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릴리가 백신 기업 3곳을 한꺼번에 인수하며 감염병 예방 분야를 새 투자처로 끌어올리고 있다. 비만·당뇨 치료제인 GLP-1 계열 의약품을 앞세워 현금 창출력을 키운 글로벌 제약사가 항암제와 면역치료제에 이어 백신 파이프라인 확보에 나선 것이다. 인수 대상에는 GC녹십자가 미국 현지 전문가들과 공동 투자해 설립한 큐레보도 포함됐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릴리는 지난 26일 큐레보, 림마테크 바이오로직스, 백신 컴퍼니 등 백신 기업 3곳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전체 거래 규모는 최대 38억3000만 달러다. 한화로는 약 5조 원대에 해당한다.
이번 거래는 릴리가 감염병 연구개발 역량을 키우기 위해 추진됐다. 릴리는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바이오의약품 평가를 담당하는 CBER 센터장을 지낸 피터 마크스 박사를 감염병 부문 책임자로 영입했다. 이번 백신 3개사 인수는 해당 인사 이후 몇 달 만에 이뤄진 대형 거래다.
GC녹십자 관계사 큐레보, 릴리 품으로
릴리는 큐레보를 최대 15억 달러(약 2조2540억 원)에 인수한다. 계약 조건에 따라 큐레보 주주들은 선지급금과 특정 목표 달성 시 지급되는 추가 금액을 포함해 최대 15억 달러의 현금을 받을 수 있다.
큐레보는 GC녹십자가 글로벌 백신 시장 진출을 목표로 미국 현지 전문가들과 공동 투자해 2017년 11월 설립한 미국 내 관계사다. GC녹십자는 지난해 10월 큐레보와 차세대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인 아메조스바테인의 상업화 이후 제품 공급을 위한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큐레보의 주력 후보물질은 성인 대상포진 예방을 위한 보조제 함유 서브유닛 백신 아메조스바테인이다. 현재 대상포진 백신 시장에서는 GSK의 싱그릭스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 싱그릭스의 2025년 매출은 전년 대비 6% 증가한 35억5800만 파운드 (약 7조2000억 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아메조스바테인은 기존 대상포진 백신의 내약성 문제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 후보물질이다. 현재 표준 치료법은 예방 효과가 입증돼 있지만, 접종 후 피로와 오한, 주사 부위 통증 등으로 인해 2차 접종을 꺼리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큐레보는 차세대 합성 면역증강제를 활용해 면역 반응은 유지하면서 이상반응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왔다.
표준 치료법과 직접 비교한 2상 임상시험에서 아메조스바테인은 주요 평가 지표에서 동등한 면역 반응을 보였고, 활동을 제한하는 피로와 오한, 주사 부위 통증 등 부작용은 절반 이상 줄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상포진이 뇌졸중 위험을 높이고 대상포진 백신 접종이 치매 위험 감소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늘어나는 가운데, 내약성을 개선한 백신이 접종률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릴리는 림마테크 바이오로직스도 최대 7억8000만 달러(1조1720억 원)에 인수할 예정이다. 해당 금액에는 선지급금과 특정 임상 및 규제 목표 달성에 따른 추가 지급금이 포함된다.
림마테크는 황색포도상구균, 임균, 클라미디아 트라코마티스 등 세균 병원균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항생제 내성 증가로 기존 치료 선택지가 줄어드는 감염병 영역에서 예방 백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림마테크의 독자 플랫폼은 질병을 유발하는 독소와 슈퍼항원을 표적으로 삼는다. 복잡한 세균 표적에 대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면역 반응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주력 프로그램은 황색포도상구균 백신 후보물질 LTB-SA7이다. 황색포도상구균은 수술 부위 감염의 주요 원인균으로 꼽히며, LTB-SA7은 현재 1상 임상 개발 단계에 있다.
림마테크는 추가 세균 병원균에 대한 백신 개발도 전임상 단계에서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불임이나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기 감염 후유증과 관련된 병원균도 포함된다. 항생제 내성 문제가 커지는 상황에서 백신 기반 예방 전략이 치료 부담을 낮출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백신 컴퍼니 인수 규모는 최대 15억5000만 달러(약 2조3300억 원) 다. 백신 컴퍼니 주주들은 선지급금과 특정 임상 및 상업적 목표 달성 시 지급되는 추가 금액을 포함해 최대 15억5000만 달러의 현금을 받을 수 있다.
백신 컴퍼니는 자체 개발한 생체 내 나노입자 기술을 기반으로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이 기술은 바이러스 유사 입자 백신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항원 발현 방식을 구현하면서도 기존 생산 방식의 부담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백신 컴퍼니는 다양한 바이러스 병원체를 대상으로 전임상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주력 프로그램은 엡스타인-바 바이러스 백신 후보물질이다. 회사는 해당 기술을 EBV에 적용해 5가지 항원을 포함하는 1상 임상시험 준비 단계의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EBV는 감염성 단핵구증뿐 아니라 다발성 경화증과 일부 악성 종양과의 연관성이 제기되는 병원체다. 예방 백신이 개발될 경우 급성 감염질환 대응을 넘어 감염 이후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신경계·종양 관련 후유증까지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가 제기된다.
GLP-1 호황 이후 백신으로 투자 시야 넓힌 릴리
릴리는 이번 인수에 대해 질병이 발생한 뒤 치료하는 방식보다 감염의 근원을 예방하는 접근에 무게를 둔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감염성 질환은 급성 질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원발 감염 이후 여러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 세계 주요 질병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항생제 내성이 확산되면서 세균 감염 치료 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도 백신 투자 확대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기존 항생제 치료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감염병이 늘어날 경우 예방 백신의 필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업계에서는 릴리의 이번 인수를 두고 GLP-1 치료제 호황으로 확보한 자금력을 신규 파이프라인 확보에 투입한 사례로 보고 있다. 릴리는 비만·당뇨 치료제 시장에서 빠르게 몸집을 키운 뒤 항암제, 면역치료제, 감염병 백신 등으로 투자 범위를 넓히고 있다. 백신은 단기간 매출보다 장기 파이프라인 가치와 공중보건 수요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영역인 만큼, 이번 거래는 릴리의 중장기 포트폴리오 재편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국내 바이오업계에서는 큐레보 인수의 후속 효과에도 관심이 쏠린다. 큐레보가 GC녹십자의 미국 관계사로 출발했고, GC녹십자가 아메조스바테인의 상업화 이후 제품 공급을 위한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릴리의 개발 및 상업화 전략에 따라 GC녹십자가 글로벌 백신 생산망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도 관전 포인트로 떠오를 전망이다.
GC녹십자는 그동안 독감, 수두, B형간염 등 백신 사업을 주요 축으로 키워왔다. 큐레보를 통한 미국 내 연구개발 협력은 글로벌 백신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성격이 컸다. 큐레보가 릴리 품에 들어가면서 GC녹십자가 체결한 CMO 계약의 진행 방향과 향후 생산 물량, 상업화 일정에도 관심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거래는 글로벌 백신 시장에서 빅파마의 투자 방향이 다시 선명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코로나19 이후 백신 시장은 일시적으로 급성장했지만, 팬데믹 수요가 줄어들면서 일부 기업들은 백신 사업 조정에 나섰다. 반면 감염병과 만성 후유증의 연관성, 항생제 내성, 고령화에 따른 예방 수요는 여전히 커지고 있다.
릴리가 확보한 세 회사의 파이프라인도 이 같은 수요를 공략했다. 큐레보는 고령층 수요가 큰 대상포진 백신을, 림마테크는 항생제 내성과 관련된 세균 감염 백신을, 백신 컴퍼니는 EBV 등 장기 후유증과 연관성이 제기되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치료제 중심 제약사였던 릴리가 예방 백신을 통해 감염병 대응 포트폴리오를 보강하려는 배경이다.
릴리의 백신 3개사 인수는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예방의학 영역의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GC녹십자 미국 관계사였던 큐레보가 인수 대상에 포함되면서 국내 백신 기업의 글로벌 협력 모델에도 관심이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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