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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로 재평가된 동양식 배려

김용성 | 42호 (2009년 10월 Issue 1)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민감한 소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회적 의사소통법을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일본인들은 우회적 의사소통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일본인의 완곡 어법은 그 난해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완곡한 대화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초대를 받아 집을 방문한 손님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과연 무슨 뜻일까?
 
“요즘 일기예보를 들으니 날이 점점 더워진다고 하네요.”
 
언뜻 듣기에는 단순한 날씨 이야기 같다. 하지만 이는 창문을 열거나 에어컨을 켜달라는 부탁일 수 있다. 손님이 일기예보를 빌려 부탁을 하는 것은 집주인이 ‘손님을 더위 속에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일본 가정에서는 손님이 먼저 물을 한 잔 달라거나 에어컨을 켜달라고 하면 집주인이 손님을 방치해 큰 실례를 한 것으로 간주한다. 주인이 몹시 미안해하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집주인을 모욕할 의도가 없는 손님이라면 직설적인 요청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에서 일반적이며, 언어에도 그런 전통이 반영돼 있다.
 
 

 
자기중심적인 서양의 언어
동아시아인들은 영어를 배울 때 누구나 부정 질문을 어려워한다.
 
“Haven’t you eaten anything yet(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어)?”
 
이 질문에 대한 2가지 답을 영어와 한글로 적어보면 분명한 차이가 보인다.
 
“Yes, I have(아니, 먹었어).”
 
“No, I haven’t(응, 안 먹었어).”
 
부정 질문에 긍정으로 답하면 논리적으로는 부정이 되는 게 맞다. 그러니 한글로 ‘응, 안 먹었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도 영어론 “No, I haven’t”라고 말하는 것은 영어 사용자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영어 사용자는 상대방이 긍정으로 묻건 부정으로 묻건, 내가 먹지 않았다면 무조건 ‘No’라고 말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어법을 강조한다. 물론 서양인도 조심스럽게 부탁할 때는 우회적인 표현을 쓴다. 식당 직원이 금연 구역인 줄 모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손님에게 다가가 부탁을 할 때는 뭐라 말할까?
 
“Don’t smoke here, sir(손님, 흡연하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손님과 직원이 언쟁에 휘말릴 수 있다. 직원은 아마도 “We don’t smoke here, sir(저희는 여기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회적으로 표현한 부탁이다.
 
동양은 집단주의적 문화가 강하고 오랜 기간 전제주의 국가 형태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동양인들은 직설적 의사 표현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걸 예의로 여긴다. 특히 윗사람에게는 절대로 직접적인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 않는 게 생활의 지혜다. 동양 국가에서 생활해본 서양인들은 친구들에게 동양인, 특히 부하 직원의 ‘예’가 사실은 ‘아니오’일 때가 많다고 조언한다.
 
자유방임의 대안으로 부상한 넛지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꼽는 서양인들은 누구든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 성인이 되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동양에서 성인이 되는 것은, 맡겨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의 일원이 됨을 뜻한다. 동양에서는 성인에게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회 구성원을 보살피는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차이는 식습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스테이크는 칼로 고기를 원하는 만큼 잘라 먹는 요리다. 반면 동양의 고기 요리는 먹기 편한 크기로 잘려 나온다. 전문가인 요리사가 식사하는 사람을 배려해 고기를 잘라준다. 동양인은 상대방을 위한 이 같은 사전 조치를 배려로 받아들이지만, 평균적인 서양인은 간섭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데 최근 서양의 행동경제학자와 정책 조언자들이 ‘개인 자유 극대화가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성하고 있다. 이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넛지(nudge)’다. 넛지란 원래 ‘팔꿈치로 민다’는 뜻으로, 특정한 선택을 넌지시 종용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넛지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예전부터 사용돼왔다. 자본주의 초기의 마케팅 활동들은 제품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살포했다. 그러다 마케팅 기법이 점점 진화하면서 ‘제품=기능’이란 메시지가 ‘제품=이미지’로 바뀌었다.
 
애플의 아이팟은 그 자체로도 우수한 MP3 플레이어지만, 젊은이들에게 ‘쿨한 액세서리’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화장품 회사들은 자사의 화장품을 쓰면 예뻐질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기용한다. 노골적이지 않게 특정한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넛지는 특히 담배나 술 등의 기호품 산업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제품이 가진 폐해를 넘어서는 매력을 강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보로는 ‘필터 담배는 여성용’이란 세간의 인식을 넘어서기 위해 카우보이의 이미지로 담배를 포장했고, 대부분의 위스키 광고들은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여가를 즐기는 이미지를 차용한다.
 
비즈니스 세계는 일찌감치 넛지를 받아들였지만, 공공 서비스 영역은 최근에 들어서야 넛지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정책 설계자들이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최근까지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역사와 전통이 깊은 유럽보다, 개인의 자유를 찾아온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에서 더욱 심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부 선각자들이 개인주의적 전통에 잠재된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흥미롭게도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사람들의 경제적 선택이 심리적 요인에 의해 좌우됨을 증명해 고전 경제학의 가정을 흔들어놓았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고전 경제학의 전제가 흔들리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더 바람직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할 필요성이 부각됐다. 정책(선택 상황)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전문가적 관점에서 미숙한 다수를 최선의 선택으로 유도하는 것’이 개인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동안 서양인들은 국가나 조직이 개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동양식 조직 관리 방식이 미숙하거나 최소한 덜 세련됐다고 간주해왔다. 1997년 아시아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서양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기구들이 자유방임형 경제 구조를 강권한 것도 이런 의식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서양의 선각자들이 나서서 동양식 배려를 넛지란 이름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넛지는 동양식 배려
미국 정부가 리처드 탈러 시카고대 교수의 이론에 기반해 퇴직연금 제도인 ‘401(K) 저축플랜’을 재설계하자 가입률이 극적으로 상승했다. 사실 401(K)는 매력적인 제도다. 저축액에 대해 세금이 공제되고 많은 고용주가 분담금을 내준다. 그렇지만 미가입자가 무려 30%나 됐다. 401(K)는 희망자만이 가입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깜박 잊었거나 차일피일 미루다 가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탈러 교수는 401(K)의 기본 원칙(default)을 희망자만이 가입하는 것에서 자동 가입으로 바꿨다. 그 결과 401(K)의 가입률이 급격히 올라갔다. 이로 인해 탈러 교수는 빚더미에 앉은 미국을 구한 경제학자라는 평을 받았다(동아비즈니스리뷰 41호 스페셜 리포트 ‘의사결정 방법론 略史’ 참조).
 
 

 
미국 일리노이 주는 2006년 장기 기증을 장려하는 넛지 정책을 채택해 230만 명 이상이 장기 기증에 동의하도록 유도했다. 운전면허증에 장기 기증 희망을 서명한 것만으로는 법적 효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주 정부는 장기 기증 신청 온라인 사이트를 개발하고 이를 홍보했다. 이 사이트는 ‘장기 기증을 하세요’가 아닌 ‘이미 450만 명이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온라인으로 등록해도 장기 기증을 위한 법적 요건이 충족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부의 개입을 전체주의적 행위로 취급했던 서양의 조직들이 이제는 넛지라는 이름으로 동양식 배려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넛지를 통한 변화 관리
글로벌 경제에서는 서양식 비즈니스 매너가 일반화됐으며, 늘 시간에 쫓기는 비즈니스 리더들은 대부분 서양식 직설 화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섬세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리더들은 완곡 화법을 배우려 노력한다. 외교관들은 전통적으로 완곡 화법을 사용해 부정의 의미를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다음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외교관의 발언은 국가 위신에 걸맞는 우아하고 지적인 표현으로 구성돼야 한다.
 
- 국가를 대표한 사람들의 대화는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의사나 감정 표현을 완화해 상대방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 나중에라도 자신의 말을 철회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처음부터 중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외교관들의 완곡 화법은 자신과 국가를 보호하는 방어적 관점에서 생겨났다. 반면 넛지는 타인에게 좋은 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추천하기 위해 쓰이므로 한 단계 발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하게 연결되고 정보와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금은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국가의 수장도 과거만큼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누리지 못한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조직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마케팅 활동’을 펼쳐야 한다. 정보 수용자인 조직원들은 흔히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는 받아들이고, 불리한 정보는 수용하지 않는다.
 
리더는 조직원들의 비판적인 정보 수용에 대응하는 넛지로 조직원들이 변화와 지시를 좀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변화 관리’라고 알려진 경영 활동은 사실 넛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변화 주기는 점점 짧아지지만, 반대로 그 진폭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기업의 구성원들은 종종 견뎌내기 힘든 수준의 변화에 노출되곤 한다.
 
그 변화의 와중에 이른바 ‘마라톤 효과’가 나타난다. 이는 변화를 주도하며 앞서가는 그룹과 변화의 객체가 되어 억지로 끌려오는 그룹 사이의 인식 격차가 확연하게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리더들로 구성된 변화 선도그룹은 종종 변화에 저항하는 직원 그룹을 비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나친 간섭은 직원들이 불만을 드러낼 수 있는 통로를 막아 결과적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훌륭한 변화 관리자라면 넛지를 고려해볼 만하다. 변화 관리의 핵심은 결국 ‘변화에 노출된 직원들의 심리 관리’다. 사람의 마음은 장애물을 만나면(또는 저항감이 생기면) 먼 길을 마다 않고 돌아간다. 변화를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저항감을 없애주는 일이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넛지다.
 
실제 현장에서의 활용
필자의 고객사 중 한 곳에서 새로운 성과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적이 있다. 회사는 관리자들에게 부하 직원을 관찰하고 그들의 업무 업적을 기록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관리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시간을 따로 내어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게 번거롭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객사에 간단한 넛지를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직원의 평가 등급을 정할 때 관련 부서장들이 함께 토론해 의사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관리자들이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과거 자신의 부서원만 평가하던 때와 달리, 타 부서장과 토론까지 해야 하니 기록에 근거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평가 등급의 강제 배분을 시도하자 이런 경향은 가속화됐다. A등급을 받을 수 있는 직원의 수가 한정되자 관리자들은 서로 자기 부서원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관찰 기록을 강제하는 것보다 기록이 부족하면 부서원이 불이익을 받게 하는 넛지 시스템이 더 효과적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다른 고객사에서는 관리자들이 우수한 직원을 자기 부서에 묶어두는 경향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쌓은 우수한 인재의 육성이 어렵다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 필자는 관리자의 선택을 존중하되, 그들 스스로 행동 방식을 개선하도록 유도했다. 관리자의 평가 지표에 ‘우수 사원 육성 및 배출’이라는 항목을 신설한 것이다. 관리자들은 우수 사원을 자기 부서에 두고 부서 관리를 편하게 하는 대신 좋은 평가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우수 사원을 다른 부서에 보내 평가를 좋게 받는 대신 공들여 다른 직원의 역량을 개발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또 다른 고객사는 현재 팀장 리더십 교육 후 팀장들이 4주간 관리자 웹사이트에 공지된 과제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 3회의 과제가 바쁜 팀장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프로젝트 팀은 간단한 넛지로 팀장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과제에 대한 평가 결과를 개인에게 알려주는 동시에, 우수 답안을 사이트에 공지하고 그 답을 낸 ‘금주의 관리자(Manager of the Week)’를 발표한 것이다.
 
교육에서 배운 내용을 실천하는 과정을 제도화하고 여기에 ‘공개적 칭찬’이란 요소를 더하자, 팀장들은 경쟁적으로 학습 내용을 실천하며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실제로 30명으로 이뤄진 한 교육 차수의 우수 답안 조회 횟수가 150여 회나 된다. 한 사람이 평균 다섯 번씩 우수 답안을 참조하며 자신의 다음 과제를 수행한다는 말이다. 넛지는 이처럼 행동을 강제하지 않고 바람직한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휴잇어소시엇츠에서는 조직원들의 주인 의식을 배양해 변화에 적극 동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다음의 ‘3I’ 기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조직원들이 자신을 변화의 주체로 인식하게 만들어 변화의 선순환이 가능하게 한다.
 
- 조직 변화와 관련된 ‘정보(Informa-tion)’를 가능한 실시간으로 충분히 공유한다
 
- 조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그들이 자신의 ‘영향력(Influence)’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
 
- 변화 결과가 조직원에게도 ‘이익(In-terest)’이 되도록 변화를 설계한다
이 3가지 I는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이고 참여를 늘리는 넛지의 핵심 요소 역할을 한다. SC제일은행은 전 세계 스탠더드차터드(SC) 은행 계열사 중 피합병 법인의 이름(제일은행)을 유지한 최초의 사례다. 과거 한국 최대 은행의 역사를 인정하고, 한국인 직원들의 사기를 고려한 이런 조치는 직원들이 변화를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아울러 SC은행은 2005년 6월 30 ‘한국의 날’로 정하고, 제일은행 직원들을 전 세계 22개 지점에 파견해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게 했다. 이런 조치는 합병에 대한 제일은행 직원들의 저항감을 최소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DBR TIP]넛지에 대해…
다음 요건이 충족되면 넛지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난이도:난이도가 높은 선택의 경우 전문가가 선택을 유도하는 게 좋다.
 
빈도:매일 신는 양말에는 넛지가 필요 없다. 그러나 평생 몇 번 하지 않게 되는 결정, 예컨대 보험 상품이나 자동차 구입 등에는 넛지가 필요하다.
 
피드백:의사결정의 결과가 피드백되는 기간이 긴 경우(예를 들어 은퇴 시기에 혜택을 받게 되는 연금 플랜 등), 피드백에 따라 선택을 수정할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넛지가 필요하다.
 
넛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밖에도 다양한 넛지가 가능하다.
 
디폴트(기본 선택 값):사람들은 한번 선택한 것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디폴트를 선정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프레임: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 권고하는 선택안 전후에 추가적인 선택안을 더하면 중간 안을 선택한다.
 
피드백:전기 사용을 줄이라고 권하는 대신, 전기 사용량이 많은 가정에 보내는 청구서에 부정적 표현의 이모티콘을 그려 넣자 전기 사용량이 줄어들었다.
 
정보 공개:피드백의 변형 방식이다. 환경 유해물질 배출량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자 기업들은 시민단체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배출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과정 리허설:캠퍼스 구석구석을 이미 알고 있는 대학 4학년생에게 헌혈이 가능한 보건센터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나눠주며 헌혈이 가능한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하도록 한 것만으로도 헌혈이 늘어났다
 
의사 확인 질문:투표일 이틀 전에 투표를 할 것인지 묻거나, 향후 2주 이내에 자동차를 바꿀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 것만으로도 투표율과 신차 구입 고객이 늘어났다.

 
넛지도 도구일 뿐, 핵심은 리더십
모든 도구가 그렇듯 넛지도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쓰일 수 있다. 설계자가 이기적인 의도 또는 악한 의도로 넛지를 설계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해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과 중공군은 전쟁 포로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각각 심리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미군 포로가 공산주의로 전향한 기록이 있다.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에게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글짓기를 시킨 뒤 우수한 글을 쓴 포로에게 상으로 담배와 사탕을 줬다. 작은 보상에 맛을 들인 포로들은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자연스럽게 상당수가 자발적인 공산주의자가 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전향자들은 전쟁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은 진심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고 답했다. 차마 담배와 사탕에 신념을 팔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리라.
 
중공군의 심리전은 포로들이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대신 경제적 불평등이란 소재를 통해 체제를 비판하도록 유도하는 넛지를 사용했다. 조금씩 심리적 저항 요소가 없어지자 일부 연합군 전쟁 포로들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 대상인 공산주의로 전향하고 말았다. 이처럼 넛지는 누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리더가 바른 신념과 조직을 섬기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넛지는 최악의 경영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주변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들에게는 넛지의 위력이 대단하므로 이를 사용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동양인들은 주변 환경에 적당한 프레임(frame)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선택으로 유도될 수 있다.
몇몇 심리학자들이 ‘최후통첩 게임’이라 불리는 실험에서 심리적 프레임의 위력을 검증한 적이 있다. 이들은 실험 참가자 한 명에게 돈을 주고, 그중 일부를 상대방에게 주라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에게는 이를 수용하거나 거절할 권한만 주어졌고, 거절하면 양쪽 모두 돈을 받을 수 없었다. 단 1원이라도 받는 것이 전혀 받지 않는 것보다 나으니 두 번째 참가자는 무조건 제안을 수용해야겠지만, 실험 결과는 그와 달랐다. 참가자들 중에는 적은 분배 금액을 괘씸하게 여겨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심리학자가 이 게임을 무엇이라 부르는가에 따라 금액 분배 제안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심리학자가 ‘월스트리트 게임’이란 이름을 붙이자 제안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분배 제안을 더 많이 했다. 게임의 이름이 참가자에게 이기적인 행동을 유도한 셈이다. 심지어 실험실을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증권분석 투자가의 사무실처럼 꾸며놓는 것만으로도 이기적 제안이 늘어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커뮤니티 게임’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5:5로 돈을 나누려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처럼 상황을 보는 시각의 틀, 즉 프레임이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은 특정 방향으로 유도된다. 프레임의 영향은 주변 상황을 고려해 통합적 사고를 하는 동양인에게 더 위력적이다.
 
실제로 몇 해 전에 어느 컵라면 회사에서 프레임을 바꾸어 신제품의 매출을 끌어올린 사례가 있다. 이 회사는 1000원짜리 컵라면을 선보인 후 판매 부진에 부딪혔다. 그 이유는 신제품이 경쟁사 제품보다 비싸기 때문이었지만 경영진은 의외의 넛지로 문제를 해결했다. 역발상을 해 더 비싼 1500원짜리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컵라면의 가격 프레임이 700원부터 1500원까지 형성되자 1000원은 고객들에게 적당한 가격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곧 판매량이 늘어났다.
 
필자가 앞선 기사에서 소개한 ‘동양적 리더십’은 경영 철학적 내용이었지만, ‘넛지’는 경영 기법으로 분류하는 게 맞다. 넛지는 동양적 배려를 활용한 훌륭한 의사결정 지원 기법이긴 하지만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리더의 인품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 휴잇어소시엇츠는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동양적 사고와 리더십의 우수성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이 동서양 리더십의 차이를 분석하고, 새로운 동양적 모델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전자와 미국 상무부에서 근무했다. 현재 휴잇어소시엇츠 상무이며, 글로벌 컨설팅 기법을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변화시켜 기업 성과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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