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의 도학정치
1. ‘이름 그대로’ 한사코 물러나는 퇴계
1567년 명종이 죽고 십대의 소년 왕 선조가 즉위했다. 선조는 서울에 머물던 퇴계 노인에게 무너진 교육을 세우고 타락한 풍속을 바로잡아 달라는 뜻에서 예조판서를 맡겼다. 그러나 퇴계는 한사코 사양했다. “나는 내 집 도산(陶山)으로 가려네.” 그러자 안팎으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어째 자기 일신의 안일만 도모하느냐는 안타까움에다, 산속에만 박혀 있겠다니 무슨 산새[山禽]냐는 힐난까지 무성했다. 그를 존경한 철학 논객 기대승조차 퇴계 어르신이 진퇴(進退)에 있어, 즉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과연 올바른 대의(大義)를 따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섭섭함을 표했다.
당시 이조좌랑이었던 서른 초반의 젊은 율곡은 퇴계의 소매를 붙들고 간곡히 만류했다. 명종 재위 시 외척 윤원형의 득세와 함께 불어닥친 을사사화의 칼바람과 권력의 전횡, 그 앞에 무참히 꺾인 선비들(士林)의 기상을 북돋우고 무너진 풍속을 일으킬 정신적 지주는 오직 퇴계 당신뿐이라는 것이었다.
“할 일은 많고 어려움이 산적한 이때, 물러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십니다.”
“도리는 아니지, 그렇지만 몸은 늙고 병든데다 무엇보다 나는 그릇이 아니야.”
“시무(時務)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처리할 일이고 어르신은 경연(經延)에서 조정의 원칙과 규범을 잡아주시기만 해도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아니야, 내 재주로는 이익이 남에 미치지 못하고 내 몸에 절망만 더해질거야.”
마침내 퇴계는 도산으로 퇴거해버렸다. 사림과 조정의 낙망은 컸다. 이듬해에도 율곡은 간곡한 편지를 올렸으나 퇴계는 못 들은 척했다. 다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통해 자신의 충정을 전했을 뿐 그 후 몇 번의 서울 나들이가 있었지만 종내 산림에서 문을 닫고 지냈다.
2. 늘 나아가는 율곡
1583년 율곡은 죽기 1년 전, 병마와 싸우면서도 병조판서를 맡았다. 그해 겨울 북방에 여진족들이 군사를 몰고 변방을 어지럽혔다. 북도병사(北道兵使) 이제신이 북방의 효율적 방위책 20여 개 조를 진언하자 선조는 이를 검토해보라고 조정에 보냈다. 모두들 어찌할 줄을 몰랐다. 군사에 대한 식견이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문장이요, 천재라는 유성룡도 붓만 끄적거릴 뿐 종내 초안을 잡지 못했다. 박순이 나서서 병조판서를 불러 의논해보자 하니 모두들 그게 좋겠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율곡이 들어와 붓을 잡으면서 모두들 의견을 개진하면 요약 정돈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율곡은 이제 신의 건의를 조목조목 차례로 따지면서 가부를 결정, 바로 초안을 잡아 내려갔다. 일은 금방 끝났다. 그 초안을 돌려 보면서 아무도 말이 없었고 한 글자의 수정 없이 그대로 임금에게 전해졌다. 선조는 한눈에 율곡의 작품임을 알아보았다. 박순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율곡을 뜻은 크고 재주는 소활하다고 했는가. 그 재주를 써보지도 않고 어떻게 함부로들 평하는가. 내가 그 시행하고 조처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어려운 난제라도 조용히 밀고나가는 것이 구름이 허공을 건너가는 듯 흔적이 없으니 참으로 희귀한 자질이다.”
이듬해 겨울, 율곡의 병이 깊어졌다. 북방의 순무(巡撫)를 맡은 서익이 부임인사차 찾아오자 방략의 조언을 해줘야겠다면서 일어났다. 모두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붓을 잡을 힘이 없어 아우에게 받아 적게 했다. <육조방략여서어사익(六條方略與徐御使益)>,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됐다. 다 불러주고 난 후 극도의 피로로 혼절했다.
3. 성숙한 인격에서 건전한 판단력이 나온다
퇴계가 학자형이라면 율곡은 관료형이다. 그러했기에 퇴계는 주변의 권고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물러나고자’ 했고 율곡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사코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펴고자 했다.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간 데는 현실 정치적 환경도 크게 작용했다. 퇴계는 연산군 이래 지속된 사화(士禍)의 암울한 시대 속을 살았다. 문정왕후와 외척 윤원형이 선비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독점했던 그 시절에 퇴계는 형을 억울하게 형장(刑杖) 아래 잃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를 지내온 사람이 정치에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율곡은 달랐다. 명종이 죽고, 직계가 아닌 선조가 왕위에 올랐고, 새 임금은 이전과는 다른 청신한 정치를 하고 싶어 선비들을 중용했다. 앞에서 율곡이 퇴계를 향해 “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한 속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퇴계는 물러나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 유성룡 등 제자들은 선조가 퇴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권신들의 전횡이 여전했기에 “뜻을 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퇴계 자신의 술회를 존중한다. 실제 그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것은 정치보다 학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퇴(退)’를 다짐하며 이렇게 읊었다.
“몸이 물러나니(退) 내 분수에 적합한데 공부가 뒤처졌으니(退) 그게 걱정이다.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선조의 곁을 떠나면서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남겼다. “군주를 성자로 만들기 위한 열 개의 그림”이다. 오래된 유학의 이념을 따라 퇴계는 군주가 자신의 사적 욕망과 관심을 탈피하지 않으면 올바른 정치가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 철저했다. <성학십도>는 바로 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자기 성찰과 훈련’을 담고 있다. 선조는 퇴계의 충고를 따라 이 그림들을 병풍으로 만들어 일상의 거처에 두고, 또 작은 책 한 질은 따로 만들어 들추어 볼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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