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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세종의 재난 대응

지역 전문가를 최고 지휘관으로 쓰다

김준태 | 272호 (2019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천재지변같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재난도 철저한 예방과 준비, 특히 매뉴얼과 전담기관에 근거한 평시의 재난 관리,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를 통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 확립 등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세종은 평소 작은 재난의 기미에도 즉각 대응해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행정 조치를 취했으며 지역을 잘 아는 최고 전문가를 파견해 재량권을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조치하도록 했다. 왕이 철저한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자 관리들도 재난 피해를 줄이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주
이번 호로 ‘Case Study 朝鮮’ 연재를 마칩니다. 보내주신 관심과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정조 임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이 세상은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옛날과 오늘날의 차이점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비슷한 데가 있으니,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감정의 작용이 같고, 시대가 융성하고 쇠퇴하는 흐름도 대개 유사하다. 그러므로 잘 관찰해보면 오늘의 일은 옛 사람이 일찍이 겪었던 일이요, 옛 사람이 남긴 말은 지금도 마땅히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 된다.” 조만간 새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진, 가뭄, 수해, 화재, 태풍, 전염병.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는 재난들이다. 재난은 대부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움직임이 주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떻게 대비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재난의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조선은 어땠을까? 과학기술이나 위기대응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진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이 있다. 특히 세종은 어떻게 재난을 예방하고 대비할 것인지, 재난이 발생한 후엔 어떻게 맞설 것인지에 관해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자연이 만들어내는 재난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에게 달렸다. 그래서 세종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조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1 “천변(天變)은 비록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남김없이 다 해야 한다”고도 했다. 2

세종이 ‘예방’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은 평소 재난의 작은 기미에도 즉각 대응했다. 큰비가 내리면 곧바로 침수 상황을 확인하고 수재 발생이 우려되는 곳을 점검하게 했으며 3 여러 날에 걸쳐 비가 내릴 때는 ‘반드시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니 수문(水門)을 열어 물이 통하게 하고 관원들이 밤새 순시하도록’ 했다. 4 겨울 중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자 “강의 얼음이 얇아져 사람이 빠질까 염려된다. 각 나루터에서는 얼음을 깨고 사람을 건너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니 5 사고 예방에 대한 세종의 철저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기적인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여유가 있는 고을의 곡식을 흉년이 예상되는 고을로 옮겨놓게 하는 등 6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해 구휼 물품을 항시 준비하도록 했다. 7 기근이 닥쳤을 때 식량 외 종자용 곡물을 추가로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은 구휼 행정을 개선했다. 백성을 구하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구휼미 사용에 재량권을 부여했으며 9 백성이 먹을거리를 찾아 식량이 풍족한 도(道)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10 세종은 풍년이 든 지역에도 진제소 11 를 설치했는데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유랑민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12 또 재난 발생 시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의 현황을 관에서 선제적으로 조사하도록 했으며 반드시 해당 고을 수령이 직접 다니며 확인하고 구제에 나서게 했다. 13 이런 책임을 다하지 못해 백성 구제에 실패할 경우 그 수령에게는 곤장 90∼100대의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14: 관(官)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응을 펼치게 함으로써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한 것이다.


최고 전문가를 최고 지휘관으로

그런데 이처럼 재난에 대비하고 신속히 대응한다고 해도 재난의 강도가 너무 세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개별 도(道)나 군현의 역량만으로는 재난을 해결할 수 없어 국가 차원에서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무엇보다 컨트롤타워가 중요하다.

세종 18년으로 가보자. 몇 년째 전국적으로 흉작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특히 충청도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세종은 충청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교지를 내린다. “근래에 굶주려 죽는 백성이 대단히 많다고 들었다. 내가 심히 송구하게 여긴다. 그런데 왜 경은 이러한 사정을 한 번도 보고하지 않는가? 이미 죽은 사람들은 몰래 구렁에 버려서 알 수 없었다 하더라도 빈사지경에서 신음하고 배곯아 파리한 자 또한 많을 것이니, 감사와 수령이 다방면에서 두루 살핀다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 현재 (충청도) 창고의 곡식이 남아 있고 또한 필요하면 다른 도에서 곡식을 옮겨 올 수 있으니, 만약 마음을 다해 구휼하여 살린다면 반드시 백성들이 사망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람을 파견하여 상황을 조사할 것이니 경은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널리 살피고 구휼하여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사망하는 일이 없게 하라.” 15 아무리 천재지변이라지만 관청에 여력이 있는데도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한다는 것은 관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를 질책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곧바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을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삼아 충청도로 파견하며 16 1) 승려 중에 자비심이 있는 자를 택해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진휼 공급하게 할 것 2)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노인과 어린아이, 병든 자를 거처하게 하고 구료(救療)할 것 3) 먹을 것을 찾아 다른 고을로 떠난 사람의 집과 논밭을 지켜줄 것 4) 구휼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의 죄를 엄히 묻고 공을 세운 사람은 직급을 올려줄 것 5) 일을 편의대로 처리한 후 보고할 것 등 다섯 가지 지침을 내렸다. 상벌권과 ‘선조치 후보고’의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지휘 체계를 확립하고 현장 중심의 능동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종 1품 재상급 대신을 최고구휼책임자에 임명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효과적인 구휼을 위해서는 충청도 전체를 지휘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도, 중앙정부기관의 협조도 이끌어내야 한다. 따라서 중앙의 삼정승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직급의 대신을 파견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세종의 고려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충청도 도순문진휼사 안순은 얼마 전까지 10년 넘게 호조판서로 재임했을 뿐 아니라 당시 판호조사(判戶曹事) 17 를 겸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충청도 관찰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충청도 각 고을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충청도를 비롯해 전국 팔도의 각 고을, 중앙 각 기관의 재정 상태, 곡식 보유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다. 발생될 수 있는 문제는 최소화하면서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구휼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적임자였다. 실제로 안순은 짧은 시간 안에 충청도 구휼에 성공하고 죽을 위기에 처했던 많은 백성을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 안순의 방법이 모범사례로 각 도에 전파되기도 했다. 19 이러한 전문가 중심의 위기대응 방식은 세종의 재위기간 내내 일관됐는데 천재지변과 전염병, 기근이 심각한 상황(해당 고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고을에는 그 지역 수령이나 관찰사를 임명하고, 해당 분야 업무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대신을 책임자로 임명해 재빨리 내려 보냈다. 덕분에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재난 이후 세종의 사후 조치다. 보통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일이 잘못된 뒤에 손을 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 대응에 있어서는 소를 잃었으면 반드시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소를 잃어버리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8년 2월15일 한양도성에 큰불이 났다. 경시서(京市署)를 비롯해 행랑(行廊) 116칸이 불타고 민가 2170호가 전소됐을 정도로 유례없는 대화재였다. 20 불은 다음 날에까지 이어졌는데 전옥서(典獄署)와 민가 200여 호가 소실됐다. 궁궐의 경우 신하들까지 나선 끝에 불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21


이처럼 화재가 일어나자 세종은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부상자를 치료해주며 사망자에게는 장례비를 지원하도록 조처했다. 22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재목을 공급했고 23 군인으로 소집된 사람 중 그 집이 화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장기 휴가를 줬다. 24 화재 방비책도 시행했다.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도로를 넓게 확장해 불이 잘 번지지 못하도록 했다. 또 개인 집은 5칸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게 했고 관청 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하도록 했다. 종묘와 궁궐, 종루 등 주요 지점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 비치했고, 화재 발생 시 각 기관별 대응 매뉴얼도 정비했다. 25

하지만 세종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종이 보기에 화재는 수재나 한재(旱災)와 같은 다른 재난과는 달리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피해를 예방하고, 또 줄일 수가 있다. 26 번에 보니 대화재가 발생하니 각 관청들은 우왕좌왕하며 방재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따라서 흩어져 있는 업무를 한데 모아 평소에는 예방 업무를 담당하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즉각 진압에 나설 수 있는 전담 관청을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한다.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도록 지시한 것은 그래서다. 27



세종은 병조판서와 의금부 도제조를 금화도감의 우두머리로 삼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28 가 도감의 실무를 총괄하게 했으며 삼군부, 의금부, 공조, 군기시, 선공감 등의 관리들을 겸직시켜 금화도감을 상설 운영케 했다. 방화(防火)와 관련된 모든 부처를 집결시켜 단일한 지휘계통에 배치함으로써 유사시 일사불란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은 금화도감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29 덕분에 그 후 일어난 크고 작은 화재들은 별다른 피해를 남기지 않았다. 한 번 소를 잃었지만 외양간을 견고하게 고친 덕분에 더 이상 소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후 임금들은 소방 전담 기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화재가 잘 일어나지 않자 금화도감을 굳이 둘 필요가 없다며 한성부로 통폐합해버렸다. 30 세종이 금화도감을 설치한 이유를 망각했다. 금화도감이 없어지자 기다렸기라도 했듯 큰 화재들이 반복됐고 성종 12년, 조정은 다시금 소방 기구인 금화사(禁火司)를 설치했다.

앞에서 살펴본 세종의 재난 대응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철저한 예방과 준비, 매뉴얼과 전담기관에 의한 평시의 재난 관리,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를 통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 확립, 국가의 총력 대응, 사후 조치 등은 그동안 여러 참사에서 우리가 늘 아쉬워하던 부분이다. 비단 천재지변뿐 아니라 기업 경영 등 각 영역의 위기관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소개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대학 연구교수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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