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며 반도체, AI, 배터리, 양자컴퓨팅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도 기존의 효율 중심 R&D 체계를 넘어 지정학 리스크를 고려한 ‘글로벌 분산형 R&D 구조’로 전략을 재정비하고 있다. 기술 초격차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 전략은 ①지식재산권(IP) 보호 ②오픈 이노베이션 중심의 협력 생태계 구축 ③ 정부의 정책·재정적 지원이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며 기술 주권을 지키는 방패이자 기업 지속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제 R&D는 기술 경쟁의 도구를 넘어 국가 안보와 산업 생태계 회복탄력성을 확보하는 전략적 무기로 재정의되고 있다.
2025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엔비디아 H20 칩의 대중국 수출 제한 조치는 글로벌 R&D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H20 칩은 엔비디아가 미국 수출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성능을 낮춘 중국 전용 AI 칩이었지만 메모리와의 연결성이 뛰어나 슈퍼컴퓨터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미국 정부는 H20 칩이 중국의 첨단 컴퓨팅 기술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최근 대중국 관세 인상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압박 수위를 한층 끌어올린 조치로 해석된다. 2025년 7월 중국의 희토류 수출 완화 조치와 맞물려 H20에 대한 중국향 수출 제재를 해제했으나 여전히 H100과 같은 고성능 칩의 중국 수출은 금지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조치는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이 경제를 넘어 외교, 안보, 산업 정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도체, AI, 배터리, 양자컴퓨팅 등 미래 산업의 핵심 기술을 둘러싼 경쟁은 글로벌 공급망을 지역 단위로 블록화시키고 있으며 기업의 연구개발(R&D) 전략 역시 기존의 효율 중심에서 ‘지정학 기반의 생존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전통적인 R&D 패러다임은 기술 추격과 효율성 극대화를 중심으로 설계됐다. 선진 기술을 빠르게 학습하고 개선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기술 패권 경쟁은 R&D의 목표를 기술 선점과 지정학적 복원력으로 전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을 둘러싼 미·중 경쟁이 단순한 경제적 경쟁을 넘어 안보 차원의 기술 주권 확보로 확장되면서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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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ljh20@keti.re.kr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선임
이재훈 선임은 한국외대에서 정치외교학(영어통번역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정치학(국제정치)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가천대에서 기술경영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에서 딥테크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과 기술사업화 및 R&BD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드라이트리’란 필명으로 IT 주제의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딥테크 AI 로봇 전쟁』 『일론 머스크와 DOGE: 트럼프 2.0 시대 새로운 경제 실험의 서막』 『딥테크 전쟁, 시장을 파괴하는 창조적 독재자들』 『모빌리티 기술의 현재와 미래: 전기차 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