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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민희진 갈등으로 본 ‘K팝의 그늘’

‘팝의 근본’ 흔든 ‘K팝의 근본’이 휘청
갈등 조율 시스템 고도화하는 계기로

임희윤,정리=장재웅 | 407호 (2024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사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와의 갈등은 그동안 양적 성장에만 집착해온 ‘K엔터 산업’의 근본이 흔들리는 사건이다. 일단 연예기획사와 아티스트의 권력 균형이 무너졌다. 과거 ‘노예 계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절대 갑 위치에 있던 연예기획사들은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기술을 앞세워 팬들과 직접 소통하기 시작한 아티스트들의 파워 앞에서 권력이 약화됐다. 여기에 랜덤 포토카드 등 K팝식 판촉 상술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하이브와 민희진 전 대표의 갈등이 본질적으로 청각 아티스트와 시각 아티스트의 충돌이라는 시선도 있다. K팝 태동 30년을 맞아 K팝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킨 시스템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를 어떻게 고도화할지 고민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들이나 간과되는 기능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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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요계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하이브, 어도어, 민희진, 뉴진스 등…. 이들은 모두 ‘근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사내에서 해결할 문제를 여론전으로 먼저 몰고 간 하이브를 지적한다. 카카오톡 내용 등 ‘불법 취득한 사적 대화’를 언론에 먼저 공개하며 인신공격을 자행했다며 하이브를 ‘근본 없는 회사’라 일컫는다. 다른 누군가는 모기업의 지원을 업어 성공해 놓고 이제 와 등에 칼 꽂고 나갈 궁리만 한다며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를 ‘근본 없는 인간’이라 칭한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중

여기서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일궈둔, 그래서 단단한 땅 밑에 묻혀 있어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바로 2020년대 우리 사회의, 또는 K팝의 상황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근년의 K팝 글로벌 붐 자체가 근본의 파기다. 2000년 H.O.T.의 중국 베이징 공연에 현지의 샤오황띠(소황제)들이 몰려들면서 현지 매체에 의해 생겨난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당시만 해도 문화적 맥락이 유사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퍼진 기이한 신드롬 정도로 생각됐다. 그런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2002년 보아가 일본 데뷔 앨범 ‘리슨투마이하트(Listen to My Heart)’로 한국 가수 최초의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이는 파란이자 위업이었고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로 받아들여졌다. 일본 현지의 유력 기획사인 에이벡스가 제작을 주도하고 일본 작사가와 작곡가가 투입돼 일본어로 불린, 사실상 일본 음반에 가까웠음에도 말이다. 세계 2위의 음악 시장이자 내수시장이 가장 공고한 철옹성으로 불린 일본에서 들려온 낭보에 일부는 ‘정복’ 또는 ‘점령’이란 단어를 썼고 이는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믿었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린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2000년대 한류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졌다. 하지만 아시아권 밖으로 퍼져나가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2011년 SM타운 파리콘서트 티켓을 구하지 못한 현지 젊은이들이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벌인 플래시몹이 국내에 대서특필된 것도 ‘한류가 특이점을 넘었다’는 충격파 때문이었다. 그해 스페인에서 목격한 일 역시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아니메 페스타(일본 애니메이션 축제)’의 축하 무대를 그해 처음으로 일본 가수가 아닌 한국 가수가 장식하게 됐는데 주인공은 그룹 JYJ였다. 그 무대를 보기 위해 코스프레를 한 채 행사장 앞에 길게 늘어선 현지 K팝 팬들의 모습부터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근본’이 흔들린 장면은 그다음에 왔다. 한 한국인 중년 여성이 행사장 현관 쪽으로 입장하고 있었고 이를 목도한 팬 가운데 일부가 그 여성을 향해 다음과 같이 소리친 것이다. 그것도 한국어로.

“오모니이이임~!!!”

서툰 한국어였지만 그것이 ‘어머님’을 뜻함을 깨닫는 순간 20볼트짜리 전류 같은 소름 한 줄기가 등줄기, 골수를 타고 내려갔다. 그 중년 여성은 JYJ 멤버 중 한 명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그때 느낀 가벼운 현기증은 한국 문화권 내에서 그동안 믿어왔던 ‘근본’의 자전축과 공전축이 일순 흔들렸기에 일어난 증상이리라 믿었다. 당시만 해도….

시간의 축을 2020년으로 ‘빨리 감기’ 하자. 아시아의 팝 패권을 둔 제이팝과 경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한류 또는 K팝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이른바 ‘넘사벽’을 뛰어넘는다. 방탄소년단(BTS)이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빌보드 핫100(종합 싱글차트)의 정상을 밟은 것이다. 아시아 가수로는 두 번째. 종전 1위 곡인 일본 가수 사카모토 규의 ‘Sukiyaki’(1963년) 이후 무려 57년 만에 일어난 천지개벽의 사건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맹주 또는 세계의 서브컬처 정도로 인식되던 K팝은 미국을 위시한 세계 주류 음악 시장에서 라틴팝 못잖은 메인스트림의 강력한 안티테제(Antithese)로 우뚝 서게 된다. 한국에서는 또 한 번의 기적을 올림픽 금메달이나 노벨상 수상에 못잖은 국가적 쾌거로 받아들였다. 빌보드 차트는 외우는 것(또는 배우는 것)이라 여겼던 기성세대에게 이것은 ‘근본’을 흔든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근본’은 왜 흔들렸는가. 게임의 룰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의 핫100 1위로 대변되는 K팝 대폭발 사건은 근대부터 100년 가까이 매년 출전하던 올림픽 마라톤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딴 것과 차원이 아예 다르다. 출전조차 못하던 다른 차원(또는 4차원)의 게임에 마침내 진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K팝 이전에 미국 주류를 침투했던 라틴팝을 보자. 미국 내에서 라틴팝이 오랜 세월 굳건한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지정학적, 인구학적 배경이 명확하다. 쉽게 말하면 멕시코와 카리브해 여러 국가는 미국과 인접해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만 해도 먹고산다고 할 정도로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 비율도 높다. 미국의 팝을 논할 때 일정 정도의 지분을 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리적, 문화적 연결은 초연결의 시대를 만나면서 개념과 정의가 달라진다.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유튜브의 보편화, 그 네트워크와 콘텐츠 플랫폼을 세계인의 손바닥 안에 구동케 한 스마트폰과 초고속 이동통신의 발달이 초연결을 만들었다. 2010년대부터 문화 소비에 있어 그 지역과 지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는 점점 중요치 않아졌다. 그 현상은 가속화됐다. 미국 청년은 이제 멕시코나 캐나다와만 문화적 이웃이 아닌 것이다. 북대서양 건너 아이슬란드는 물론이고 코트디부아르나 뉴질랜드의 웰링턴, 한국의 서울에서 올라오는 콘텐츠도 옆집 문 두드리는 것보다 간편한 엄지손가락 놀림 하나로 실시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신승훈, 김건모, 클론을 제작한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김창환 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 신기하고 억울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유튜브를 찾아보다 1990년대에 중국의 대학가에서 자신이 작곡한 한국 댄스그룹의 노래가 열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영상을 통해 근 30년 만에 처음 알게 됐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브라질에서 2000년대 초반 TV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국내 그룹 노이즈의 노래가 매주 흘러나왔고 그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스튜디오를 메운 객석의 청중이 일제히 일어나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광경을 20년이 지난 이제야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초연결 이전의 시절에는 우리의 재미난 콘텐츠가 퍼져나갈 일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기이한 나비효과로 번져나간다고 해도 그것을 확인할 길조차 없었던 것이다. 초연결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두운 암흑의 중세기 같은 것을 우리는 지나오는지도 모른 채 지나온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바꾼 K팝의 지형

왜 갑자기 20년도 더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 의아할 수 있다. 2024년, ‘근본’이 무너진 해라고 서두에서 이야기했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근본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올해 또 다른 근본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진경을 바라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뉴진스 사태를 보자. 뉴진스의 다섯 멤버는 2024년 11월 28일 저녁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속계약 해지를 ‘선언’했다. 한국 연예계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근본 없는’ 행동이었다. 한국매니지먼트연합은 이에 대해 12월 3일 입장문을 내고 한국 연예산업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1996년 H.O.T.의 데뷔로 시작된 K팝의 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수십 년에 달하는 가요 판에서 이런 일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수나 연예인과 소속사의 계약에 대해 논할 때 ‘노예 계약’이란 말이 중요한 키워드였다. 2009년 동방신기의 세 멤버는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법원에 전속계약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 근거로 ‘13년이라는 전속계약 기간은 사실상 종신 계약’이라는 주장을 비롯해 수익 배분 등을 들며 여러 문제를 제기했고 끝내 SM을 나와 JYJ라는 새로운 그룹으로 활동했다. 최근 사례를 봐도 그룹 이달의 소녀의 멤버 츄, ‘Cupid’로 인기를 얻은 피프티 피프티 등이 전속계약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소속사를 향해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한 것은 뉴진스가 초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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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느 정신 나간 기획자와 가수들의 어처구니없는 망동에 지나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망발, 또는 혁명이 우리 사회에서 갑론을박을 야기하며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곧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콘텐츠 업계 안팎의 상황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YG엔터테인먼트에서 2NE1 이후 야심 차게 키운 여성 그룹 블랙핑크의 최근 상황을 보자. 2021년 캐나다 팝가수 저스틴 비버의 아성을 깨고 유튜브 내 전 세계 가수 구독자 1위에 올라선 블랙핑크의 위상 뒤에는 제니, 리사, 로제, 지수라는 개별 멤버의 개인적 파워가 자리했다. 멤버 각자가 글로벌 패션 브랜드 앰배서더를 맡으면서 가수뿐 아니라 인플루언서로서 세계 젊은이들의 이목과 심장을 틀어쥐었다. 결국 이들은 개인 활동을 선언하며 YG 밖에서 각자의 판을 짰다. 태국인 멤버 리사는 2PM의 닉쿤, 갓세븐의 뱀뱀 같은 태국인 K팝 선배들과 다른 길을 갔다. 태국계 제작진을 대거 영입한 뒤 태국의 거리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로 ‘탈K팝-태국 플렉스(flex)’의 신풍경을 보여줬다. 로제는 어떤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협업한 ‘APT.’로 발표 단 며칠 만에 미국과 영국 차트 최정상권을 휘저었다.

유튜브와 OTT의 탄생으로 레거시 미디어가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거대 기획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아이돌 멤버는 이제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 파워가 더 세다. 소속사의 홍보팀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레거시 미디어에 배포해 하나 마나 한 딱딱한 입장을 내는 대신 팬 플랫폼에 카톡 보내듯 ‘얘들아, 안녕, 나 (국감에 나가기로) 결심했어’라고 한 줄 올리는 것이 즉각적이며 폭넓은 반응을 끌어낸다. 기획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저히 줄어든다. 이슈를 만들기 위해 여의도 방송국이나 광화문 신문사를 종횡할 소속사 매니저는 이제 필요 없다.

음악과 영상 제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향력 있는 스타는 인스타그램 DM으로 바로 소통할 수 있다. 음악 제작에 있어서는 2000년대부터 SM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구축한 인터내셔널 A&R(Artist & Repertoire)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해외 작곡가와 협업 체계를 구축한 이 ‘음악 수급 체인’은 한때 일부 대형 기획사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K팝의 돈벌이가 혁신적으로 좋아지면서 이제는 해외 작곡가나 퍼블리셔(작곡가 관리자 또는 회사)가 먼저 DM이나 e메일을 통해 원하는 K팝 아티스트와 바로 소통한다. 네트워크는 지구 대기권 내 무제한이고, 소통은 실시간이며, 좋은 곡은 넘쳐난다. 영상을 비롯한 비주얼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도 비슷한 양상이다.


K팝 성공 방정식의 그림자

K팝, 그중에서도 하이브는 너무 빨리 성장했다. 보통 우리 경제의 급속한 선진화를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기적이라 불리는 한강의 기적도 수십 년에 걸쳐 이뤄졌을진대 ‘K팝발 한강의 기적’은 불과 수년 사이에 진행됐다. 너무 빠르게 키가 커지니 그 과정에서 돌아보지 못한 K팝 시스템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는 하이브의 주식시장 상장과 시기적으로 맞물렸다. 방탄소년단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의 젊은이들과 공명할 수 있었던 청춘의 고민과 성장이라는 세계관은 ‘상장’ 이슈 앞에서 잠시 옆으로 제쳐졌다. 평소 멤버들이 작사, 작곡, 프로듀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던 형태로 공감을 샀던 방탄소년단의 음악에서 잠시 멤버들마저 비켜나 있어야 했다. ‘Dynamite’는 영국 작곡가 두 명이 만든 곡이다. ‘Butter’ 등 성과를 위해 기획된 여러 곡은 음악적으로 준수했고 상업적 성과도 놀라웠지만 그룹을 지켜본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방탄소년단의 기존 결에서 멀어진다며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상장과 함께 기업이 커지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급성장하며 안고 가야 하게 된 주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방탄소년단과 빅히트뮤직이라는 국한된 생산 구조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이브는 막대한 저작권료, 저작인접권료, 각종 사업 수익으로 레이블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음악적 다양성을 갖춘 멀티레이블 체제’를 겉으로는 표방했지만 내실은 그렇지 못했다. K팝은 2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아이돌 댄스 음악이라는 한정된 장르 안에서 비슷한 콘텐츠와 인적 구성으로 경쟁하는 시장이었다. 웬만한 레이블 사이에서 차별성을 찾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글로벌 붐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언론이 ‘K의 쾌거’라고 타전하자 방탄소년단의 일부 팬이 ‘방탄소년단의 장르는 K팝이 아닌 BTS-팝’이라고 반발한 것은 특별한 성공을 ‘한국 문화의 국위선양’으로 퉁치는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었다. 또 한편으론 기존의 K팝이 대동소이한 콘텐츠를 양산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모양새로 보였다.

가요기획사 최초로 대기업에 진입한 하이브뿐 아니라 적잖은 대형 가요기획사가 올린 매출의 실체도 수면 위로, 즉 대중들의 화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CD에 랜덤으로 멤버 포토카드를 집어넣거나 사인회 응모권을 넣는 방식으로 한 명이 여러 장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장의 CD를 불필요하게 사게 만드는 상술 같은 것 말이다.

몇 년 전부터 K팝의 반환경적 판촉 상술을 지적해온 K팝 팬덤 초유의 환경단체 ‘K팝 포 플래닛’의 활동도 이 무렵부터 주목받았다. 이들은 대형 기획사 앞에서 전광판 시위나 1인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환경 문제에 눈 감은 기업의 행태에 대해 고발했다.


청각과 시각의 파워 게임

하이브와 뉴진스, 또는 방시혁과 민희진의 대결 구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또 하나 있다. 이번 대충돌을 가요계가 미뤄뒀던 청각 크리에이터와 시각 크리에이터의 격돌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가요계의 주요 리더는 청각 크리에이터였다. 가수 또는 작곡가 출신이 그들의 이름을 내걸고 가수를 키웠다. SM은 가수 출신의 프로듀서 (이)수만의 약자, YG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였던 양현석(양군)의 약자이며 JYP는 가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진영박(박진영)의 약자다. 하이브는 박진영과 함께 JYP의 작곡가로 많은 히트곡을 냈던 방시혁 의장이 대표한다.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는 SM엔터테인먼트의 시각 크리에이터 출신이다. SM의 디자인실에서 평사원으로 출발해 앨범 표지부터 화보까지 기획하다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SM 이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SM의 성층권 가까이까지 오른 그는 그러나 SM 주요 아이돌의 타이틀 곡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수만을 비롯한 청각 크리에이터형 리더들에게 최종 결정권을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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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4월, 민 전 대표의 1차 기자회견에서 그가 화면 위에 가장 먼저 띄운 카톡 창에 다시금 주목해 볼 만하다. 그 대화는 방시혁 의장의 ‘마음대로 당신의 뜻을 펼쳐보라’는 취지의 격려와 환영으로 시작한다. 즉 민 전 대표의 가장 큰 좌절은 방 의장의 환영사와 달리 SM 아닌 새 회사(하이브)에서마저도 제작의 전권을 갖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었을 수도 있다.

1981년 미국에서 영상 음악 전문 채널 MTV가 개국하면서 인류가 수만 년 이어온 음악의 개념이 바뀐 바 있다. 이제 음악은 청각만의 예술이 아니다. 시청각의 예술이다. 그것을 거의 시각의 예술에 가까운 경지까지 극한값으로 몰아붙인 장르가 바로 K팝이다. 위에서 말한 소셜미디어와 초연결의 시대에 200개국에 달하는 글로벌 국가들이 K팝을 비로소 발견하고 열광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도 바로 ‘극한값에 가까운 비주얼’이다. 하지만 음악 산업에서 보상 시스템은 여전히 시각 크리에이터에 비하면 청각 크리에이터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이를테면 3월이 되고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릴 때쯤이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말한다. 그것이 음악 업계 관계자가 아니라 필부필부라도 다음과 같이.

“‘벚꽃엔딩’ 엄청 나오겠네. 장범준, 벚꽃연금 부럽다.”

청각적 콘텐츠, 즉 음악을 제작한 작사가, 작곡가, 가창자, 편곡자, 연주자, 프로듀서 등은 저작권료나 실연권료, 저작인접권료를 통해 스트리밍을 통해 집계되는 수치에 걸맞은 수익을 연금처럼 꾸준히 타게 된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감독이나 비주얼 콘셉트 기획자, 디자인 상품 개발자는 이런 시스템의 수혜를 입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들이 음악 기업 내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최종 결정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일도 잦은 편이다. 이것은 K팝 콘텐츠에서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의 비중을 생각할 때 불만 요소로 상존할 수 있다. 음악 산업에 있어 수익 시스템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을 되돌아볼 때인 셈이다.


K팝, 그 너머를 이야기할 때

K팝은 특이점을 지나고 있다.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아니, 오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K팝의 글로벌 시대가 눈앞에 왔다. 이미 대형 기획사에서는 한국인 멤버 중심으로 한국에서 제작되는 당연한 K팝 시스템에도 스스로 물음표를 달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현지 음반사나 방송사와 협업해 현지인을 기용한 ‘탈K팝’ 그룹을 저마다 제작,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브의 캣츠아이(KATSEYE), SM엔터테인먼트의 디어 앨리스(dearALICE), JYP엔터테인먼트의 비춰(VCHA) 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이들을 과연 K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언론과 일부 대중은 이를 K팝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국위선양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박진영 JYP 대표 프로듀서는 이미 11월 마마(MAMA,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미디어 데이에서 “비춰는 K팝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기업의 관점에서 이미 ‘K팝스러운’ 마케팅으로 최대한 외연을 넓힌 K팝은 이제 그 장르 너머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국제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 조국에 안기기 위한 심정의 발로가 아니다. 매출과 수익을 차제에 넓히기 위한 일종의 ‘사내 벤처 투자’라고 봐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가요기획사가 특유의 트레이닝 시스템, 칼군무로 대표되는 수준 높은 비주얼 요소를 탑재해 참여하는 프로젝트라면 해외에서도 이들을 K팝으로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하다. 여기서 충돌할 수 있는, 예상 가능한 리스크가 보이기 시작한다. 과도한 음반 판촉 상술을 포함한 K팝 특유의 슈퍼 팬덤 마케팅, 일부 아이돌 멤버를 혹사시키거나 그들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가둬두는 낮은 인권 감수성 등의 문제다.

1996년을 태동 시기로 보는 K팝은 이제 곧 30주년을 앞두게 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K팝 역사는 3분의 2는 억울하다 할 만한 깊은 어둠 속에, 3분의 1은 지나치게 밝은 빛을 받으며 진행됐다. ‘우리 애들이 과몰입하면 말리고 싶은’ TV 가요 프로그램 속의 대동소이한 댄스 그룹 정도로 20년 가까이를 무시받았다면 글로벌 붐과 함께는 국위선양이라는 키워드 아래 칭찬과 찬양 일색의 조명으로, 어찌 보면 또 다른 방향으로 ‘무시’된 것이다.

극단의 어둠과 극단의 빛 속에서 그것이 가진 굴곡과 음영의 디테일은 간과되기 쉽다. 특히 그 현상이나 역사, 내포한 사회적 맥락이 복잡다단한 다면체에 가까울 때 더 그렇다. K팝은 다면체다. 10대 초중반부터 재능을 보고 선발한 청소년들, 그들을 다스리고 키워내는 트레이닝 시스템, 국내외에서 체계적으로 수급해 조립되는 음악과 영상 콘텐츠, 어느새 기획사나 언론보다도 커져 버린 글로벌 슈퍼 팬덤의 짙은 영향력과 넓은 스펙트럼까지….

IT나 제조업과 같은 기업 활동만으로 지켜보기도 힘들고 장기 자랑의 확장판 같은 엔터테인먼트 정도로 한정해 보기는 더더욱 힘들다. K팝의 톱니바퀴는 오늘도 새로운 기술,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나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고 돌아가고 있다. 인터넷 연예 게시판은 거대한 슈퍼오거니즘처럼 살아서 꿈틀대며 수많은 아이돌 가수 각자의 꿈과 욕망은 오늘도 예측하기 힘든 곡선을 수면 아래에 그려내고 있다.

‘K팝발 한강의 기적’은 그래서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이 거대한 무언가가 괴물이 될지, 거물이 될지 아니면 건강한 무엇이 될지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들이나 간과되고 과소평가되는 기능 및 업무들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어쩌면 누군가가 말했듯 하이브-민희진 사태는 그냥 기업가정신이나 정도(正道)를 모르는 미친 사람들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싸움이 이렇게나 회자되고 누구도 그 전개와 결말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으로 온 데는 사회의 변화가 있다. 이제 우리가 3차원이라 믿어왔던 세계는 4차원이다. 인공지능(AI)은 4차원에 적응할 때쯤 5차원의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갈 참이다. 엔터테인먼트의 개념, 엔터테이너의 정의가 빠르게 변화했다.

‘코페르니쿠스적’이란 관형어가 있다. 천동설만이 진리라고 믿던 시절, 지동설은 근본 없는 이야기였다. 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 임희윤heeminem@naver.com

    대중음악평론가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동아일보와 헤럴드경제에서 15년간 취재기자로 근무했으며 대중음악 등 문화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스림뉴웨이브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다양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음악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예술기』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등이 있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과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등에도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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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장재웅

    정리=장재웅jwoong04@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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