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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으로 성장한 ‘SK바이오팜’

“실패해도 문책 없다” 투자 되레 더 늘려
미충족 수요 시장 찾아 압도적 경쟁력 발휘

김윤진 | 307호 (2020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SK바이오팜이 글로벌 대형 제약사의 도움 없이 임상을 수행하고, 미국 시장에 혁신 신약을 출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회사의 성공 배경에는 경험의 ‘축적’이 있다. 첫째, 핵심 프로젝트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오너와 경영진이 책임자를 문책하거나 신약 개발 R&D 투자 규모 및 조직을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했다. 업계 선두주자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배운 교훈(lessons-learned)을 독자 개발 프로젝트에 이식했다. 둘째, 한정된 가용 자원을 분산하지 않고 미충족 수요가 있는 특정 제품군 개발과 미국 현지 상업화에 집중함으로써 세부 영역에서 압도적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셋째, 빅데이터 활용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방대한 화합물 라이브러리와 인공지능(AI) 플랫폼을 구축해 다른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



SK바이오팜을 빼놓고 올해 국내 주식시장을 논할 수 있을까. 공모주 일반 청약에 약 31조 원이 몰린 데 이어 상장 직후 주가가 사흘 연속 상한가를 치는 등 회사는 줄곧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자사주를 매입한 직원들의 ‘로또 당첨’급 대박과 차익을 챙기기 위한 퇴사 소식도 연일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화려한 증시 데뷔에 지나치 게 많은 이목이 쏠린 나머지 정작 1993년부터 끈질기게 이어 온 이 회사의 신약 개발 여정을 향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국내 제약 산업 사상 첫 글로벌 블록버스터 제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주가 거품에 대한 염려에 묻혀버린 것이다.

이처럼 단기적인 주가 등락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한국의 산업 생태계엔 득보다 실일 수 있다. SK바이오팜이 장기적인 투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 제약사 가운데 독자 개발한 100% ‘토종 신약’을 세계 시장에 내놓은 기업은 SK바이오팜이 유일하다. 이 회사는 지난 20여 년간 포기하지 않고 후보 물질 탐색과 발굴, 전임상, 임상 1∼3상, 미국 NDA(허가 신청), FDA(식품의약국) 승인, 영업, 마케팅에 이르는 신약 개발의 A to Z를 직접 수행해 왔다. SK바이오팜의 성장 과정이 업종을 불문하고 오랜 연구개발(R&D)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단기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국내 기업 환경에서 ‘축적의 힘’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속도와 애자일 경영을 강조하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와 비교할 때 제약•바이오 분야의 발전이 뒤처진 것도 이 같은 ‘인내 DNA’의 부족에서 일부 기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 제약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 경험은 쉽게 모방하기 힘든 SK바이오팜의 자산이다.

물론 회사가 이렇게 한 우물을 진득이 팔 수 있었던 것은 재벌 그룹 계열사로서 오너의 전폭적인 지원과 안정적 재정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SK그룹 차원에서도 ‘처음 가보는 길’이긴 매한가지였다. 굵직굵직한 인수합병(M&A)을 통해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주력 계열사의 몸집을 불리고 시장점유율을 키워 왔던 그룹으로서도 이렇게 맨땅에서 창업해 신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도전이었다. 특히 1990∼2000년대 초반에는 제약•바이오가 지금보다 더 생소하고 이질적인 산업이었던 만큼 SK바이오팜으로서도 혁신 신약을 개발해 FDA 승인을 받고 글로벌 탑티어와 경쟁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이처럼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던 SK바이오팜은 어떻게 신약 독자 개발에 성공하고 상장까지 이뤄낼 수 있었을까.

SK바이오팜이 그동안 어떤 실패와 극복의 과정을 겪으며 물밑에서 단단히 기반을 다져왔는지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들여다봤다. “신약 개발에 있어 단기간의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긴 호흡에서 왜 성공했는지, 왜 실패했는지와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lessons-learned)’만 기억하면 된다.”(황선관 SK바이오팜 R&D혁신실장•부사장)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에 성장의 비결이 숨겨져 있다.


DBR mini box I
SK바이오팜은

SK바이오팜은 1993년 SK그룹의 신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신약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1996년 미국 FDA로부터 신약 후보 물질 임상시험 승인(IND, Investigational New Drug,전임상시험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된 후보 물질을 가지고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기 위한 허가 신청)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중추신경계 및 항암 분야 R&D에 집중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국 FDA 승인을 받은 혁신 신약 2종(세노바메이트, 솔리암페톨)의 상업화 성과를 통해 신약 개발, 생산, 판매까지 모든 밸류체인(Value Chain)을 보유한 글로벌 종합 제약사(Fully Integrated Pharma Company)로 도약하고 있다.

회사는 현재 한국, 미국, 중국 3개국에 법인을 운영 중이다.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의 연구소에서는 혁신 신약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를, 미국 뉴저지의 현지 법인(SK라이프사이언스)에서는 글로벌 임상 개발과 마케팅을 직접 수행하고 있다. 중국 상하이 법인(SK바이오팜테크)은 현지 사업 기회 개발과 중국 허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0년 노력이 헛수고가 되다

2019년 11월,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가 미국 FDA 허가를 받으며 상업화를 위한 첫발을 뗐다. 하지만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이 출시 문턱까지 갔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10년 전에도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SK바이오팜이 SK 지주사의 한 사업부였던 2008년, ‘카리스바메이트’라는 뇌전증 신약이 FDA 허가 신청 단계까지 갔다가 탈락의 고배를 마신 바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매달려 왔던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회사에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카리스바메이트는 임상 1상이 끝나고 난 뒤인 1999년 이 분야 최고의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에 기술 수출(라이선스 아웃)을 했던 신약이었다. 뇌전증 블록버스터 제품을 개발한 경험이 있는 J&J와 함께라면 그 미래 역시 탄탄대로일 것으로 모두가 굳게 믿었고, 매끄러운 승인이 예상됐다. 당연히 시장의 기대감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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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정부터 결과까지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라이선스 아웃 이후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됐던 임상은 늘어졌고, FDA 승인에 요구되는 임상 디자인 및 데이터 확보 측면에서도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당연히 FDA는 허가 신청을 반려했다. 기대에 부풀어 있던 회사에 승전보 대신 “임상을 다시 해 데이터를 보완해 달라”는 취지의 보완요구 공문(complete response letter)만이 돌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J&J는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토파맥스라는 경쟁 약물을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 임상을 진행해 3∼4년 뒤 신약을 출시할 경우 남은 특허 존속 기간 및 임상 비용을 고려하면 경제성이 적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파트너의 급작스러운 임상 포기로 10년간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자 연구원들은 동요했다. 신약 출시의 꿈이 막바지 단계에서 좌절되자 직원들은 허탈감에 빠졌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모두 공통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해외 기술 수출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라는 교훈이었다. 제아무리 훌륭한 파트너일지라도 외국계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원하는 프로젝트 진행 속도나 기대 효과를 거둘 수 없음은 물론, 개발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신생 기업엔 너무도 소중한 신약 후보지만 글로벌 제약사엔 셀 수 없이 많은 파이프라인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프로젝트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도 있고, 파트너의 기존 제품과 경쟁 관계이거나 카니벌라이제이션(자기잠식) 위험이 있을 때 지연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나아가 프로젝트 막바지, 즉 임상 후기나 FDA 승인, 판매 단계에 뒤늦게 발을 담근 해외 기업이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는 불평등한 분배 구조도 ‘신약 주권’을 향한 열망을 부채질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당시 신약개발사업부장이었던 현 조정우 SK바이오팜 사장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신약 개발을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회사의 시스템과 역량을 갖춰야 하고, 일개 사업부 차원에선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주사 울타리 안에 있는 한 한계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신약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책임지고 집행하기가 힘들었다. 가령, 임상 2상에 약 300억 원이 필요하다고 결재를 올렸을 때, 제약 분야 전문가가 아닌 경영진이 300억 원이 적정 액수인지를 판단해 선뜻 투자를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위험에 대한 책임을 지기에는 산업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계는 의사결정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정유나 통신 산업에 최적화된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보유한 SK그룹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조직문화도 잘 맞지 않았고, 결재를 승인받기까지 여러 단계를 중첩해서 거치느라 병목이 생기기도 쉬웠다. 여기에 더해 지주사 인사이동과 조직 변동의 영향을 받다 보니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해결책은 분명했다. 해외 제약사에 손을 벌리지 않고 임상의 전 단계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려면 신약 개발에 맞는 경영 시스템과 법인화가 시급했다. 이에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조 사장은 과감히 분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최태원 회장을 찾아가 신약개발사업부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럴 때일수록 연구원들의 이탈을 막고 조직을 재정비해 신약 개발에 다시 도전해야 한다. 외형을 축소하기보다는 오히려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신약 개발에 더 투자하고, 속도를 내고, 파이프라인의 연속성을 보장하려면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국 2011년 신약개발사업부가 새로운 법인인 SK바이오팜으로 출범했다.

조 사장이 최 회장과 그룹 내부를 설득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데는 카리스바메이트의 실패가 큰 역할을 했다. 이 경험이 반면교사가 돼 2001년 발견한 차기 뇌전증 신약 후보인 ‘세노바메이트’의 성공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이다. 비록 카리스메이트는 시장에 출시되지 못했지만 앞서 쌓은 노하우를 발판으로 조직이 심기일전한다면 다음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먹혀들었다. 이에 최 회장은 신약 개발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사내 최고 전문가인 조 사장을 SK바이오팜의 수장으로 앉힌 뒤 전권을 위임했다. 임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순수 과학자를 경영자로 임명한 뒤, 책임지고 신약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이다.


DBR mini box II
주식 시장 화제주, 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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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바이오팜은 올해 카카오게임즈, 빅히트엔터테인먼트로 이어지는 국내 공모주 청약 돌풍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증시를 달궜다. 이처럼 회사가 주목을 받은 까닭은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 급등을 지켜본 개인, 기관투자가들이 대기업 계열사이자 미국 FDA 승인을 받은 혁신 신약 2종을 보유한 대형 바이오주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봤기 때문이다. 세노바메이트, 솔리암페톨 등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판매 및 차기 신약 파이프라인을 향한 관심뿐만 아니라 이미 주가가 많이 오른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의 투자 대안으로서 단기 수익을 향한 기대감이 이 같은 열풍을 이끌었다.

그 결과 SK바이오팜의 주가는 7월2일 상장 직후 열흘 만에 공모가 4만9000원 대비 5배 이상 으로 급등했다. 대부분이 R&D 담당 연구원으로 구성돼 직원 수가 많지 않은 회사 특성상 SK바이오팜 직원 207명이 1인당 평균 1만1820주의 우리사주를 배정받았고, 주가 고점에서 평균 시세 차익이 한때 20억 원을 웃돌며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일부 직원은 사표를 내고 퇴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인력 이탈의 문제, 미국 시장 매출을 둘러싼 불확실성, 향후 신약 개발의 성공 가능성과 비용 부담은 회사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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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o play?

1. 미충족 수요 제품군에 집중

SK바이오팜이 신약 독자 개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회사가 2000년대 초부터 뇌전증 치료제 분야에 몰두하며 확실하게 ‘선택과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한 우물만 파는 전략이었다. 통상 제약사들의 파이프라인을 보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당뇨, 비만 등을 망라하는 십여 가지 질환군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SK바이오팜은 사업 초기부터 문어발을 걸치지 않고 중추신경계 질환, 즉 특정 제품군에 집중하는 방향을 세웠다. 질환마다 임상에 요구되는 인원이나 규모, 방식 등이 다른 만큼 모두 잘 소화해낼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특히 당뇨나 비만처럼 일상생활과 밀접하고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만성질환은 약의 안전성과 효능을 더 까다롭게 심사하고, 1만 명이 넘는 인원을 대상으로 부작용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외국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국내에서 이런 대규모 임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회사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물론 선택과 집중에 따른 위험이 크지 않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또 ‘왜 하필 뇌전증이냐’는 물음표도 따라왔다. 시장 규모도 협소하고,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뇌전증 치료제는 신약 개발 경험이 부족한 신생 기업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임상 성공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다. 개, 쥐 등 동물을 대상으로 시험했을 때 나타난 약의 효능이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에서 비교적 유사하게 나타나는 편이었다.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 질환 치료제처럼 임상 결과가 동물 실험 결과와 딴판으로 나오거나 완전히 예상을 저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용 자원이 한정돼 있고 막대한 실패 비용을 떠안는 게 부담인 신생 기업에 있어 높은 임상 성공률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이에 회사는 어설프게 알츠하이머처럼 임상 성공률이 낮은 고위험 시장에 무턱대고 뛰어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성공률이 높은 레드오션에 들어가되 ‘확실한 차별화’를 통해 경쟁 우위를 점하는 게 낫다고 봤다. 많은 약이 출시돼 포화 상태로 보이지만 기존 약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환자가 40% 이상이기 때문에 R&D 전략에 따라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울러 당장은 시장이 작아 보이더라도 뇌전증 치료 용도로 먼저 FDA 승인을 받은 뒤 편두통, 신경병증성 통증, 양극성 장애 등 다른 중추신경계 질환으로 약의 용도를 넓혀간다면 얼마든지 매출을 확대할 여지가 많다는 계산도 있었다.

다만 20여 종의 비슷한 약이 이미 존재하는데 고만고만한 약 하나 더 만든다고 시장을 선도할 수는 없었다. 압도적 경쟁 우위를 가진 ‘게임 체인저’가 돼야만 했고, 그러려면 기존 약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미충족 수요(unmet needs)를 찾아 첫발부터 제대로 떼는 게 중요했다. 실패의 쓴맛을 본 만큼 처음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향후 10년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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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SK바이오팜은 J&J와 공동 개발하면서 쌓은 뇌전증 분야의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동안 다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미국 의료 시장의 핵심 여론 주도자(Key Opinion Leader)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환자(patient)의 미충족 수요는 당연히 ‘완치’겠지만 의료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환자보다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physician)와 약의 보험 수가를 주는 지불 기관(payer)의 수요를 정확히 읽는 게 관건이었다. 이에 따라 회사는 의사와 보험 지불 기관의 담당자를 30∼50명씩 접촉하며 어떤 뇌전증 신약을 원하는지 수소문했다. 발품을 팔수록 이들의 미충족 수요도 더욱 뚜렷해졌다. “최근 출시된 약들이 모두 난치성 뇌전증에 따르는 발작을 부분적으로 줄여주지만 100% 완벽하게 없애주는 약은 아직 없다. 더 많은 환자에게서 완전히 발작을 사라지게 하는 약이 있다면 무조건 처방하고 수가를 지급하겠다”라는 게 공통적인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반영해 회사는 ‘완전 발작 소실(zero seizures)’을 목표로 설정했다. 발작이 완전히 소실된다는 것은 환자들의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였고, 삶의 질 향상은 뇌전증 신약 선택의 확실한 유인이었다.

이렇게 역량이 응집된 결과로 나온 제품이 바로 경쟁 약들의 효능을 압도하는 세노바메이트였다. 후보 물질 개발을 위해 합성한 화합물 수만 2000개 이상, 미국 FDA에 신약 승인 신청을 위해 작성한 자료만 230만여 페이지에 달한다. 뇌전증은 주로 뇌의 ‘흥분’과 ‘억제’의 균형이 깨지면서 발작이 일어나는 질환인데, 기존 약들은 1)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2) 억제가 잘되도록 유도하는 방식 중 하나를 택해왔다. 그런데 세노바메이트는 이 두 가지 경로를 동시에 조절함으로써 발작을 완전히 제거하는 비율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이고 ‘계열 내 최고(best-in-class)’가 될 수 있었다. 연구소 전체가 사활을 걸고 완전 발작 소실이라는 미충족 수요 해소에 집중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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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지 시장 중심으로 조직 재편

첫 실패인 카리스바메이트 프로젝트의 중단 이후 신약 독자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사내 공감대가 커지긴 했지만 과연 해외 제약사의 도움 없이 FDA 승인과 출시, 영업/마케팅까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결국, 핵심 타깃 시장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표준이 되는 미국 FDA 승인의 높은 문턱을 넘어야만 연이은 다른 국가에서의 후속 허가, 판매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미 당국과 오랜 기간 유대를 쌓고 밀접하게 소통해 온 글로벌 제약사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미국이 전체 신약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허가 기준도 가장 엄격하고, 가격도 비싼 만큼 이곳에서 약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했다. 뇌전증 치료제만 보더라도 미국의 시장 규모는 33억 달러(약 4조 원)로 전 세계 61억 달러(약 7조3000억 원)의 54%에 달했다. 이에 조 사장은 한국 로컬 회사의 한계를 벗고 글로벌 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업무 시스템과 조직을 철저하게 미국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CEO와 주요 임원들이 모두 한국에 있는 상황에서 목표로 하는 미국 시장에 최적화된 전략을 수립, 실행하기는 힘들었다. 시차 때문에 SK바이오팜의 미국 법인인 SK라이프사이언스와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에 조 사장은 2012년 임상 돌입과 동시에 사무실 및 거주지를 미국으로 옮기고 한달 단위로 양국을 오갔다. 그리고 현지에 상주하면서 ‘미국에서 약을 팔려면 시간대도 미국에 맞춰야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한국 임직원과도 미국 타임라인에 따라 소통하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을 이해하는 현지 인력도 계속해서 충원하고 강화해 나갔다. 그 결과 점점 한국에 있는 임원들이 미국 평사원들과 화상회의를 하기 위해 밤 10∼12시에 야근을 하는 풍경도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CEO가 직접 미국을 주 무대로 삼아 양국을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법인은 약물 후보 물질 발굴과 포트폴리오 관리에 집중하고, 미국 법인은 임상 개발과 허가를 책임지고 수행하는 분업 시스템이 갖춰지게 됐다.

미국 현지에서 세노바메이트 임상을 진행하다 보니 당연히 신약에 눈독을 들이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임상 2상부터 유의미한 데이터가 나오기 시작하자 기술을 사가겠다며 거액을 제시하거나, 무작정 회사를 찾아와 팔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곳들도 나왔다. 당장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솔깃한 제안에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영진과 직원 모두 기술 수출이 무조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은 상태였다. 이에 성급히 결정을 내리는 대신 시나리오별 장단점을 꼼꼼히 비교했다.

기술 수출을 할 경우의 장점은 유동성 확보였다. 최소한 4000억∼5000억 원의 현금이 바로 들어오고 진행 단계별로 수조 원까지 확보할 수 있어 다른 프로젝트에 투자할 재원이 즉시 마련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아울러 임상 3상에 드는 막대한 비용과 위험 부담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고 글로벌 제약사가 적극적이라면 개발이 오히려 빨라질 여지도 있었다. 뇌전증뿐 아니라 여러 질환군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임상을 진행해 한 번에 여러 제품을 출시하는 전략도 노려볼 수 있었다. 반면, 단점은 이렇게 사활을 걸고 개발해 온 약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점이었다. 상업화 이후 이익의 대부분도 공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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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갈림길에 선 SK바이오팜은 거대 제약사들의 러브콜을 거부했다. 회사가 이처럼 독자 개발을 선택하는 데는 리더십의 역할이 컸다. 먼저, CEO를 비롯한 조직 전체가 그룹 총수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2011년 SK바이오팜이 지주사에서 분사한 뒤로도 SK그룹이 3년 주기로 계속 투자를 해왔기 때문이다. 출자 금액을 합산하면 5000억 원이 넘었다. 제약•바이오를 차기 먹거리, 즉 신사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명확한 그림을 바탕으로 “임상 2상이든, 3상이든 원한다면 끝까지 개발을 해봐라”라는 게 그룹의 기조였다. 내부 구성원들조차 과연 추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회의적일 때도 변함없는 투자가 이뤄졌다. 현금이 부족하면 기술 수출 외에 대안이 없어지는데 애초에 이전 거부라는 선택지를 가졌던 것도 그룹이 든든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문책이나 CEO 교체가 없었다는 점도 구성원들에게는 확실한 신호가 됐다. 조 사장 역시 전문 경영인으로서 성과를 보이기엔 대형 기술 수출이 더 쉽고 편한 길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신약 하나는 우리의 힘으로 내놔야 한다”는 비전을 굽히지 않았다. 확고한 비전을 바탕으로 가시밭길을 앞장서서 헤쳐나가는 ‘추장 리더십’에 구성원들이 부응하면서 세노바메이트의 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SK바이오팜 손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2020년 5월 미국 시장에 출시된 세노바메이트의 판매는 회사가 당면한 새로운 도전이다. 임상 승인뿐 아니라 영업/마케팅까지 현지 파트너의 도움 없이 미국 법인인 SK라이프사이언스가 단독으로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업/마케팅은 글로벌 제약사의 존재감이 가장 큰 영역이다. 큰 회사들의 네트워크나 브랜드 인지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매출의 절반을 떼 줘야 하는 불평등한 분배를 감수하면서 현지 파트너와 손을 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SK바이오팜은 뇌전증이 영업 대상이 분명한 질환군인 만큼 전사적 역량과 자원을 여기에만 집중하면 진입장벽을 뚫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예를 들어, 당뇨병 같은 질환은 환자가 미국에만 수천만 명에 달해 의사들을 접촉하는 데 영업 인력이 최소 3000명에서 1만 명까지 족히 필요하다. 반면 난치성 뇌전증은 주로 정해진 대학/거점 병원에서 치료하는 질환이라 주요 핵심 의사들만 잘 공략하면 굳이 파트너를 끼고 영업하지 않아도 통할 것이라는 게 회사의 판단이었다.

이에 SK라이프사이언스는 세노바메이트가 출시되기 약 4년 전부터 영업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J&J에서 실제 뇌전증 블록버스터 약 ‘토파맥스’ 판매를 담당했던 세바스찬 보리엘로를 최고상업화책임자(CCO, Chief Commercial Officer)로 임명하고, 영업 인력을 150명까지 확충했다. 미국 법인 전체 인력 약 250명 중 글로벌 임상을 담당하는 100여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업 전담으로 고용한 셈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의원이 문을 닫고 의사들을 상대로 영업하기가 쉽지는 않은 환경이지만 난치성 질환 치료제는 일단 한 번 처방을 시작하면 금세 늘어나는 만큼 상황이 호전되는 대로 매출이 빠르게 올라갈 것으로 예상한다.” 황 실장의 말이다. 코로나19로 의료 환경이 바뀌면서 최근에는 디지털 기반 플랫폼을 도입한 원격 콘퍼런스 진행 등 온라인 마케팅 활동에도 뛰어들었다.

How to win?

1. ‘Re-purposing’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SK바이오팜이 신약 독자 개발의 길을 택했다고 해서 무조건 처음부터 모든 프로젝트를 혼자 끌고 갔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사는 경험이 없고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항상 업계 1등과 제휴하며 파트너로부터 개발 전략과 노하우를 학습했다. 세노바메이트의 글로벌 임상과 허가도 결국 뇌전증 분야 1등인 J&J와 공동으로 카리스바메이트 임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이룬 성과였다.

아울러 카리스바메이트가 SK바이오팜에 쓰라린 실패의 기억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경험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깨달음도 함께 남겼다. J&J가 프로젝트를 중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SK바이오팜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임상이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반환된 데이터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했다. 이 같은 복습 과정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실이 드러났다. 카리스바메이트가 뇌전증 부분 발작 환자를 상대로는 효과가 약하지만 일부 전신 발작 환자군에서는 유의미한 효과를 보이는 게 확인된 것이다. 전신 발작을 동반하는 희귀 뇌전증 환자로만 한정했을 때는 기존 약보다 치료 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근거였다. 이를 발견한 회사는 약의 용도를 재빨리 변경했고 ‘신약 재창출(drug repurposing)’ 전략을 통해 프로젝트를 부활시키고 상업화에 재도전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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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Go or No-Go’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해서 모든 프로젝트를 붙잡고만 있을 수만은 없다. 여러 신약을 동시에 개발하며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을 수 있는 글로벌 제약사와 달리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신생 기업은 기회비용을 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약 하나를 시장에 내놓는 데 평균 10∼15년의 세월과 1조∼2조 원의 비용이 든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그 시간과 돈을 쏟는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임상시험계획(IND)을 승인받은 뒤 최종 판매 승인까지 갈 확률이 산업 평균 약 8%에 불과하다. 즉, 100개 신약을 가지고 임상시험을 진행해봤자 그중 8개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추신경계 질환만 따로 보면 확률은 약 7%로 더 낮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까지 13개 신약의 임상을 개시해 2개를 성공리에 상용화한 SK바이오팜의 개발 성공률은 15%로 업계 평균보다 높다. 또 분사 이후 신약 개발에 약 7000억 원을 투입해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비용도 상대적으로 적게 든 편이다.

그렇다면 SK바이오팜은 어떻게 소수 정예 프로젝트를 엄선해 성공률을 높이고 소위 ‘가성비’를 극대화할 수 있었을까. 회사의 전략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단계별 관문 모델(stage gate model)’이다. 신약 개발의 관문마다 프로젝트를 시험대에 올려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Go or No-Go’, 즉 계속 끌고 갈 것이냐, 멈출 것이냐를 가르는 포트폴리오 관리 시스템을 가리킨다.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 같은 이유를 정기적으로 살핀 뒤, 그 이유를 극복하기가 힘들어 보인다면 최대한 빨리 접자는 게 이 모델의 도입 취지다. 끈질기게 버티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니다 싶을 때는 멈추는 것이 더 큰 용기이자 비용 절감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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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에 따르면 각 프로젝트를 맡은 팀은 신약 개발 초기부터 ‘목표 제품 프로필(TPP)’을 설정한다. 다시 말해, 신약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을 때 과연 어떤 차별화 포인트를 내세워 판매할 것인지, 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지 목표를 명확히 세운다. 첫 단추를 끼울 때부터 경쟁 우위, 시장 포지셔닝과 타깃 고객의 윤곽을 잡고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전임상, 임상 1상, 2상 등 신약 개발 단계를 하나씩 밟을 때마다 팀원들은 처음 설정한 TPP가 아직 유효한지, 이를 기준으로 제품이 여전히 시장 가치가 있는지를 검토한다. 일종의 자가 검진인 셈이다. 세부 체크 리스트도 있다. 경쟁 약물 대비 효능, 부작용, 유지율, 특허 기간 등 항목별로 ‘이 정도도 만족하지 못하면 접겠습니다(minimum)’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expected)’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최고입니다(desired)’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평가한다. 그리고 어디에 많이 체크하는지에 따라 ‘Go or No-Go’가 정해진다.

이 관문을 통과했다면 두 번째 단계는 ‘Go’를 한 포트폴리오 사이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개발 속도에 차등을 두는 작업이다. 이런 식의 프로젝트 가지치기는 곁가지를 솎아내 회사의 ‘선택과 집중’을 가능케 하고, 개발 성공률을 끌어올린다. SK바이오팜이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도 이 같은 2단계 전략에 있다.

3. ‘Data-Driven’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프로젝트를 접을 수도, 접었던 프로젝트를 부활시킬 수도 있겠지만 회사의 저력은 이 과정을 전부 기록하는 데서 나온다. 실패의 기록도, 성공의 기록도 장기적으로는 다 데이터로 남아 차기 신약 개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막 IPO를 마치고 상업화의 걸음마를 뗀 SK바이오팜의 최대 자산도 혁신 신약 2종이 아닌, 20여 년간 축적된 이 데이터에 있다. 일각에서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뇌전증 신약에만 매달려 왔기 때문에 포트폴리오가 다양하지 않고 특정 제품군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SK바이오팜의 약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오랜 기간 ‘뇌’ 연구라는 한 우물을 판 경험이 뇌전증을 넘어 다른 중추신경계 질환군으로의 확장에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특히 항암 분야로 넓혀 뇌종양 치료제 등을 개발하는 데 유용한 통찰을 줄 수 있으며 파킨슨, 알츠하이머 등 의료 수요가 큰 시장으로 넘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황 실장은 “SK바이오팜은 뇌 혈관장벽(BBB, Brain Blood Barrier)1 을 잘 뚫을 수 있는 약물 개발을 핵심 역량으로 삼고 있고, 자체적으로 2만5000개∼3만 개의 방대한 중추신경계 특화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보유하고 있다”며 “항암제의 99%가 뇌 속에 침투해 약효를 발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항암 신약 개발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처럼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되 뇌 관련 데이터를 기반으로 포트폴리오 확장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는 사내에 쌓인 데이터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AI 기반 약물 설계 플랫폼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약 1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디지털 헬스케어팀도 꾸렸다. 현재 이 디지털 전담팀은 SK그룹 IT 계열사 전문가들의 지원사격을 받아 개별 연구원의 경험과 직관을 대체해 최적의 후보 물질을 찾아 줄 AI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 AI 신약 개발 회사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양질의 데이터베이스를 갖춘 회사는 드물다는 판단에서다. 마치 에어비앤비, 우버 등의 플랫폼 기업들이 중개 역할만 하고 부동산과 차량 같은 실물을 소유하지 않듯이 제약업에서도 실물이 뒷받침돼 있지 않은 플랫폼만 넘쳐나고 있다. 이에 SK바이오팜은 20여 년간 사내에서 합성해 본 30만∼35만 개의 화합물 데이터, 생체 내•외 임상 데이터 등을 잘 학습시키면 AI를 고도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신약 후보를 발굴하는 동시에 약효와 부작용을 예측하는 AI 플랫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처럼 AI가 화합물이 인간의 몸에서 어떤 독성을 유발하는지, 얼마나 흡수가 잘되는지 등을 알려주게 되면 임상 성공률이 높아지고 신약 개발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 아직은 연구원들을 능가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점점 사내에서도 이 플랫폼의 활용도가 늘어나는 추세다. 황 실장은 “이전까지는 연구원들이 데이터를 일일이 확인한 뒤 경험적으로 통찰을 구했지만 이제는 데이터의 양이 수십만 가지가 넘어가면서 인간 관찰과 인지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며 “앞으로는 사람이 아닌 AI가 이 역할을 지원하면서 신약 개발에 있어 데이터의 활용 가치가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DBR mini box III : 성공 요인 및 시사점
흔들림 없이 글로벌 지향, ‘골든 타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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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바이오팜 신약 개발의 첫 번째 성공 요인은 신약 개발에 착수해 20여 년간 흔들림 없는 투자와 지원을 했다는 점이다. 세상의 어떤 기술 개발 과정도 쉬운 것이 없겠지만 신약 개발 성공으로 가는 길은 특히 멀고도 험하다. 소요 기간은 평균 13년, 비용은 1조∼2조 원 정도이다. 실패의 위험도 매우 크다. 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무수한 신약 후보 물질이 실험실 안에서 폐기되며, 연구개발 비용이 이미 상당히 투입된 뒤인 임상시험 단계에 와서도 성공 확률이 크게 높지 않다. 성공률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임상 1상 단계 프로젝트가 최종 시판 성공에 이를 확률은 약 10% 내외다. 10개 중 하나만 성공한다는 뜻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임상시험이나 기술 이전의 성공과 실패 소식은 기업 가치를 요동치게 만들며, 장기적인 기업 전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SK바이오팜도 기대했던 J&J와의 전략적 제휴 실패 등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글로벌 신약 개발이라는 목표하에 전략적 제휴 실패 경험을 딛고, 독자 개발로 신약 개발의 성공을 이뤄냈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SK바이오팜의 기술 역량에 적합한 분야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SK바이오팜은 사업 초기부터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개발에 매진해 왔다. 중추신경계 질환군에 있는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등은 현재 적절한 치료제가 없어서 대표적인 개발 유망 분야로 꼽힌다. 그러나 질병의 복잡성을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분야라는 점에서 개발 성공이 어려운 분야로도 악명이 높다. 이에 SK바이오팜은 중추신경계 질환 내에서도 뇌전증 치료제라는 개발 성공률이 비교적 높은 세부 분야를 택했다. 신약 개발 경험이 부족했던 회사의 개발 성공 가능성 측면에서 유효한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뇌전증 치료제 분야는 약효 검증을 위한 기술적 도구가 잘 확립돼 있기에 신생 기업으로서 겪는 기술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가 있었다.

또한, 다수 경쟁자의 존재가 신규 진입자에 주는 장점도 극대화했다. 신약 임상시험에서는 성공과 실패 정보가 비교적 자세히 공개되기 때문에 선발주자, 즉 경쟁사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서도 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한 기업의 임상시험 성공과 실패 경험을 다른 기업이 활용해 미래 신약 개발 성공률을 높이기도 한다.

세 번째 성공 요인은 사업 초기부터 ‘본 글로벌(Born Global)’ 기업 전략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본 글로벌’ 기업이란 사업 초기부터 아예 외국 진출을 노리는 기업을 말한다. 국내 대부분 제약기업의 신약 개발이 한국에서 시작해 해외에 진출하는 모델로 진행한 것과 달리 SK바이오팜은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신약 개발을 미국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은 신약 개발 성공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세계 제약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사실상 신약 허가의 표준이다. 이 시장에 빨리 진입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임상, 허가 성공의 관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개발 시작부터 미국에서 진행할 경우 미국 시장의 니즈 파악, 다양한 제휴 관계 및 네트워크 형성, 우수 인력 채용 등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는 데 필요한 경험 축적이 용이하다. 해외 현지 법인이 국내 본사의 문화와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은데 SK바이오팜은 미국 현지 시장 중심으로 조직문화와 업무를 재편해 미국 현지 시장에서의 적응력과 의사결정 속도를 높였다.

SK바이오팜 성공 사례는 신약 개발을 하는 우리나라 기업에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초기 역량 구축을 위한 자원의 집중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경험에 의한 학습(learning by doing)’을 통해 지식이 축적되고, 이러한 지식의 축적이 기술 혁신 성공을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다. 신약 개발과 같이 개발 실패의 위험이 크고, 고도로 복잡한 지식을 활용하는 경우 이런 경험에 의한 학습은 더욱 중요하다. 실제로 2000여 개의 신약 프로젝트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기업이 임상 단계의 신약 개발 경험 수가 많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i

특히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돼 질환에 대한 선행 지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임상 2상과 3상 단계에서는 경험의 효과가 더 크다. 선행 지식의 축적이 신약 개발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단기간에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산발적으로 쌓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특히 대부분의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과 제약사의 경우 충분한 개발 기회를 가질 만한 자원이 부족한 만큼 기업의 소중한 자원을 분산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독자 개발과 전략적 제휴의 적절한 선택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기술 이전 등 전략적 제휴를 통한 신약 개발의 성공률이 독자 개발보다 높다고 알려져 있다. 신약 개발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외부와 협업한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높은 성공 확률을 보인다. 다른 기업의 경험과 역량을 내부화함으로써 기술 개발에 드는 비용 부담은 덜고,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략적 제휴로 인한 위험도 존재한다. 상호 간 전략적 우선순위의 차이, 기업 역량 차이로 인한 불평등 조건, 후발 기업의 독자적 역량 구축 제한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독자 개발을 할 것인가, 전략적 제휴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항상 뜨거웠다. 아직 우리나라 기업들은 신약 개발에 필요한 모든 역량을 갖추기 어렵기에 전략적 제휴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신약 개발 의사결정 지연이나 불평등한 계약 조건, 심지어 파트너와의 전략 불일치에 따른 개발 포기의 위험을 굳이 감수하기보단 독자 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글로벌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실패를 몇 차례 겪은 국내 제약사들로서는 신약 개발 독립 선언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무조건 독자 개발만이 능사도 아니다. 실패 위험을 나누지 못하고 전적으로 홀로 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 역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는 전략적 제휴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경험이 있고 개발 역량을 어느 정도 확보한 프로젝트라면 독자 개발을 선택하는 등 상황에 따라 맞춤형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셋째, 실패의 관리가 중요하다. 누구나 실패는 피하고 성공하기를 원한다. 신약 개발에서는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고, 절실하게 치료제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팀이 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의 본원적 위험은 피할 수가 없다.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질병의 복잡성과 약물의 작용 기전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르다’며 위험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위기를 불러올 뿐이다. 본원적 위험이 속성을 인정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비용이 더 적게 드는 실패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프로젝트 초기에 실패를 빨리 경험한다면 비용이 많이 드는 실패를 예방할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연구팀이 842개의 신약 프로젝트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임상과 임상 1상 단계에서의 프로젝트 중단율이 높은 기업, 즉 얼리 터미네이터(early terminator)의 프로젝트 최종 성공 확률이 평균보다 더 높다고 한다. ii 따라서 신약 개발 초기부터 여러 검토 단계를 설정하고, 단계마다 개발 진행 여부(Go or No-Go)의 의사결정을 제대로 내릴 수 있도록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실패의 경험도 신약 개발의 성공에 도움을 준다. 최근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의 연구팀이 신약 개발 성공과 실패 경험이 이후에 신약 개발 성공 여부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904개 기업의 1749개 프로젝트를 분석한 결과 과거의 성공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 경험이 신약 개발 성공률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iii 실패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지나간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 제약기업과 바이오 스타트업은 신약 개발의 성공과 실패의 부침 속에서도 후퇴하지 않고 조금씩 발전을 해오고 있다. 임상시험의 성공과 실패는 늘 있을 수밖에 없고, 중요한 것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축적해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 상업화 열매를 맺는 것이다. SK바이오팜의 신약 개발 성공은 결국 지속적인 투자와 지식 축적만이 이를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상원 성균관대 교수•제약산업학과 교수•학과장 sangwlee@skku.edu
필자는 서울대 약학대학 학사와 보건학 석사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기술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미국 와튼스툴 방문연구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단장을 거쳐서 현재 성균관대 약학대학에 재직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제약산업학과장으로 약업경영, 바이오벤처경영, 제약기술가치평가에 대해 자문과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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