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Study : 보스턴 레드삭스
Article at a Glance - HR
보스턴 레드삭스는 무려 86년 동안 이어온 ‘밤비노의 저주’를 깬 뒤 또 다른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자만감이다. 밤비노의 저주를 깬 선수들은 기강이 해이해졌다. 팀의 리더가 돼야 할 고참 선수들이 거짓말을 하고 경기에서 빠지거나 경기 도중 라커룸에 들어가서 치킨과 맥주를 먹기도 했다. 공정하지 않아 보이는 연봉 격차도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선수들은 사분오열했고 당연히 팀의 성적도 뚝 떨어졌다. 레드삭스는 해이해진 선수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새 감독으로 권위적인 바비 밸런타인을 선택했다. 하지만 밸런타인 감독은 구단 수뇌부의 악수(惡手)였다. 그는 오히려 선수들과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구단은 이후 선수들과 잘 융합하고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존 패럴 감독을 영입했다. ‘인격자’ 벤 셰링턴 단장도 서서히 자신의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2013년 4월 보스턴 테러가 발생하자 선수들은 시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또 선수들도 서로 격려하면서 팀의 성공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레드삭스는 ‘스타’ 선수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사기가 한껏 높아져 2013 시즌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
표 1보스턴 레드삭스
미국 프로야구 구단인 ‘빨간 양말’ 보스턴 레드삭스는 과거 메이저리그의 명문 팀이었다. 그러나 1920년, 레드삭스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가 새로운 홈구장인 팬웨이 파크를 건설하면서 금융권에서 융자받은 자금을 갚기 위해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12만5000달러에 뉴욕 양키스에 넘긴 뒤, 레드삭스는 86년 동안 ‘밤비노의 저주’라는 지긋지긋한 악령에 시달려야 했다. 밤비노는 루스의 애칭이다. 레드삭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2004년까지 월드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진짜 밤비노의 저주 때문일까? 레드삭스는 1946년, 1967년, 1975년, 1986년 시즌에 월드시리즈에 올랐으나 모두 3승4패를 기록하며 ‘한 끗’ 차이로 패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시즌이 끝난 뒤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는 차기 단장으로 누가 올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을 때 예일대와 샌디에이고대 로스쿨 출신의 서른도 안 된 ‘풋내기’ 테오 엡스타인을 내부에서 승진시켜 전격 단장에 기용한다. 젊은 단장 엡스타인은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통계자료를 이용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하는 방법인 세이버매트릭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타선부터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레드삭스는 2004년 필라델피아 필리즈의 감독 테리 프랑코나와 ‘우승 청부사’인 선발 투수 커트 실링, 마무리 투수 키스 폴크를 데려오는 등 감독과 선수진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엡스타인 단장은 2004년 7월 팀의 상징과도 같은 ‘슈퍼 스타’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시카고 컵스에 보내고 내야수 올랜도 카브레라와 덕 민케비치를 데려왔다. 레드삭스는 가르시아파라와 2003시즌부터 연봉 협상에서 마찰을 빚었다. 트레이드의 반향은 엄청났다. 데뷔 당시 신인왕을 차지했으며 ‘4할의 타율을 기록할 만한 유일한 우타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가르시아파라의 트레이드는 팬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2004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개막전부터 출장하지는 못했지만 데뷔 이후 성적을 감안했을 때 향후 좋은 성적이 기대됐다. 야구 전문가들은 이번 트레이드가 레드삭스의 일방적인 패배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엡스타인 단장의 ‘비즈니스적인 결단’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레드삭스는 승승장구하며 98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만나 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월드시리즈에서 난적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대0으로 이기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밤비노의 저주를 깬 것이다. 레드삭스는 2005년, 2006년 성적이 다소 부진했지만 2008년, 2009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010년에도 올스타전 이후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아메리칸리그 전체 5위를 기록, 서부지구 우승팀인 텍사스 레인저스보다 단 1승이 부족했을 뿐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우승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레드삭스
2011년에도 레드삭스의 성적은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레드삭스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거포 1루수 애드리언 곤잘레스를 영입했고 자유계약시장 최대어로 손꼽히던 ‘질주 본능’의 외야수 칼 크로포드마저 영입하며 거액을 투자했다. 타석을 대폭 보강했다. 그 결과 미국의 스포츠 전문매체 ESPN의 전문가 45명 전원이 레드삭스의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예상했으며 43명은 월드시리즈 진출, 33명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예상했다. 2011년 시즌 레드삭스는 개막 이후 6연패를 기록했으나 타선의 힘으로 곧 부진에서 벗어나 지구 1위를 차지했다. 이후 삐걱거리는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8월 말까지 리그 1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9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몰락이 일어났다. 9월이 되자 레드삭스의 삐걱거리던 마운드는 완전히 붕괴되며 한 달 동안 성적은 7승20패에 그쳤다. 시즌 결과 90승72패, 레드삭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3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레스삭스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핵심 선발투수들인 조시 베켓-존 레스터-존 래키가 경기 도중 라커룸(유니폼을 갈아입는 장소)에 들어가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비디오 게임을 했다는 사실이 적발됐다. 밤비노의 저주를 깬 주요 선수들은 이미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은 자신이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서도 덕아웃(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 선수, 코치들이 대기하는 장소)에 앉아 팀을 응원했다. 이것은 팀의 화합을 위한 일종의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다. 이들은 불문율을 깨고 지고 있는 경기에서 라커룸에서 웃고 떠들고 했다. 심지어 이들은 개인성적마저 처참했는데 9월 15경기에서 고작 2승만을 거뒀을 뿐이었다. 베테랑 투수 팀 웨이크필드도 레드삭스의 추락보다 본인의 개인 통산 200승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등판 경기가 없는 날에는 경기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9월 몰락의 가장 큰 책임이 투수진에게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선발 투수들의 이런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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