, 복구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살아남지도, 번창하지도 못할 것이다. 신뢰는 거의 모든 행위와 관계와 거래의 근간이다. 세계 최대 PR 기업인 에델만그룹의 리처드 에델만 회장은 ‘세계적인 신용 붕괴’ 현상을 밝혀낸 ‘2017 에델만 여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유시장에서는 사업체가 사람에게 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성공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신용 붕괴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제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사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일하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시민 하나하나, 그리고 공동의 목표와 신뢰가 중요한 공동체 하나하나에서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회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자만의 것도, 뛰어난 기술을 가진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족하고 평범하고 뛰어난 모든 사람이 어우러져 형성한 하나의 생태계다. 이런 세상에서 혁신은 파괴적일 수 없다. 트래블월렛의 사례는 혁신이 생태계를 구성해온 모든 주체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업,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삼은 지속가능성을 토대로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필자는 한국개발연구원 전문 연구원으로 디지털•플랫폼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 현업의 사례와 경제적 인사이트를 연결하기 위해 많이 듣고, 읽고, 쓰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주간 칼럼 ‘4차산업혁명이야기’와 ‘디지털이코노미’ 필자이며 아리랑TV ‘BizTechKorea’에 출연하고 있다. 한양대 겸임교수이며, LX하우시스 경영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 김동영 | KDI 전문연구원

    필자는 디지털·플랫폼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 중앙대 겸임교수이며 사단법인 모빌리티&플랫폼 협회장을 지냈다. KBS 성기영의 경제쇼 디지털경제 코너에 출연 중이다. 한국경제신문 주간 칼럼 ‘4차산업혁명이야기’와 ‘디지털이코노미’ 필자이며 EBS ‘위대한 수업(Great Minds)’의 자문위원(경제 분야)을 맡고 있다.
    kimdy@kdi.re.kr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