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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얻는 경영 TIP

때로는 계산된 도박이 필요하다

최중경,정리=배미정 | 427호 (2025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전쟁과 같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계산된 도박’ 즉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두리틀 특공대, 일본의 레이테만 미끼 작전은 상상력과 대담함으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으려 한 계산된 도박의 대표적인 사례다. 리지웨이의 지평리 전투는 적의 한계를 정밀하게 계산한 도박이었고, 구정 대공세는 군사적 패배를 감수하고 여론전을 노린 전략적 도박이었다. 결국 역사적 전환점은 위험을 인지하고도 승리를 위해 과감히 실행에 옮긴 리더들의 정교한 도박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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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근무를 나가기 전에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살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 돈으로 주식을 살까 아니면 그냥 전세 계약이나 월세 계약을 내놓을까. 주식시장이 상승기라고 확신한다면 집을 파는 모험을 할 수 있다. 지인 중에 그렇게 아파트를 팔고 주식을 사서 대박 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파트 가격은 2배 올랐는데 주식은 반 토막이 돼 서울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고 평수도 줄어든 전세 아파트에서 살게 된 사람도 있다.

의사결정에는 늘 불확실성과 위험이 따른다. 그렇다고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안 할 수는 없다. 반드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 있기 때문이다. 해외 근무를 나가기 전에 살던 집을 어떻게 할지는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여러 가지 대안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측정할 수 있다면 의사결정이 쉬워질 것이다. 감수해야 할 위험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비용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면 과감하게 선택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계산된 위험을 감수(calculated risk-taking)’하는 것이다.

전투 상황에도 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안해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때로는 의미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큰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대표적인 작전이 1942년 4월 두리틀 특공대의 일본 본토 폭격 작전이다. 항공모함에 폭격기를 싣고 일본 근해까지 가서 항공모함 갑판에서 폭격기를 띄워서 동경을 비롯한 일본 영토를 폭격하고 미국으로 귀환한 작전이다. 크나큰 위험과 불확실성이 존재했지만 미국은 진주만 기습에 응징해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불어넣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결사대를 보냈다.

전쟁은 불확실성과 함께한다. 군사학자인 클라우제비츠는 “군사 행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중 4분의 3은 지극히 애매하고 불확실한 구름에 잠겨 있다. 전쟁은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교통, 통신, 수학의 발달로 클라우제비츠가 살았던 시절에 비해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가 많이 낮아졌지만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때로는 계산된 도박을 해야 한다.


1. 방심이 만든 기적: 두리틀 특공대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여론은 일본에 하루라도 빨리 보복을 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중 “항공모함에 폭격기를 싣고 일본 근해로 가서 본토를 폭격하자”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몸체가 무거운 폭격기가 항공모함 갑판의 짧은 활주로에서 뜰 수 있을지였다. 육군 항공대의 에이스 조종사인 두리틀 중령이 시도해 볼 만하다고 해 유능한 조종사들을 모아 맹훈련한 후 16대의 B-25 미첼 폭격기를 항공모함 호넷에 싣고 일본열도로 출발했다. 다음 문제는 B-25 폭격기가 항공모함에 착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련이나 중국에 착륙한 후 도움을 받아 귀환해야 했다. 그런데 독일군의 침공으로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져 일본군이 소련의 동쪽 국경을 공격하면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어려운 상황이 올 것을 걱정해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중국 국민당의 협조를 얻어 중국의 안전 지역에 착륙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문제는 일본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감시망에 미리 발각되지 않아야 했다. 미리 발각되면 폭격기의 작전 반경 내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 위험했는데 실제로 폭격기 출발 예정 지점에서 300㎞ 못 미치는 곳에서 일본군 경비정에 발각됐다. 당장 폭격기들을 출발시키면 폭격에 성공하더라도 중국 본토의 목표 지점에 닿지 못하고 바다에 빠지거나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리틀 특공대의 B-25 미첼 폭격기 16대는 모두 호넷함을 떠나 일본 동경을 향해 날아갔다. 1942년 4월 18일 두리틀 특공대는 동경 천황 궁 근처와 일본 도시들을 공습하는 데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80명의 대원 중 69명이 생환했다. 작전의 난도가 상당히 높아서 자살공격대나 마찬가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주 높은 생환율이었다. 생환율이 높았던 이유는 일본군 지휘부가 미국은 급강하폭격기 돈틀리스, 전투기 와일드캣, 뇌격기 데버스테이터 등 항공모함 함재기로 공격할 거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쌍발기들이 접근한다는 보고가 들어 왔지만 “미국 해군 함재기에는 쌍발기가 없다”는 쓸모없는 유식함에 기대서 접근해 오는 B-25 폭격기를 일본 항공기로 오인하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다면 호위 전투기 없이 접근하던 B-25 폭격기의 자체방어 능력으로 일본 전투기를 상대하기 벅찼을 것이다. 아마도 동경까지 못가고 대부분 격추됐을 것이다. 작전 개념이 워낙 기발하고 대담하다 보니 일본군의 상상력 범위를 크게 벗어났고 일본군은 그야말로 눈 뜨고 코를 베이는 망신을 당했다.

두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천황궁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자 크게 당황한 일본군 지휘부는 미국 항공모함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해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됐다. 두리틀 특공대의 공습이 성공한 후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2년 6월 7일에 일본 연합함대가 미드웨이를 공격했다. 미드웨이 공격작전은 일본 육군이 반대하던 작전이어서 두리틀 특공대의 공습이 없었으면 미드웨이해전도 없었을 것이고 태평양전쟁의 전개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두리틀 특공대의 일본 본토 공습은 단순한 보복을 넘어 결과적으로 태평양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2. 레이테만 해전의 미끼: 오자와 함대

태평양전쟁의 추가 미국 우세로 기울고 태평양에 퍼져 있던 일본군의 기지가 차례로 무너져 내리면서 막다른 길로 접어든 일본군의 숨통을 누르기 위해 미군은 1944년 10월 필리핀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필리핀 점령이 꼭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미군 수뇌부에서도 이견이 존재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과거 부하 장병들을 적진에 남겨두고 홀로 필리핀 전장을 떠나야 했던 군인으로서의 치욕을 꼭 만회하고 싶었고 치열한 논쟁 끝에 1944년 10월 20일 드디어 필리핀 상륙 작전이 시작됐다. 미군 상륙 부대는 레이테만으로 상륙을 시도했는데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으로 상륙 단계에서 미군을 격파하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일본 연합함대가 4개월 전 있었던 마리아나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해군력이 완전히 궤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일본 해군 수뇌부는 기발하고 대담한 미끼 작전을 기획했다. 오자와 지사브로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전대로 미군 주력 항공모함 전대를 유인해 레이테만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틈에 구리다 다케오 제독의 함대가 레이테만에 진입해 상륙 중인 미군에 함포사격을 가해 결정타를 먹인다는 작전이었다. 성공하면 정신없이 밀리고 있던 일본군이 숨을 고르고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오자와 함대의 희생, 구리다 함대의 결사 분전이 동반되고 무엇보다도 미군 주력 항공모함 전대가 미끼를 물어야 했다. 레이테만 해전의 과정과 결과, 지휘관들의 실책 여부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어쨌든 일본군의 작전 계획은 기발했고 계산된 도박이었다.

오자와 함대는 미군 주력인 제3함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일방적인 전투 끝에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었다. 오자와 함대의 항공모함에는 항공기와 조종사가 크게 부족해 사실상 껍데기나 마찬가지여서 미끼 이외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만에 진입해서 미군 수송 선단에 함포사격을 가하면 작전이 의도대로 실행되는 것이다. 구리다 함대의 움직임을 포착한 미군 제7함대 소속의 태피3 전대는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멸을 각오하고 구리다 함대를 막아섰다. 구리다 제독은 자신의 함대가 미군 주력함대와 만난 것으로 착각했다. 태피3 전대를 물리친 구리다 제독은 레이테만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일본 함대의 피해가 컸고 미군 주력함대를 혼내줬으니 이만하면 됐고 굳이 자살행위에 가까운 레이테만 진입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전의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이 사라져 버렸다. 구리다 함대의 조공부대인 니시무라 함대는 홀로 레이테만에 진입하려고 시도했다가 전멸했다. 결국 일본 해군은 귀중한 전력만 손실하고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가장 어려운 퍼즐 조각인 미끼 작전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은 공격 부대가 임무를 회피함에 따라 미군 상륙병력과 수송 선단에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사실 미군은 구리다 함대의 진출로 허를 찔려 대혼란에 빠졌었다. 오자와 함대에 낚여 레이테만에서 멀어진 제3함대의 홀시 제독에게 제7함대의 킨케이드 제독이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심각하다. 고속전함과 폭격기를 보내서 적 함대가 아군 항공모함을 격파하고 레이테만에 진입하는 걸 막아 달라(My situation is critical. Fast battleships and support by air strikes may be able to keep enemy from destroying CVES(호위항공모함) and entering Leyte).” 제3함대 사령관 홀시 제독은 본인이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부하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크게 당황했다. 나중에 홀시 제독이 원수 계급을 받을 때 해군성 안에서 이때 홀시가 범한 큰 실수를 들어 진급을 반대했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레이테만은 뻥 뚫려 있었다. 구리다 함대는 성공 일보 직전까지 갔었고 일본 해군의 과감한 도박은 천신만고 끝에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다. 구리다 함대의 철수는 일본 해군에서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됐다.


3. 리지웨이의 도박: 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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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며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한반도로 잠입한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밀려 내려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줬다.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해 새로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1월 중순부터 중공군의 배치 상황과 보급선을 직접 정찰한 후 중공군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보급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즉 중공군의 대공세가 종말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2월이 되자 공세로 전환하는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공격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우선 동부 전선의 한국군 사단들을 공격해 무너트렸다. 기세가 오른 중공군이 경기도 양평으로 기동해 서부전선의 미군을 에워쌀 경우 금강 방어선까지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관적 분위기가 합동참모본부와 극동군사령부의 미군 지휘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리지웨이 장군은 과감한 작전을 기획하고 밀어붙였다. 양평 지평리에 보병 제23연대를 주축으로 해 포병부대, 전차부대로 보강한 전투단을 보내 원형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미끼 작전을 쓴 것이다. 중공군은 이 미끼를 물었는데 지평리가 동부전선의 중공군을 서부전선으로 투입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1951년 2월 13일부터 3일 동안 중공군은 4개 사단을 동원해 지평리에 있는 미군 진지를 공격했다. 미군 포병대는 진지 주변에 촘촘한 화망을 구성하고 중공군의 밀집대형에 불벼락을 쏟아부었다. 중공군은 미군 포병의 막강한 화력에 많은 인명 손실을 낸 후 퇴각했다. 한때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방어선이 돌파된 적이 있었는데 미군에게 배속됐던 프랑스 대대가 착검돌격으로 중공군을 밀어냈다.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프랑스 대대의 기세에 중공군은 압도되고 말았다. 미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중공군을 서울 바깥으로 몰아내고 3월 16일 서울을 재탈환했다.

지평리 전투는 서부전선의 미군을 동쪽으로부터 에워싸서 포위하겠다는 적군의 의도를 읽고 적군이 기동할 길목에 강력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유인해 결정적 타격을 가한 작전이었다. 지평리의 미군 진지는 일종의 덫이고 계산된 도박이었다.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전투가 한창인 지평리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진작시켰고 기갑부대가 주축인 구원부대를 보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평리로 들어서게 해 중공군 대열을 와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4년 겨울,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벌지 전투에서 고립된 채 교통 요지인 바스토뉴를 사수하던 제101 공수사단을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중령(제16대 한미연합사 사령관 로버트 에이브럼스 대장의 아버지)이 지휘하는 전차 대대가 포위망을 뚫고 구원했던 장면과 유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서 제82공수사단장, 제18공수군단장을 역임했던 리지웨이 장군이 벌지 전투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만약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이 패배했다면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전쟁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지평리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에 미군 합동참모본부와 미국 정부는 ‘전선이 금강 방어선까지 밀릴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고 제주도에 망명정권을 수립’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과 여러 참모도 지평리에서 철수할 것을 건의했지만 리지웨이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저공비행으로 정찰 활동을 하면서 중공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공세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한계, 즉 공세 종말점(culmination point)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지평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절대 우위의 미군 화력과 제공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지평리 전투는 리지웨이 사령관의 정교하게 계산된 도박이었고 중공군의 기를 꺾어 놓는 큰 성공을 가져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병력은 많지만 미군에 비해 포병 화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인해전술 때문에 밀집대형으로 움직이는 약점이 있음을 파악하고 포병 화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 후 중공군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하며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극동사령부와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상대로 포병부대만 더 보내주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미국 육군 원수 지위에 올랐던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리지웨이의 업적을 “미국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 공적(the greatest feat of personal leadership in the history of the Army)”이라고 치하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합동참모본부의 의견을 따르면서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쉬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분투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위기에서 구한 진정한 영웅이자 은인이다.


4. 베트남전쟁의 변곡점: 일석이조의 도박, 구정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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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은 1968년 설날(베트남어로 ‘뗏’. 우리도 설날에 입는 색동옷을 때때옷이라고 한다)에 시작된 남베트남해방군(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대공세로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구정 대공세는 초반에 기습 효과를 거두며 미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이 공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고 미국 대사관이 공격을 받아 경비 병력이 희생됐다. 그런데 미군이 우세한 화력으로 공세를 진압했고 베트콩은 조직이 거의 와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고 베트남 제2의 도시이자 옛 왕국의 수도였던 후에가 25일 동안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면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힘을 얻게 됐다. 특히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베트남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승리함으로써 구정 대공세는 전술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구정 대공세를 기획한 북베트남 지도부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취해 남베트남에서 민중봉기를 끌어내 남베트남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에 내세운 목표였고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미군이 베트남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공산 세력을 압도하고 있다고 아는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줌으로써 미국의 여론이 반전 무드로 바뀌게 하려고 기획한 작전이었다. 만약 미국의 여론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막대한 인명 손실은 의미 없는 희생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구정 대공세는 일종의 계산된, 성공한 도박이었다. 구정 대공세는 북베트남이 기획하고 주도했지만 북베트남군은 주로 국경지대에서 공세를 취했기 때문에 포위 공격을 당할 위험이 없어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베트콩은 내륙의 주요 도시와 시설을 공격했다가 포위돼 섬멸당했기 때문에 조직이 사실상 붕괴됐다. 베트콩 지휘부도 큰 희생을 치르면서 와해돼 구정 대공세 이후 베트콩은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인력이 장악하게 됐다. 베트콩의 지휘부는 남베트남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작전 개념에 큰 매력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민중봉기가 없을 경우 베트콩이 포위 섬멸될 수 있다는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968년 구정 대공세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 떼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군과 싸우는 데 방점을 두는 대신에 미국의 여론을 상대로 심리전을 폈던 북베트남 지도자들의 탁월한 안목과 전략적 사고 능력이 돋보인다. 아울러 남베트남 해방군(베트콩)의 조직까지 장악해 대미항쟁 승리 후 남북통일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분열의 씨앗까지 제거하는 고차원의 정치 역량을 보여줬다. 북베트남 입장에서 구정 대공세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 최중경choijk1956@hanmail.net

    한미협회장

    최중경 한미협회장은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 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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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배미정

    정리=배미정soya1116@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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