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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인문 정신과 경영

“멋대로 해라” 노자, 자발적 생명을 가르쳤다

최진석 | 109호 (2012년 7월 Issue 2)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유행 혹은 흐름 가운데 하나는 바로인문학 열풍일 것이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현상이자 사건이다. 한국 사회가 비로소독립적 주체로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제도권 대학 내에서는인문학의 위기라고 아우성인데 사회에서는인문학의 열풍이니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항상 소수가 다수를 전복해가고 주변이 중심을 공격해가는 과정의 흔적이다. 인문학을 중심에 놓고 봤을 때 주변의 입장이었던 사회가 인문학의 중심이었던 대학의 역할을 대체하려고 한다. 문명의 변화를 보여주는 코드로 읽을 수 있다. 새로운 흐름이 일어날 때 그 흐름을 담지 못하는기존의 것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는 그룹은 상식적으로는 돈 버는 일에만 열중하고 인문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기업가들이다. 어째서 정치인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고, 대학도 아닌 기업에서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서 지금보다 나은 이윤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기업인들은 매번 하는 판단이나 결정이 즉시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해버리는 경계에서 긴장하며 산다. 자신의 생존 여부에 대한 질문 앞에서 고도의 예민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고도의 긴장이 고도의 예민함을 유지하게 하고, 그 예민함이 민감한더듬이를 갖게 하고, 그 더듬이가 감각적 통찰을 부여한다. 상인들은 감각적으로 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아주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이 변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면 성공할 것이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정을 하면 망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이 질문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분야이다. 기업에서 먼저 인문학을 요청하는 이유이다. 인문(人文)은 말 그대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이다. 인간이 세계에 그리는 무늬와 결을 인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한다면 인간의 동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동선을 파악한다는 것은 문명의 흐름을 읽는다는 말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한국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듣는 화두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다급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는 상상력이나 창의성 없이도 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상상력과 창의성 없이는 지금 같은 정도의 성장을 유지하는 일이 어렵게 됐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상상력과 창의성 없이도 지금까지 먹고 살았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다는 말인가? 간단히 말해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해서 만든 어떤내용대신’, 혹은따라서수행하는 일로 먹고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미수행하는 역할로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내외적 조건상 한국도 문명의 흐름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선진국에서 내려주었던 문명의 흐름에 대한 비전과 메시지를 대신 혹은 따라서 수행했지만 이제는 문명의 흐름에 대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승부를 걸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문명의 흐름을 읽고 문명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보는 힘을 상상력이라 하고 상상의 힘을 발휘해 문명이 나아갈 방향의 조금 앞에 서보는 일을창의라고 한다. 기업인들이인문의 필요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1. 리더는 조짐을 포착하는 사람

길을 가다가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채 화장을 하고 귀고리를 한 남자를 만났다고 하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좋다’, 다른 하나는나쁘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리더로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다. 리더란 한 집단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자기 삶의 주인인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좋다 혹은 나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은 자기에게 이미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근거로 한 정치적 판단을 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정치적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는 그 판단을 하는 기준으로서의 가치관이 주인이지 자기 자신은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다. 리더는 마주하는 사태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무슨 변화가 있길래 이전에는 없었던 저런 일이 가능해 졌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춘 사람이다.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질문을 한다. 질문을 통해서 리더는 눈앞에 나타나는 사태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고 세상 흐름의 정체를 보여주는조짐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리더는조짐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문적 통찰이 작동하는 모습이다.

 

2. 인문적 사유는 독립적 주체에게만 가능

그렇다면 그동안 상상력과 창의성이 개입된 인문적 통찰은 왜 그리 더뎠는가?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 그리고 가치관 등으로부터 독립돼 나올 수 없다면 줄곧 정치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성공 경험이다. 성공의 기억이 그 사람을 그 기억 속에 가둬 버리기 때문이다. 그 기억과 함께 그 사람은 시멘트처럼 굳어버린다. 역동적으로 변화해나가는 이 세계에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신념의 장치로는 적절하게 반응할 수 없다.

 

인문적 사유,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와 직접 대면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에게 있는 신념이나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자기로만 존재해야 정치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人文]을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문적 통찰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3. 노자와 공자, 최초의 철학자들

인간은 생각을 하면서 신으로부터 독립한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을 최초의 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철학은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면서 시작된다. 철학을 통해서 인간은스스로인간이 된다. 서양에서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부르면서 최초의 철학자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탈레스는 이 세계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했다. 신의 뜻으로 이 세계가 이뤄졌다고 믿던 당시의 모든 사람들과 달리 탈레스는 이 믿음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생각하는 능력에 의존해서만 이 세계가 물을 근원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해했다.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 세계와 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를 최초의 철학자들이라고 한다. 그것은 서양에서 탈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노자와 공자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신이 결정했다고 하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들만의 생각하는 능력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신의 명령을 중국인들은천명(天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철기가 발명된 후 그것이 산업에 투입되자 계급 변동부터 시작해 사회 전체가 기존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다. 세상은 새로운 사회 경제적 조건이 맞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대혼란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자 그것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던 힘이었던 하느님 자체를 의심했다. 결국 하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 하늘이 의심되고 인간에 의해 포기되자 세계에는 인간만이 남게 되었다. 하늘이 사라지고 인간만이 남게 된 세상에서 인간은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시대적 문제의식을 안게 된다.

 

천명(天命)이 극복의 대상이 돼버린 것은 천명을 정점으로 해서 이뤄졌던 세계관이 철기의 발명 이후 새롭게 진행되는 사회 경제적 변화 조건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명이 지배적 권위를 가질 때 인간은 하늘이 만들어 놓은 길을 잘 알아내고 살펴서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하늘이 만든 그 길을 어떻게 하면 잘 따를 것인가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명이자 삶의 의미였다. 하지만 천명이 권위를 상실한 춘추 말 전국 초 시기의 중국인들은 새로운 시대적 과업 앞에 서게 된다. 즉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인간을 초월한 어떤 힘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만의 힘으로 건립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바로 그 길을()’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한다.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한다. ‘의 출현은 바로 중국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오는 인간의 독립선언이었다.

 

천명론을 극복해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최초의 철학자로 노자(老子)와 공자(孔子)가 있다. 모두 춘추(春秋) 말에서 전국(戰國) 초 사이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공자는 공자식의 혁명적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 공자 이전의 사람들은 아마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하늘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런 믿음을 과감히 거부하고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간을 초월해 있는 어떤 절대적 힘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해버리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이라고 했다. 공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하늘의 뜻을 어떻게 잘 따를 것인가 하는 사명 대신에 인간의 본질인 이을 어떻게 잘 보존하고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하는 새로운 사명을 가진 존재가 됐다. 공자에게서 인간은 이제 하늘의 은총을 비밀스러운 풍경 속에서 각자 다르게 받은 존재가 아니라 이라고 하는씨앗을 공통의 기반으로서 공유하는 투명하고 개방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

 

4. 노자, “모든 가치는 중립적

공자는 인간을 보편적 본질을 공유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 본편적 본질이 그에게는 인()이었다. 보편적 본질을 긍정한 공자는 그 보편적 본질이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도록 만들어 진 예()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한다. 예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에게는 선()의 정점으로 인식된다. ()으로 인정되고 합의된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가치 체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 보편적 가치 체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는 미숙의 상태로서의 개별적 자아()이다. 개별적인 자아는 성숙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로서 이해된다. 이런 구조에서 인간은 개별성과 결별하고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 속으로 편입돼야 한다. 비유하자면 고유명사 차원에 있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성장시켜 일반명사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공자는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표현한다. 예라고 하는 이데올로기 혹은 교화시스템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은 그 예를 하나의 기준이나 표준 혹은 이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자는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며,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며,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論語·顔淵>)”고 하였다.

 

이 예는 전체 사회가 모두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공자가 건설하려고 했던인간의 길이다. 노자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하면서 자기식의인간의 길을 건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셸 푸코라고 하는 현대의 서양 철학자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다. 푸코는본질이나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으로 행사돼 결국 이 사회를구분하고배제하고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질주의적인 근대를구분’ ‘배제’, 그리고억압이라는 틀로 정리하고 있다. 본질의 내용이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인 한에서는기준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기준인 한 사회를 구분하고 차등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가 건설한인간의 길라고 하는 절대 기준을 상정하는 한 결국은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고 하는 부정적 현상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

 

<도덕경> 2장에 실려 있는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공자의 이런 발상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이 구절을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미와 추, 선과 악을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추함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있게 되고, ()이 있으니 악()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 통일해야 한다고 보는 공자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다. 여기서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안다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되어진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공통의 본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해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아름다움이다.

 

유행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로 머리를 물들인다. 처음에는 주로 노란색 계열로 물을 들였다. 모두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한국에서 처음에 누군가가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면 그것은 대단한 파격이다. 어색한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면서도 막상 호감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한두 명이 추종해 따르게 되면 처음에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점점 신선하게 보인다.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마침내는 유행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머리 염색이 유행으로 자리 잡는 순간, 그것은 바로 권력이 되고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그리하여 유행을 따르는 부류와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부류로 나뉘고 유행을 따르는 부류는 우월감을,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감과 그 유행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다.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확고한 유행일 때 많은 사람들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채로 외출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머리 염색이 미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유행이 이데올로기화해 따르지 않으면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나 노란색을 아름답고 신선하게 보는 것은 그렇게 보도록 강요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겠는가? 미셸 푸코의 견해를 빌려서 말한다면 머리 염색이 유행이 돼 기준이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머리 염색은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장치로 성장해버린다.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공자식의 문명에서는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들을 모두 그곳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보편화된 이념내지체계는 그 내용의 善惡 여부와 관계없이기준혹은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집단적으로 행사되는 거의 모든 폭력은으로 위장되고 있지 않은가?

 

5. 작은 것이 아름답다

어떤 특정한 이념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면서 기준으로 사용하는 일은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노자는 비판했다. 가치론적 기준을 근거로 한다면 결국 비효율에 빠지게 되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자가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에는 가치론적 기준이 작용하지 않고 그 기준이 목적으로 상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론적 기준을 보편적인 틀로 사용하지 말고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것을 권한다. 그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뜻이다.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론적인 이념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적 가치로 합의된()’를 기준으로 하고 그에 일치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이념을 주장하는 공자의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들에게는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념도 없고 세계와 관계할 때 사용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 기준도 없으며 내용적으로 정해진 분명한 도달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보편적인 이념의 형태로 행사되는 기준이 없는 한, 개별자들이 각자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권리는 매우 탄력 있게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인 세계에 사는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한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해서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무위(無爲)’라고 표현한다. 삶을 영위하는 어떤 사람이반드시 어떠어떠해야 한다거나바람직함이라는 당위의 굴레를 벗어나서 아무런 기준이나 목적성의 제어를 받지 않고 하는 자발적 발휘를 말한다. 기준이나 목적의식을 덜고 또 덜어내고,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고 나면 결국무위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쉽게 말해 일정한 틀에 의하지 않고 멋대로 하는 상태이다. 사람들이 모두 멋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준이나 일정한 틀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멋대로 하게 되면 바로 비도덕적 혼란의 상태로 빠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을 하겠지만 노자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37)

 

멋대로 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사회도 비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저절로 교화되고,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저절로 부유해지고, 저절로 소박해진다(<도덕경>57)”고 본다. 통치자는 백성들이 각자 제멋대로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제 멋대로 하는 것이 주가 되면 위에서 특정한 기준을 강요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는 존재의 의미가 희박해 질 것이다.

 

“최고 수준의 통치 단계는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아는 것이지”(太上, 下知有之. <도덕경>57)

 

통치자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단계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직이나 사회를 관리하는 사람이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러면 모두 각자가 제멋대로 하면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휘해 그 조직이나 사회를 오히려 생동감 있는 강함으로 채워줄 수 있다. 제멋대로 하게 해준다는 말은 자발성을 북돋운다는 말과 같다.

 


보편적 이념의 틀은 모든 사람들에게 원래부터 갖춰진 것으로 인식되는 이성에 의해서 지탱된다. 멋대로 하는 힘은 각자의 욕망에서 나온다. 공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인 성인들이 만들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공인된바람직한 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좋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그렇지 않다. ‘바람직함보다는 자기가바라는 일을 하고해야 하는 일보다는하고 싶은 일을 하며좋은 일보다는좋아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적 이성보다는 개별적 욕망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사회나 조직이 보편적 틀을 수행해야 하는 엄숙주의의 지배를 받는 한 생동감이나 자발적 창의성은 고갈돼 조직 자체가 경색될 것이다. 노자의 시각에 의하면 국가나 사회, 혹은 기업 조직이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도권이 구성원들의 자발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자발성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을 이뤄야지 조직이 갖는 이념의 틀에 개별적인 각자가 맞춰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삶의 주도권이나 삶에 대한 의미의 확인이 정해진 틀 안에서 이뤄지면 안 되고 각자의 생활 속에서 확인이 돼야 한다. 각자의 생활은 이성보다는 욕망의 충동에서 힘을 받는다.

 

노자가 보기에 조직이나 사회의 건강성은 개별적인 각자가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부여받고 얼마만큼의 자발적 생명력이 허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거대 사회나 거대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드러내기 어렵다. 모두 익명성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 속에 존재하는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기는 존재의 가치를 부여받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다. 단지 부속품으로만 존재한다고 느낄 것이다.

 

노자는 개별자들을 자신의 고유명사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나 조직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실현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속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의 고유한 생명이라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사회가 강하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노자는 조직을 작은 단위로 쪼개서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 거대한 조직이나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은 익명성으로 존재한다. 구성원들이 고유한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으려면 작은 단위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작은 단위 속에서 인간은 익명성의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존재하게 된다. 거기서 인간은 보편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욕망을 실현하는 매우 자발적인 존재로 재탄생될 수 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존재로 살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비로소 움을 틔운다.

 

노자는 사회나 조직의 이런 작은 단위을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자의 기획은 조직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돌려주자는 것이다. 보편으로부터 해방돼 고유한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확인시켜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사회가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서 감성의 세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6. 인문적 통찰의 힘

인문학 공부는 고시공부와 다르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문적 활동으로 움직여야 한다. 인문적 통찰의 힘을 기르는 것이 인문학의 목적이다. 통찰을 위해서 해야 할 준비가 인문학 지식의 축적인데 준비를 하다가 목적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도 보는 법을 배우는 일에 세월을 보내고 정작 길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안 된다. 수단으로 쓰기 위해 가공해 만든 지식과 이념이 삶을 주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조직을 관리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이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죽은 자가 산 자를 리드하도록 내버려 두는 꼴이다.

 

노자는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경구를 통해서 저곳에 있는 이념으로 현실을 관리하지 말고 이곳에 있는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문제를 직접 생산하라고 말한다.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말한다. 믿음을 구현하려 하지 말고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념의 실천가가 되지 말고 자발적인 생명력이 되라고 말한다. 집단 속에 용해되지 말고 네 자신으로 우뚝 서라고 말한다. 사회를 혁명하려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먼저 혁명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되지 않은 일이 없을 것(無不爲)이다. 이것이 노자의 인문 정신이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는 노장(老莊) 철학 전문가로 서강대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대에서 도가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방문학자, 토론토대 동아시아학과 방문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2011)> 역서로는 <장자철학(1998)> <노장신론(19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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