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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9

“운명의 신은 여신이다 신중함보다 과단성에 더 끌린다”

김상근 | 108호 (2012년 7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체사레와 마키아벨리의 우정
 
‘마키아벨리즘’은 마키아벨리가 추구했던 정치철학이 아니라 체사레 보르자가 ‘마조레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냉혹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체사레의 행동을 지켜봤다.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을 교묘한 방식으로 굴복시키고 단숨에 그들의 목을 잘라 버리는 체사레의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들’에게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체사레는 거느리고 있던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됐다. 마키아벨리를 더욱 감탄케 한 것은 이런 격동의 순간에서도 체사레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르비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체사레는 마키아벨리를 협박하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몰라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체사레는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피렌체의 대사 마키아벨리를 마치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했다.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정리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이면서 마키아벨리와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으니 피렌체도 힘을 합쳐서 연합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체사레는 비밀문서인 프랑스의 후원보증 각서까지 직접 보여주며 마키아벨리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피렌체 정부가 마키아벨리에게 맡긴 임무는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지 시간을 끌면서 체사레의 칼날이 피렌체로 향하지 말도록 지연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약 4개월 동안 마키아벨리는 여러 악조건을 견디면서 체사레와의 협상을 이어갔다. 언제나 고전(古典)을 통해서 지혜를 구해왔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 편지를 보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한 권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외교적 협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연구와 관찰의 대상으로 봤다.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를 빛낸 영웅들의 덕목을 체사레 보르자와 비교하는 정밀한 학문 작업에 들어갔다.
 
체사레와의 협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 마키아벨리는 심한 전염병에 걸려 몸져누웠고 막 결혼식을 올렸던 아내는 장기간 출장으로 집을 비웠던 새신랑 마키아벨리에게 불평을 터뜨렸으며 피렌체 행정부가 지불했던 쥐꼬리 같은 출장비는 마키아벨리의 타지 생활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체사레는 마키아벨리를 돈으로 매수하기 위해 뭉칫돈을 떼어주겠다고 유혹했다. 이중 스파이가 되란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몰라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체세나, 파노, 코리날도, 사소페라토, 페루자, 아시시, 토르차노로 이동하면서 계속됐다. 체사레가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로마냐 지방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도 체사레의 군대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프랑스에서 국왕을 따라다니던 신세가 이탈리아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체사레의 갑작스런 몰락
 
영웅 체사레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졌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모기 한 마리 때문에 빗어진 운명 때문에 찾아왔다. 1508년 여름, 그해 로마는 유난히 더웠다. 살인적인 더위는 로마 시궁창의 물을 쉬 썩게 만들었고 이 더러운 물에서 부화한 한 마리의 학질모기가 체사레를 물었을 때 그는 쇠락의 첫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508년 8월, 말라리아로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은 보르자 가문의 사람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조카였던 후한(Juan) 추기경이었다. 조카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연신 땀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달은 뚱뚱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야!” 후안 추기경만큼이나 뚱뚱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걱정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후안 추기경이 8월1일에 죽었는데 알렉산데르 6세도 같은 달 18일에 임종했다. 자기 아버지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던 날 체사레는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혼수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임 교황이 서거하고 새 교황이 선출되는 기간 동안 로마에서는 아수라장이 벌어지곤 했다. 전임 교황이 남긴 재산을 노리는 폭동이 일어났고 다음 교황 자리를 노리는 유력한 후보 추기경의 무력시위도 벌어졌다. 체사레는 혼미한 정신 상태에서도 심복을 보내 아버지의 비밀금고에 담겨 있던 금은보화를 확보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체사레는 10만 두카토의 현금과 20만 두카토 상당의 보석을 가로챌 수 있었다.
 
체사레는 아버지가 남긴 현금과 보석을 챙기는 데 성공했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정신을 챙기지 못함으로써 갑작스런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격동의 와중에 체사레의 몰락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키아벨리다. 피렌체공화국은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서거하자 마키아벨리를 로마로 급히 파견했다. 새 교황이 선출되는 과정에서 피렌체의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련한 외교관을 로마로 보낸 것이다. 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던 날 로마에 체류 중이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곁에 있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그때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던 날 발렌티노 공작(체사레)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즉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생각해 뒀으며 또한 거기에 대한 대책도 세워 놓았는데 단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도 병에 걸려 같이 죽게 될 운명만은 예견하지 못했다고.”1
 
 
늑대를 피하자 호랑이를 만나다
 
자기 아버지를 이을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체사레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체사레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프랑스나 에스파냐 출신 추기경을 밀지 않고 자신에게 섭섭한 감정을 품고 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을 다음 교황으로 지지해 버린 것이다. 체사레의 막후 지지를 받고 교황으로 선출된 이 교황이 바로 ‘전사(
戰士) 교황’으로 불리는 율리우스 2세(1503-1513년 재위)다.
 
체사레 못지않게 냉혹하고 체사레를 능가하는 야심을 품고 있던 율리우스 2세는 전임 교황 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다음 교황자리를 놓고 체사레와 거짓 흥정을 벌였다. 교황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준다면 로마냐 지방 전체의 통치권을 체사레에게 통째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체사레는 율리우스 2세가 지금까지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프랑스의 지지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다투던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율리우스 2세의 기만 작전에 속아 넘어간 체사레는 지지성명을 발표하면서 자신을 따르던 프랑스와 스페인 추기경들에게 율리우스 2세를 찍으라고 명령했다. 결국 율리우스 2세는 다음 교황으로 선출됐고 마키아벨리의 예상대로 신임 교황은 체사레를 배신한다. 교황으로 취임한 후 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와 체결했던 계약을 폐기하고 그를 반역혐의로 체포해 버렸다. 로마에서 새 교황이 선출되는 긴박한 과정과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를 곁에서 지켜봤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실수를 이렇게 지적했다.
 
“위인들 사이에서는 지난날의 원한이, 새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깨끗이 씻어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2
 
마키아벨리는 교황 율리우스 2세라는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늑대를 피하고 나니 이제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구나! 체사레가 늑대였다면 율리우스 2세는 호랑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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