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미국 및 유럽의 대기업에서 재무부서 업무는 주로 비용 관리, 예산 집행, 내부 감사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기업들이 글로벌화 하면서 기업 내 재무부서 역할이 확장됐으며,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이 동시에 주어졌다. 예를 들어 재무부서는 단순히 전체 자본 구조와 주주들의 배당금을 결정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회사의 자본 구조와 이윤 배분 문제에도 고심해야 한다. 자본 예산(capital budgeting)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는 과정에서는 사업부별 차이뿐 아니라 통화, 세금, 국가별 위험 등에 따른 복잡한 사항들을 반영해야 한다. 인센티브 시스템도 다양한 경제 금융 환경에서 일하는 관리자들을 평가하고 합당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 자본 시장’이란 개념이 생길 만큼 글로벌 기업의 자본력이 커지면서 거대 기업들은 국제 금융 시장을 아우르는 강력한 차익거래(arbitrage, 자산간 가격차 등을 이용해 무위험 수익을 얻는 거래)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경쟁 우위를 창출하기 위해 내부 자본 시장을 운영하는 재무 담당자들은 다양한 제도적 환경 아래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전략적 기회와 도전 속에서 재무적 기회를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매우 영민해 보이는 재무적 의사 결정이 개인과 조직의 의욕을 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재무적 기회는 자금 조달(financing), 위험 관리(risk management), 자본 예산 계획(capital budgeting) 등 3대 주요 기능과 관련한 제도ㆍ운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내부 자본 시장의 자금 조달
국가마다 제도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이 현명한 자금 조달 계획을 수립하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보통 이자(interest)가 공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CFO는 세율이 높은 국가에서 자금을 융통해 세율이 낮은 국가의 사업장에 잉여 현금을 대출해 줌으로써 기업 전체의 세액을 크게 낮출 수 있다. CFO는 또 자회사가 모기업으로 과실 송금을 할 때 그 시점과 규모를 치밀하게 조정함으로써 세율 차이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만이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 국가별로 채권회사의 권리가 다르다는 점에서 차입 비용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많은 글로벌 기업은 이를 감안해 해외 또는 국내에서 자금을 융통한 뒤 자회사에 이를 대출해 준다.
다국적 기업은 또 사업장의 현지 자금 조달 비용이 너무 높은 경우 현지에서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내부 자본 시장을 이용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이 지역 내 기업들이 자본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많은 미국 및 유럽의 다국적 기업은 현지 자회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으로 해당 기업들은 역내 시장 점유율을 늘렸을 뿐 아니라 자금 공급 확대를 우호적 조치로 여긴 각국 정부와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의 CFO는 이런 방식을 통한 전략적인 자금 조달의 어두운 이면 또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회사의 관리자들이 많은 부채를 보유하면 그들의 수익성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전체 조직 내에서 고과가 불리해질 것을 우려한 관리자들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데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가 수익 배분과 관련한 기업의 정책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의 세금 혜택과 관련한 정책 때문에 미국 기업의 현지 법인이나 자회사는 그때그때 일정하지 않은 금액을 본사에 송금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많은 회사는 현금이 불규칙적으로 송금될 경우 그들의 성과를 부풀릴 수 있는 환상적인 회계 처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회사에 규칙적으로 일정액을 송금하도록 했다. 또 관리자들이 모기업의 자금 조달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들의 자율성과 기업가 정신이 약해지기 때문에 많은 회사가 세율이 높더라도 자회사들이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하도록 하고 있다.
글로벌 위험 관리
내부 자본 시장의 존재는 또 위험 관리에 대한 기업의 선택 여지를 넓혀 준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본 시장을 통해 모든 통화 위험을 관리하는 대신 세계 각지의 자회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통화 위험을 상쇄할 수 있다. 어떤 기업의 유럽 내 자회사가 현지에서 부품을 구매해 완제품을 일본 시장에 수출했다고 가정하자. 이런 기업 활동을 한 회사는 결국 엔화에 대해서는 롱(long, 매입) 포지션, 유로화에 대해서는 쇼트(short, 매도) 포지션을 취하게 된다. 즉 엔화 가치가 오르면 이익을 보고, 유로화 가치가 오르면 손해를 본다. 이때 기업은 그룹 내 다른 곳에서 위험을 상쇄하거나 모기업의 엔화 대출에 따른 엔화 부채 이동 등의 방법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런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이처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감안하면 많은 다국적 기업이 해외 자회사에 현지에서 독립적으로 위험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너럴모터스(GM)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회사의 재무부서는 기업 내 최고 인재들로 구성돼 있으며, 전 세계 기업들의 재무부서 중 가장 우수한 조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럼에도 이 회사는 각국 자회사들이 역내 통화 위험을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왜 이처럼 산발적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일까. 바로 지역별 특성에 따른 위기 관리를 통해 각 사업장과 그 사업장을 운영하는 관리자의 성과에 대해 좀 더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기업들은 통화 위험을 관리할 때 그들이 보유한 전문 지식을 임의적으로 활용하거나 곤혹스러운 방법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많은 기업이 재무 관리자들에게 틀에 박힌 방식의 ‘수동적인’ 정책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GM은 여러 위험 요소를 적극적으로 분석하지만 이 중 50%는 미리 책정된 선물과 옵션 비율을 유지토록 했다. 기업들이 이렇게 수동적인 전략을 고수하는 이유는 재무 관리자들이 회계 또는 투기적 목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환경에서 재무 운영에 상당한 전문지식이 요구됨에도 기업들은 재무적 이익이 사업 운영에 따른 이익을 초과하지 않는 수준으로 재무적인 전문지식 활용을 제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