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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스페인을 꺾고 패권 잡은 비결

한근태 | 268호 (2019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천하의 스페인은 어떻게 무너지고, 영국은 어떻게 패권을 잡았을까? 스페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폐쇄성’이었다. 이들은 유대인을 배척했고, 능력보다는 혈통에 기초한 순혈주의를 고집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영국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방성’이었다. 다른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고 능력만 있다면 해적도 등용했다. 또한 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받아들였다. 스페인의 몰락과 대영제국의 부상은 국가와 기업의 향방을 고민하는 현대인에게 시사점을 준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한때 잘살았던 국가는 왜 몰락했고, 별 볼 일 없던 국가는 어떻게 부흥했을까? 우리가 늘 염두에 둬야 할 관심 분야다. 이는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필리핀은 살기 어려워졌는데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됐던 한국은 어떻게 잘살게 됐을까? 지금의 성장을 지속하려면 어떤 것에 에너지를 써야 할까? 무엇을 보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역사를 보면 된다. 역사학은 곧 미래학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몰락과 대영제국 시대의 개막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해가 지지 않던 스페인의 몰락
스페인은 500년 전 처음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패권을 영국에 내주고 뒤로 물러앉는다. 몰락의 제1 원인은 폐쇄성이다. 1492년 1월2일 스페인은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반도에 둥지를 틀었던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정복 3개월 후 1492년 3월20일, 모든 유대인은 4개월 안에 스페인을 떠나라는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했다.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이때 망명한 유대인 수는 대략 12만∼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유대인 추방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런 폐쇄적인 제도는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1556년의 순혈령과 1558년의 검열법이 그것이다. 유대인 피가 섞인 자는 관직 등에 오를 수 없었다. 능력보다는 혈통을 보고 사람을 썼다.

순혈령 발표 1년 후인 1557년 스페인 정부는 1차 파산을 한다. 돈은 없는데 적은 많고 전선이 복잡했던 스페인은 먼저 프랑스와 화해한다. 그러나 나쁜 일은 몰려서 온다. 다양한 방법으로 세금을 늘리고 함대를 재건했지만 이번에는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네덜란드는 상업이 발달하고 자유가 보장된 사회였다. 당연히 루터의 종교개혁, 칼뱅의 교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네덜란드에서는 칼뱅파 신도들이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왕은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로 보낸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재정의 25%를 부담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잉글랜드 신교도들도 나서서 네덜란드를 도왔다. 스페인 군대는 반란 세력을 압도할 수 없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네덜란드를 잃은 스페인은 급격한 재정난에 빠지고 1575년 두 번째 파산을 선고한다. 다행히 1580년대 대량의 은이 발견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다. 왕조 간 혼인으로 포르투갈을 상속받은 스페인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결정한다. 네덜란드 수복을 위해서는 먼저 잉글랜드를 제압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588년 유명한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결과는 대패였다.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이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북구 신교 세력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1596년 펠리페 2세는 다시 파산을 선언한다.




영국 튜더 왕조의 탄생
영국의 튜더 왕조는 헨리 7세가 창립했다. 헨리 7세는 탁월한 군주였다. 그는 정치에서 민심이 중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크와 랭커스터 두 집안의 오랜 싸움으로 멍이 든 국민을 위해 원수와의 혼인까지 감행한다. 요크 왕조의 적통인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그 상대였다. 둘은 1486년 1월18일 웨스트민스터성당에서 결혼했고, 이를 계기로 붉은 장미가 흰 장미를 품은 형태의 튜더 장미가 탄생했다. 이후 24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혼인이라는 결단으로 전쟁에 지친 국민에게 휴식을 선사했던 것이다. 전쟁 대신 국가의 근본을 바꿀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데 전력했다. 주변 국가와의 선린 외교를 적극 추진했다. 1492년 프랑스와, 1496년 네덜란드와, 1499년 스코틀랜드와 차례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의 신흥 강호 스페인과도 혼인으로 관계를 돈독히 했다. 가톨릭 공동 왕이었던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 캐서린을 왕위 계승권자인 장남 아서와 결혼시켰다. 이 모든 조치는 잉글랜드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고, 튜더 왕조의 위상을 높였다.

무엇보다 헨리 7세는 대영제국 건설을 위한 전략을 세웠다. 이는 2류 국가였던 영국을 19세기 대영제국으로 키우는 토양이 된다.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국가의 주 무대를 대륙에서 바다로 전환했다. 당시 바다와 신대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무대였다. 그는 잉글랜드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 확신했다. 전임자들은 늘 프랑스의 비옥한 땅을 탐냈지만 그는 달랐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거친 바다 너머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왕 스스로 메리포춘, 스웹스타크 등 거대한 배를 건조해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선각자의 면모를 보였다. 항구도시 포츠머스에는 수리시설을 세웠다. 미지를 향한 항해에도 적극 후원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존 캐벗의 항해 후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캐나다를 비롯한 거대 식민지 건설의 기초가 됐다.

둘째, 새로운 지배계층을 육성했다. 장미전쟁 등을 거치면서 대귀족의 수장들이 죽었고 봉건 귀족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의회가 성장한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되자 그는 새롭게 성장하는 농촌의 젠트리와 요먼, 도시 상인을 후원했고, 이들 중에서 관료를 뽑아 국가 운영을 맡겼다. 이는 권력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은 신진 관료들이 과거 귀족들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캐번디시, 세실, 러셀 등 미래 제국을 책임질 영광스러운 가문이 이때 탄생한다.




새로운 종교의 출현
튜더의 둘째 왕은 헨리 8세였다. 차남이었던 그는 장남인 아서의 요절로 왕에 오른다. 만능 스포츠맨,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명예를 중시했고 자부심이 넘쳤다. 권력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그는 형수이자 스페인 왕의 막내딸 캐서린과 결혼한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형수와 시동생 간 결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헨리 7세는 교황을 활용해 형과의 결혼은 무효라는 칙서를 받아낸 후 캐서린과 결혼한다. 일은 요크의 대주교 토머스 울지에게 맡기고 사냥 등에 탐닉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6번이나 임신을 했지만 남은 건 딸 하나, 메리 튜더였다. 그는 짧은 역사의 튜더 왕조를 연약한 여자가 지켜낼 수 없다고 생각해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던 와중에 시녀인 앤 불린을 만나 한눈에 반한다. 그녀는 재치가 있고 대담해 많은 남성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앤은 야망이 컸다. 정부가 아닌 정식 왕비가 되기를 바랐다. 왕의 사랑을 거절했고 육체관계도 거부했다. 왕은 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혼을 결심했지만 이혼이 쉽지 않았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태풍 속에 있었고, 더욱이 이혼 당사자가 막강한 스페인 왕의 막내딸이었다. 교황청을 좌지우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이기도 했다.

결국 헨리 8세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고 영국국교회를 만든다. 왕이 국교회의 수장을 겸하면서 이혼을 감행하고, 끝내 앤 불린과 결혼한다. 그녀의 딸 메리는 계승권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결단이 왕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영국 국민들은 교황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영국국교회의 출현과 종교개혁은 백년전쟁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형성된 잉글랜드의 독자적인 국민 의식이 교황청과의 절연에 찬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으로 1200개 달하는 교황의 직속 부대 수도원이 해산되고 자연스럽게 왕의 차지가 됐다. 당시 수도원은 막대한 토지와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돈이 많아졌고, 왕은 이렇게 차지한 재산의 일부를 새로운 종교와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재산을 받은 사람들은 부자가 됐고 왕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문제는 앤 불린 역시 아들을 못 낳고 딸을 낳은 것이다. 그 딸이 엘리자베스다. 화가 난 왕은 새로운 여인을 찾고 앤 불린은 체포된 후 런던탑에서 목이 잘린다. 세 번째 신부는 앤 불린의 시녀 제인 시모어였다. 헨리 8세는 그녀로부터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얻는 데 성공하고, 그 아들이 훗날 에드워드 6세가 된다. 왕은 이후 세 번이나 더 결혼을 한다. 셋째 부인은 죽고, 넷째는 이혼하고, 다섯째는 참수된다. 오직 여섯째 부인만 천수를 누린다. 그 과정 속에서 궁은 공포의 무대가 됐다. 헨리 8세는 1547년 사망했고,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변치 않는 사실들이 있다. 종교개혁을 이뤘고, 수도원의 부가 밖으로 나왔고, 그 부가 교역과 생산에 투자됐다. 그로 인해 신흥계급이 탄생했다. 무엇보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남겼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스페인 왕의 딸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했다. 어머니 캐서린은 억울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영국에서 먼저 간청을 해서 결혼했다. 장남과 결혼했는데 장남이 죽자 차남인 헨리 8세가 간청해서 다시 한번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들을 못 낳는다고 이혼을 당했다. 이혼 후 딸인 메리 튜더는 어머니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적자가 아닌 서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아버지는 그녀를 아예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만들어버렸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참석을 못하게 했다. 천신만고 끝에 여왕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녀는 세상 변화를 읽지 못했다. 구교 대신 신교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구교로 회귀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 스페인인 펠리페와 결혼을 강행했다. 둘은 원하지만 국민들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원치 않는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둘이 결혼을 하면 영국이 강국인 스페인의 밑으로 들어가야 하고 구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먼 훗날 펠리페는 늙은 메리를 떠나 버리고 1558년 그녀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긴 세월 외롭고 불행하게 살았던 메리의 인생이다.

메리의 출발은 좋았다. 사람들은 메리에게서 온화했던 어머니 캐서린의 모습을 봤다. 전성기 때의 헨리 8세를 느꼈다. 시민들은 새로운 여왕이 희망과 관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시민들은 여왕을 몰랐고, 여왕은 잉글랜드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사회도, 경제도 너무나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경제 권력의 재편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새로운 지배계급을 탄생시켰으며, 그 결과 국가의 중심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특히 런던은 새로운 잉글랜드와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었다. 런던에서 그녀는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
메리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다. 그녀는 위대한 영국의 초석을 닦았다. 앤 불린의 딸이었던 그녀의 삶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다행히 6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의 배려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훌륭한 인문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역사와 철학에 심취했고 고대 로마의 키케로와 리비우스의 책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몸에 밴 공부 습관은 여왕 자리에 오른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개신교에 경도됐다. 그녀는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에드워드와 메리 뒤를 이어 세 번째 순서였고,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런던탑에 갇힌 적도 있지만 21살의 그녀는 침착하고 단호했다. 자신의 위엄을 지켰고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 두 달 만에 살아서 나왔다.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심장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메리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558년 11월17일 마침내 그녀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황금시대의 시작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이었다. 스페인도 호시탐탐 잉글랜드를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내부 분열이었다. 헨리 8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진행 중이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다. 에드워드 6세는 어렸지만 열렬한 개신교였고, 뒤이은 메리 1세는 종교개혁을 중단시키고 구교로 돌아가려 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엘리자베스는 천성이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성장 배경 때문인지 매우 섬세하고 신중했다. 무엇보다 민심을 잘 읽었고, 종교적 화해와 안정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알았다. 즉위하자마자 자신만의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이에 가장 먼저 온건하면서도 친잉글랜드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개신교였지만 가톨릭 교리와 전통의 일부를 수용했다. 국교를 따랐지만 가톨릭과 청교도도 인정했다. 종교가 국가를 분열시키면 안 되고, 종교가 분란과 불행의 원인이 돼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녀의 리더십 덕분에 왕국은 서서히 종교적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는 타고난 통치자이며 능숙한 정치가였다. 목표는 생존이었고, 살아남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는 국민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국민은 화합, 안정, 질서, 번영, 자유, 희망을 원했다. 그녀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종교 정책 다음은 경제 정책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헨리 8세의 해양 정책을 이어받았다. 당시 바다는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제국은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두고 세계 교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식민지에서 금광과 은광을 발견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영국이 함부로 스페인에 도전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이에 따라 영국 왕실은 스페인 감시가 소홀할 때를 틈타 해적을 지원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은 공공연하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보물선을 약탈했다. 스페인은 영국에 드레이크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를 처벌하는 대신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스페인에 대한 도발이었다. 스페인에게 영국은 저지대 국가와의 연결고리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컸다. 카를 5세가 후계자인 펠리페를 11살이나 많은 메리와 결혼시킨 것도 잉글랜드를 손에 넣으면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메리가 죽자 펠리페가 그녀의 동생이자 자신의 처제인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568년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더욱 그랬다. 잉글랜드를 가만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588년 리스본을 출발해 잉글랜드로 향한다.

그러나 영국은 드레이크를 믿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배보다 날렵하고, 스페인 배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긴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도 자체 선박 24척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선박까지 총 200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부사령관으로 이 영국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결국 템스강 입구에서 파르마 공작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나온 스페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빠르고 사정거리가 긴 해적의 대포에 스페인 부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영국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대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천하의 스페인은 어떻게 무너지고, 영국은 어떻게 패권을 잡았을까? 먼저, 스페인은 고급 인력을 몰아냈다. 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을 몰아냈다. 쫓겨난 유대인들이 저지대 국가에 정착하면서 그 동네를 등지게 됐다. 또 순혈주의를 고집했고, 종교로 사람을 차별하고 못살게 굴었다. 반면 영국은 국가의 방향성이 명확했다. 대륙 대신 바다로 나아가기로 결정했고, 유능한 사람이라면 해적에게도 귀족 작위를 줬다. 종교적 차별은 최소화했다. 현재 우리는 어떤가? 좋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가? 혹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방향성은 명확한가? 이 책을 보면서 고민해볼 만한 주제다.


필자소개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런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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