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조선시대 성군 중 한 명인 정조는 ‘동덕회’라는 비선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비선을 정파 간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로 활용했다.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로 구성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대로 활용된다면 비선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앤드루 잭슨의 ‘키친 캐비닛’은 그런 면에서 ‘나쁜 비선’ 중 하나로 꼽힌다. 나름의 사적인 인맥을 갖고 기업에 대한 조언을 얻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비선은 능력과 경륜, 지혜를 갖춘 이들이어야 하며, 그들의 역할이 사적인 이익의 추구여서는 안 된다.
창문이 구름을 밀치는 저녁 閶闔排雲夕함지가 해를 떠받드는 가을 咸池擎日秋백 년 동안 이 모임을 길이 하리니 百年長是會덕과 함께 복도 함께하리라 同德又同休이 시는 정조가 1778년(정조 2) 가을에 지은 ‘동덕회(同德會)’란 제목의 시다. 마치 사가에서 계모임을 축하하기 위해 쓴 글처럼 보이지만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시’다.
제목에서 보이는 ‘동덕회’는 정조가 만든 비선조직의 이름이다. 이 모임의 멤버는 서명선, 홍국영, 정민시, 김종수, 이진형이다. 모두가 영조 말년에 위기에 빠진 정조를 보호했던 인물들이다.
1775년(영조 51) 11월,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좌의정 홍인한, 정후겸 등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홍인한은 ‘세손은 누가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세손을 왕따시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영조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말이었지만 현 국왕의 편에 서서 영조의 양위를 반대하는 차원으로 좀 과격하게 말했다고 치부하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를 보호하던 편에서는 영조가 작정하고 후계자를 세손으로 점찍어 둔 상황에서 홍인한의 발언은 무시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바로 이때, 서명선은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고, 논란이 일자 홍국영, 정민시, 이진형 등이 같은 편에 섰다. 김종수 역시 드러나지 않게 정후겸 세력을 공격했다. 결국 오랜 논란 끝에 영조는 홍인한을 처벌하고 세손 정조는 대리청정에 들어갔으며 다음 해에 영조가 사망하자 정조가 즉위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세손 시절부터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의 일원이 돼 정조를 보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손이 즉위하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덕회’는 1777년(정조 1) 12월3일에 조직됐다. 2년 전인 1775년 12월3일이 바로 서명선이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가 사망하기까지 20년 이상을 같은 날에 모여 모임을 했다. 동덕회의 형식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임이 열리지 못할 때에는 정조가 따로 기념하는 글을 지어 내리고, 개별적으로 선물을 주는 등 각별한 애정을 나타냈다.그런데 조선의 역사를 보면 임금이 즉위할 때 막대한 공을 세우거나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에게는 대개 공적에 따라 등급을 나눠 공신책봉을 하고, 상도 주고, 벼슬도 주고, 작위를 주는 방식으로 특혜를 베풀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즉위에 막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신 책봉을 하지 않는 대신 공신에 준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동덕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첫 번째 모임에서 나온 대화를 기록해 <동덕회축(同德會軸)>을 만들었다. 마치 공신들이 모여서 동맹을 서약한 공신회맹축(功臣會盟軸)과 같은 역할의 두루마리 문서다. 또 이들의 대의명분을 적극적으로 역사에 남기기 위해 <명의록>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물론 이들 멤버 중 홍국영은 후궁으로 만든 누이동생이 죽자 왕비 효의왕후가 살해한 것으로 생각하고 독살하려다 발각돼 죄인이 됐지만 신하들의 집요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역적 처분을 받지 않았던 것은 홍국영의 공로에 대한 정조의 배려 덕이었다. 다른 구성원들도 매번 특별한 예우와 보호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김종수가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게 됐는데, 정조는 무척 섭섭해 하며 ‘술을 경계하라’는 시를 지어주면서 이별주를 잔뜩 마시게 했다. 또 김종수를 가까이 오게 해서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할 정도로 사사로운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의 동덕회 멤버들에 대한 각별한 배려는 모두 <실록>이나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정조가 직접 작성하기 시작한 <일성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까지는 공신책봉 혹은 공신특혜에 준하는 정조의 공식적 우대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정조는 이렇게 만든 비선조직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일단 비선조직이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조직인 만큼 공식 기록에선 정조의 지시와 동덕회 멤버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300여 편의 편지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동덕회 회원들은 분명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최측근이자 공신이었다. 그러나 각각은 당색이 달랐다. 김종수와 홍국영은 노론시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입장)였고, 반면 서명선, 정민시는 소론이었다. 정조는 ‘군왕이 현명한 신하와 사적인 정을 쌓아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노론 벽파였던 심환지에게 그렇게 많은 편지를 보내고, 다른 사람이 눈치 챌까봐 정조 자신의 편지를 전해주는 자나 심환지의 편지를 전하는 자를 정해두고 비밀을 유지했던 것처럼 이들 동덕회 멤버들에게도 각각 별도의 라인을 형성하고 그들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고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있었다. 정조는 노론시파의 영수였던 김종수를 탕평책의 조정자로서 적극 활용해왔는데 1799년(정조 23)에는 김종수가 연로해 적극적인 활동이 힘들어진 상황이 됐다. 정조는 당시 노론벽파의 영수 역할을 했던 심환지에게 김종수가 해왔던 정치적 역할을 부탁했다. 그러면서도 “경은 자기편에서도 잡음이 있고, 소론들에게 거슬리고 남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으니, 이를 고치지 않으면 위아래 정국에 심각한 문제가 터질 것 같소”라며 김종수를 롤모델로 본받아 각 당의 정치적 이견과 입장을 조정해 소통과 통합을 잘 이끌어내도록 독려했다.
정민시의 경우에도 정조는 따로 정민시의 집을 찾거나 정민시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여러 정보를 얻고 있었다.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심환지에게 특정 사안을 지시할 때 정민시로부터 얻은 정보를 근거로 제시하는 대목이 확인된다. ‘정민시 집에서 들은 얘기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편지로는 곤란하고 직접 만나지 않으면 얘기하기 어렵다’며 심환지에게 바로 입궐하도록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심환지에게 정민시를 정책 운영의 의논 상대로 추천하고 있다. 정조 치세 후반에 심환지를 조정자로 활용하면서도 당색이 다른 정민시를 논의 파트너로 밀어 넣고 공식적인 회의 이전에 조율을 끝내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한 것이다.현대의 비선조직이라는 개념은 1800년대 당시 나폴레옹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유럽 각지에서 전쟁을 지휘하며 정식 채널을 통해 올라오는 보고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비선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만든 비선조직은 20대의 젊은이들로 구성됐는데 나폴레옹은 전선에 배치돼 있는 군단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방향성 있는 망원경(Directed Telescope)’으로 불렀다. 사단장이나 군단장과 같은 군의 정식 지휘계통으로 올라온 보고와 이 비선조직이 알려온 내용을 비교하고 의문이 나는 부분을 재검토한 후 확인한 정보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림으로써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현대 기업이나 여러 조직체에서도 비선조직의 운영사례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 정보를 무시하는 경향인 ‘확증편향’에 빠진 리더의 경우 비선조직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도 1829년 취임 직후부터 공식 내각회의를 하지 않고 대신 비공식 측근과 몇몇 사람의 비선조직으로 국정의 중요한 정책과 방향을 결정했다. 이른바 미국 정치사에서 유명한 ‘키친 캐비넷(kitchen cabinet·부엌 내각)’이다. 비공식 사적 조직이 국정의 총사령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조가 동덕회를 통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여론 파악이나 당파 간의 이견 조정 등 탕평정국의 운영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나 나폴레옹의 Directed Telescope같이 보고의 정확성을 유지했던 것처럼 비선조직은 존재 자체가 부정돼야 한다기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비선조직은 공적인 시스템, 공적 판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조직으로 운영돼야 한다. 측근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들의 입장을 폭넓게 수용, 검토하고 판단해서 결정하는 리더십이 필요할 때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덕성여대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호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