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끝 15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여인
1743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유족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 Medici, 1667-1743)가 임종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은 역사의 뒷무대로 조용히 사라졌다. 모직산업을 일으켜 당대 최고의 부(富)를 축적하고 유럽 최대의 은행을 운영했던 메디치 가문은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해 종교명문가가 됐고,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해 왕족 가문이 됐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에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고 했던가. 메디치 가문도 끝내 막을 내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하게 된다.
안나 마리아는 생애 말년에 아주 험한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군대를 동원한 불면식의 외국인들이 피렌체 정부를 접수하고, 메디치 가문의 전통에 모욕을 가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무능했던 아버지 코시모 3세가 죽자(1723년), 안나 마리아는 가문의 권력과 명예가 빠른 속도로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마지막 명예를 지켜가던 안나 마리아에게 남아있던 유일한 기쁨은 조상들이 대대로 수집해 왔던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15세기의 현자(賢者) 코시모 데 메디치가 도나텔로에게 의뢰해서 만든 조각품들,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니 톤도>,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브론지노(Bronzino, 1503-1572)가 그린 메디치 가문의 초상화 등을 특히 좋아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 안나 마리아는 그 걸작 예술품들 앞에서 위대했던 조상들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중산층 모직업자로 출발했던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8)부터, 이탈리아의 국부(國父)로 불렸던 코시모(1389-1464), 이름 그대로 ‘위대한 자’로 칭송받았던 로렌초(1449-1492), 격동의 16세기 가톨릭 역사를 이끌었던 두 명의 메디치 교황, 레오 10세(1475-1521)와 클레멘스 7세(1478-1534), 토스카나의 대공(Grand Duke)으로 즉위했던 코시모 1세(1519-1574), 프랑스의 여왕으로 16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작품들이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모두 메디치 가문의 찐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걸작 예술품들은 모두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에 소장·전시돼 있었다. 안나 마리아는 이 바사리 통로를 걸으며 위대했던 가문의 문을 닫기로 결심하게 된다.
바사리 통로에서 세상과 단절되다
메디치 가문은 채 3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가문의 문을 굳게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세계 최고의 부를 축적한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며 두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위대했던 가문이 왜 4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했을까? 메디치 가문이 갑자기 몰락한 이유는 바사리 통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Grand Duke)으로 정식으로 등극했던 코시모 1세(1519-1574) 때의 일이다. 그는 15세기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가문의 위대한 조상,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와 전혀 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늘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던 15세기의 국부(國父) 코시모와는 달리 16세기의 대공(大公) 코시모는 권력을 독점한 황제처럼 거들먹거렸고 독재자의 철권정치로 피렌체를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나폴리 총독의 딸이었던 엘레오노라(Eleonora di Toledo, 1522-1562)와 정략 결혼했다. 스페인과 나폴리로부터 엄청난 결혼 지참금을 가져 온 엘레오노라를 위해서 코시모 1세는 아르노 강 남쪽의 피티 궁전(Palazzo Pitti)을 매입(1549년)해 웅장한 왕실 건물로 재건축한다(1553년). 지금 우피치 미술관과 함께 피렌체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된 피티 궁전이 바로 코시모 1세가 아내 엘레오노라를 위해 마련한 메디치 대공 가문의 왕궁이다. 코시모 1세 부부는 새로 건축한 피티 궁전에 입주하고 장남 프란체스코에게는 자신이 거처로 사용하던 베키오 궁정(Palazzo Vecchio)을 물려줬다. 프란체스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드 1세의 딸이었으며, 스페인의 황제 카를 5세의 조카이기도 했던 요안나(Joanna of Austria, 1547-1578)와 결혼했고(1565년), 코시모 1세는 새로 맞은 왕가 출신 며느리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 궁정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돈이 되면서부터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코시모 1세는 피렌체의 시민들로부터 점점 격리돼갔다. 그는 피렌체에서 황제처럼 행동했고 가혹한 세금으로 시민들을 몰아붙였다. 1565년, 코시모 1세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 부부가 사는 베키오 궁정에서부터 자신의 왕궁인 피티 궁전까지를 연결하는 전용 비밀 통로를 설치토록 한 것이다.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 궁정에서 시작되는 이 비밀주랑(柱廊)은 정부청사(현재 우피치 미술관)를 거쳐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 위를 지나 강 건너 편 언덕의 피티 궁전에까지 이르게 된다.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로 불리는 이 비밀주랑은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메디치 가문의 전용 도피통로로 설계됐다. 그래서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는 있지만 반대로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때부터 메디치 사람들은 바사리 통로에 설치된 비밀스러운 창문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폭군처럼 군림하는 강압적인 리더도 모자라 시민들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감시자가 된 것이다.
전용 피트니스 센터로 변한 바사리 통로
바사리 통로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메디치 가문이 세상과 단절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채 가혹한 방식으로 거둬들인 세금으로 향락만을 즐기는 탐욕스러운 가문으로 전락한 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15세기의 국부(國父) 코시모나 그의 손자였던 ‘위대한 자’ 로렌초가 추구하던 피렌체 ‘제1 시민’으로서의 리더십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세상과 단절된 채 폐쇄적인 성격이 강화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르네상스의 창조 정신을 견인하던 긍정적인 세계전망은 사라졌고 개인의 향락 추구만이 일상사가 됐을 때 피렌체의 위대했던 가문도 쇄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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