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죄송한데, 총괄 책임자를 바꿔주세요.”
김지현 한국딥러닝 대표(29)는 20대 초반 대형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시절 고객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시스템 환경과 데이터 구조를 직접 파악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설계했지만, 상대방은 그가 여성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역량부터 의심했다.
“1997년생이라고 하자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는 분에게 책임자를 바꿔달라고 했죠. 계속 결과를 쌓아 보여드리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입니다.”
2019년 자본금 10만원으로 출발한 한국딥러닝은 현재 공공·금융·제조 분야 80여 개 고객사를 확보한 문서 AI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 이후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며 고객이 실제 비용을 지불하는 사업을 만들었고, 시리즈A 투자로 120억 원을 유치했다.
김 대표는 지난 5월 포브스아시아가 선정한 ‘30세 미만 30인’ 소비자·엔터프라이즈 기술 부문에도 이름을 올렸다.
최근 한국딥러닝의 자체 비전언어모델(VLM)은 글로벌 문서·멀티모달 벤치마크에서 구글과 오픈AI 계열 범용 모델보다 높은 성과를 기록했다. 김 대표는 “모든 AI 분야에서 경쟁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문서 AI 영역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와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에어팟 케이스 팔던 대학생…“기술과 사업은 다른 이야기”
사진=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김 대표는 경희대학교 재학 중이던 22세에 한국딥러닝을 창업했다. 부모는 모두 개발자였고 아버지는 소프트웨어 사업을 했다. 그는 부모에게서 화려한 성공담보다 사업 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기술이 멋있어 보이는지보다 고객이 실제로 돈을 낼 만한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김 대표는 대학생 시절 에어팟 케이스를 수입해 판매하고 학교 단체 패딩을 제작해 팔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기술로 사업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는 사실을 배웠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고객이 비용을 낼 만큼 명확한 효용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누군가 실제로 돈을 내고 사용할 기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이 AI 기업을 창업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교수와 선배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 대표는 부족한 신뢰를 회사의 이미지로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명을 ‘한국딥러닝’으로 정하고 신생 스타트업보다 오래된 기술 기업처럼 보이도록 브랜드를 설계했다.
“제가 어려서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만큼은 처음부터 믿을 수 있는 기술 기업처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OCR 시장은 없다…업무 자동화 시장만 있을 뿐”한국딥러닝은 광학문자인식(OCR) 기술로 시장에 진입했다. 첫 고객은 물류 현장의 배송장 주소를 인식하는 공공기관이었다. 바코드 오류로 사람이 일일이 분류하던 물품을 AI가 다시 읽어내면서 현장 업무를 줄였다.
김 대표는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반복 업무를 줄여주기 때문에 실무자들이 먼저 도입을 문의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딥러닝은 단순히 문서를 읽는 OCR 기업에서 판단과 후속 업무까지 수행하는 ‘AI 워커’ 기업으로 방향을 바꿨다. 대출 서류에서 정보를 추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출 가능 여부와 부족한 서류, 추가 확인이 필요한 위험 요소까지 판단하는 식이다.
회사는 이를 ‘3제로(Zero) AI 워커’라고 설명한다. 별도 학습을 반복하지 않는 ‘제로 트레이닝’, 생성형 AI의 환각을 줄인 ‘제로 할루시네이션’, 예외적인 항목만 사람이 확인하는 ‘제로 리뷰’다.
한국딥러닝의 강점은 7년 동안 공공·금융·제조 현장의 복잡하고 비정형적인 문서를 처리하며 쌓은 데이터다. 자체 VLM 모델은 글로벌 문서·멀티모달 벤치마크에서 구글과 오픈AI 등 범용 모델보다 높은 성과를 냈다.
“범용 VLM은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모델이지만 산업 현장의 문서는 양식과 표현이 제각각입니다. 저희는 7년 동안 그런 ‘지저분한 데이터’만 다뤄왔습니다.”
● “AI 경쟁의 승부처는 모델보다 데이터와 현장”
사진=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최근 구글과 오픈AI,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이 경쟁적으로 모델을 개선하면서 AI 기술은 예상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김 대표는 모델이 강력해질수록 오히려 이를 실제 업무에 연결하는 데이터와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봤다.
기업과 정부가 AI 전환에 나설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도 모델보다 데이터다. 기관과 기업마다 보유한 문서와 업무 방식이 달라, 각자의 데이터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델은 교체할 수 있지만 조직에 맞게 정리한 데이터는 계속 남는다.
“동아일보의 데이터와 다른 언론사의 데이터는 다릅니다. 기관과 기업마다 고유한 데이터를 정리해 놓아야 새로운 모델이 나와도 갈아 끼워 사용할 수 있어요. 문서 AI는 모든 AI 전환의 가장 앞단에 있는 기반 인프라라고 생각합니다.”
● “빠르지만 조급하다”…젊은 CEO의 시행착오김 대표는 어린 나이에 창업한 장점으로 “경험이 없어 노련하지는 않지만, 경험이 없어서 겁도 없다”는 점을 꼽았다. 기존 사업을 바꾸는 데 대한 부담이 적어 OCR 기업에서 AI 에이전트 기업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다.
반면 빠른 의사결정은 시행착오도 남겼다.
“처음에는 사람마다 다른 성향과 속도에 맞추는 노련함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미안한 얼굴들이 많이 떠올라요. 비전을 향해 가는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잘 다독이는 것은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한국딥러닝이 조직 운영에서 중요하게 보는 가치는 속도와 집요함이다. 기술적인 문제든 고객사의 업무 문제든 ‘안 된다’는 말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해법을 찾는 태도다.
김 대표는 AI 시대에도 결국 경쟁력은 문제 해결 능력에서 나온다고 봤다.
“요즘은 누구나 AI를 활용해 글을 쓰고 자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아파도 계속 묻고 다른 방법을 찾아 결국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은 쉽게 대체되지 않습니다.”
● “이것 없이 예전에는 어떻게 일했지”한국딥러닝이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공공·금융·제조 기업이 업무를 수행할 때 당연하게 사용하는 기반 소프트웨어다. 메신저나 이메일처럼 문서 AI 역시 없던 시절을 떠올리기 어려운 서비스가 되는 것이 목표다.
“10년 뒤에는 ‘이것 없이 예전에는 어떻게 일했지’라는 생각이 드는 회사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 자료를 정리해오라고 말하듯 AI 에이전트에게 업무를 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를 만들고 싶어요.”
그가 22세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있었다.
“그때는 누군가 ‘너무 빠른 수준이 아니라 조급하다’고 말하면 오랫동안 흔들렸습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충분히 고민하되, 내가 세운 원칙과 가치가 맞다고 판단했다면 더 강단 있게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가는 길은 이미 있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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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숫자와 실적 뒤에 가려진 기업가들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실패와 위기, 기술과 사람,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선택까지. 치열한 시대를 건너온 대한민국 기업인들의 삶을 통해 ‘성공’의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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