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이라는 말 하나론 세계적인 전기차 수요 둔화의 원인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본질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본질은 고금리 기조와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자들의 구매력 감소, 재정 부족에 따른 각국 보조금의 감축, 대형·고급화 모델에 주력한 완성차 업체들의 전기차 포트폴리오에 있다. 당장의 어려움에도 여전히 전문가들은 2030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30%를 전기차가 차지하는 전동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전동화라는 물길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는 결국 저가 전기차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차별 우위를 창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경쟁력 확보에 힘써야 한다.
김태환 한국 딜로이트 그룹 자동차산업 리더는 완성차 업체와 부품 공급망, 모빌리티 서비스 전반에 걸쳐 깊이 있는 비즈니스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딜로이트컨설팅의 현대자동차그룹 담당 글로벌 리드 컨설팅 파트너로서 한국과 미국, 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반에 걸쳐 글로벌 프로젝트를 조정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소비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닙니다. 대중의 구매력은 감소하는데 완성차 업체의 전기차 포트폴리오는 대형·고급화 모델에 집중돼 있어요. 이 괴리가 전기차 판매량 상승세를 둔화시킨 근본 요인입니다.”
요즘 전기차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말이 있다.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이다. 수많은 혁신 기술이 대중화를 앞두고 빠졌던 이 깊은 수렁에 전기차도 한 발을 걸쳤다는 평가가 쏟아진다.11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중국 시장을 제외한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432만여 대로 전년 동기 대비 5.4% 증가했다. 전년 대비 기준 2023년 32.1%, 2022년 26.6%에 달했던 가파른 상승률을 감안하면 성장세가 둔화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 시장을 제외한 세계 전기차 연간 판매량은 45.7% 성장해 566만8000여 대를 기록했다.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차량을 합산한 숫자다.닫기 금세 도래할 것 같던 전동화 시대22일반적으로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30% 이상을 전기차가 차지하게 되는 시점을 가리킨다.닫기에 대한 기대도 확연히 사그라든 분위기다. 판매량 상승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많은 완성차 기업이 전기차 생산 목표를 대거 낮춰 잡기 시작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은 전기차 생산 계획을 연기하거나 전환 목표를 재조정했다. 테슬라 역시 실적이 악화하면서 투자 계획을 축소·철회하고 동남아시아 등 신규 시장으로 본격 눈을 돌렸다.33이지형. (2024) BEV 수요 둔화 속 완성차사별 대응 전략. 한국자동차연구원.닫기 볼보는 2030년부터 모든 차량을 전기차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철회했다. 일본 도요타도 2026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종전보다 50만 대 적은 100만 대로 떨어뜨렸다. 완성차 업체들이 순수 전기차 투자 비중을 줄이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차(PHEV)와 같은 과도기 기술에 다시 힘을 싣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화석연료에 힘을 실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전기차의 미래가 크게 불투명해졌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전동화 시대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고 본다. 딜로이트그룹은 “30~40%에 달했던 판매량 상승세가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전기차 판매는 분명하게 증가하고 있다”며 “주요 시장 소비자들의 가처분 소득 감소와 완성차 업계가 추구한 고급 전기차 중심 전략의 괴리 때문에 판매가 부진한 측면이 크다. 가성비 전기차가 본격 등장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글로벌 통계에서 제외하곤 하는 중국 시장이 견조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44중국 자동차공업협회(CAAM)에 따르면 이달 초 중국의 전기차 연간 생산량은 1000만 대를 돌파했다. 세계 최초로 연간 전기차 생산 1000만 대를 달성한 나라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 생산량은 12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19년 124만 대에 불과했던 숫자가 5년 만에 10배가량 뛰었다.닫기을 지적하며 오는 2030년이면 전동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 역시 큰 틀에선 여전히 전동화 시대를 대비한 행보를 유지하고 있다. BYD를 비롯한 중국 업체들은 이미 저가 전기차를 앞세워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신흥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배터리 기술에 강점을 가진 한국과 일본의 완성차 업체들 역시 투자의 고삐를 놓지 않는다. 도요타는 북미 지역, 혼다는 중국 시장을 노리며 생산 설비를 늘리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북미에 이어 동남아시아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폴크스바겐,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독일 완성차 업체들은 상대적 약점으로 꼽혔던 배터리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전기차 공급망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53이지형. (2024) BEV 수요 둔화 속 완성차사별 대응 전략. 한국자동차연구원.닫기 일시적 수요 둔화로 시장이 숨 고르기에 들어간 가운데 전기차 시대의 패권을 잡기 위한 완성차 업계의 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DBR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의 김태환 한국 딜로이트 그룹 자동차산업 리더(전무)를 만나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현황을 진단하고 전망과 우리 기업들의 대응 전략을 들어봤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딜로이트 글러벌의 완성차 기업 담당 글로벌 리드 파트너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