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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파 周 선왕도 자만심엔 졌다

김영수 | 44호 (2009년 11월 Issue 1)
밤새 집무실 앞을 밝히는 화톳불
<시경> ‘소아’ 편에 ‘정료(庭燎)’라는 제목의 시가 나온다.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한밤중인데
뜰에서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뜰에는 화톳불이 여전히 타고 있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이제 막 날이 새려고 하는데
뜰의 화톳불은 깜박깜박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깃발이 보이네
 
이 시는 천신만고 끝에 왕으로 옹립돼 주(周)나라 왕실을 재건한 선왕(宣王)을 칭송한 노래다. 백성의 언론을 통제하고 충직한 신하들의 충고를 외면하다 결국 반란군에게 쫓겨나 외지를 전전하다 쓸쓸하게 죽은 주나라 여왕(동아비즈니스리뷰 42호 참조)의 아들이 바로 선왕이다.
 
시인은 밤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는 선왕의 고뇌에 찬 모습을 뜰 앞에 밝혀놓은 화톳불이 점점 꺼져가는 모습에 투영했다. 선왕은 나라 안팎의 일 때문에 신하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집무실에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행여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혹시 제후들이 조정에 드는 것은 아닌지 정신을 가다듬길 몇 차례. 결국은 제후들이 나올 때까지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여기서 ‘뜰에 밝힌 화톳불(또는 횃불)’이라는 뜻의 ‘정료(庭燎)’라는 유명한 성어가 나왔다. 이는 훗날 춘추시대 초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자신의 집무실 앞뜰에 24시간 불을 밝혀놓고 인재를 맞이했다는 ‘정료지광(庭燎之光)’이라는 고사성어로 발전했다. 이렇듯 선왕은 아버지 여왕이 망쳐놓은 주 왕실을 다시 살리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백성들의 폭동 당시 태자였던 선왕은 아버지가 쫓겨난 뒤 조정 중신인 소공(召公)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소공의 집을 포위한 채 태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소공은 자기 아들을 태자로 속여 내주고 그 틈에 선왕을 도망치게 했다.
 
선왕은 그 후 소공과 주공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공화(共和) 시기를 14년이나 겪은 다음, 아버지 여왕이 체라는 곳에서 죽자 제후들의 추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재기를 넘어 중흥을 이루다
선왕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다. 특히 아버지 여왕의 폭정이 가져온 엄청난 후유증과 즉위 초 몇 년째 계속된 가뭄으로 아버지의 죄과가 후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통감했다. 그는 주나라 왕실의 재건과 주나라의 중흥을 위해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한 소공을 비롯해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중산보, 윤길보, 정백휴보, 괵문공, 신백, 한후, 현보, 남중, 방숙, 잉숙, 장중 등과 같은 인재들을 대거 조정에 포진시켜 지치고 불안해하는 백성들을 다독거렸다. 주나라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국정의 불안이 지속되고 가뭄이 거듭되는 가운데 주변 소수 민족들도 주나라를 유린하려 했다. 내우에다 외환까지 겹친 상황에서 선왕은 인재를 발굴하고 적절하게 역할 분담을 시키는 한편 군대 정비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을 기용하고 작전권을 대폭 위임해 마음 놓고 적들을 물리치게 했다. 남중과 윤길보는 이렇게 해서 두각을 나타낸 대표 명장들이었다.
 
군대를 가다듬은 선왕은 서방의 엄윤 부락을 물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남방의 강국 초나라, 회하 유역의 회이 등과 같은 주변 강국과 소수 민족들을 평정해나갔다. 주변 소수 민족을 제압해나가자 그동안 이탈했던 제후들도 다시 끌어모을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외숙부나 아들 등 측근들을 사방으로 보내 봉국을 만들어 주나라 왕실의 든든한 병풍으로 삼았다.
 
이어 선왕은 주나라의 중흥을 실질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제후들을 동도(東都)로 불러들였다. 주나라 초기 성왕(成王)이 동도를 건설하고 제후들을 소집한 이후 무려 300년 만이었다. 선왕은 아버지 여왕이 떠넘긴 침통한 교훈을 거울삼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마침내 주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역사에서는 이를 ‘선왕 중흥’이라 부른다. 앞서 소개한 <시경>의 노래는 바로 선왕의 중흥을 칭송하기 위한 것이다.
만년의 실정
그러나 집권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선왕의 개혁 의지는 빛이 바랬다. 선왕은 그간 일궈놓은 성과에 도취해 향락에 몸을 맡기고 정무를 게을리했다.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중신들은 한자리에 모여 왕실과 나라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선왕이 어떻게 왕이 됐던가? 소공을 비롯한 제후들의 옹립이 없었더라면 진작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왕은 중신들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나선 사람은 선왕의 정비인 강후(姜后)였다. 제나라 국군(國君)의 딸이며 뛰어난 자질과 교양으로 평소 중신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강후는 고민 끝에 방법 하나를 생각해냈다. 그날도 선왕은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지난밤 과음을 하고 미녀들에 홀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강후는 머리에서 비녀를 뽑아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몸을 치장한 귀고리와 반지도 모두 떼어낸 채 마치 군왕에게 벌 받기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하고는 선왕의 침소 앞에 섰다. 그러고는 시종을 선왕에게 보내 “왕이 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을 만천하 사람들이 다 보게 만든 것은 비천한 자신 탓이니 벌을 내려주십사” 청하게 했다. 깜짝 놀란 선왕은 버선발로 뛰쳐나와 잘못을 빌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기서 ‘비녀를 뽑아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죄를 청하다’는 뜻의 ‘탈잠대죄(脫簪待罪)’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강후의 극적인 행동으로 선왕은 다시 정무에 복귀했지만 그의 의지는 이미 흔들린 뒤였다. 선왕은 얼마 뒤 방탕한 생활로 돌아갔다. 국내 정치가 여의치 않자 무리하게 다른 민족과 제후들을 정벌하러 나섰고, 제후국의 내정까지 간섭해 그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이렇게 선왕은 천자로서의 위신을 점점 잃어갔다. 괵문공이나 중산보와 같은 중신들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 정벌 전쟁에 따른 군비 확장을 위해 세금을 무리하게 거두다 보니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여기에 별것도 아닌 일로 대부 두백을 죽이자 조야(朝野)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결국 3년 뒤 선왕은 죽은 두백으로 가장한 자객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재기와 중흥의 리더십은 더 철저해야
침체된 국면을 만회하거나 무너진 조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리더십은 평범해서는 별다른 효과를 낼 수 없다. 대개 큰 위기를 겪고 나면 일시적으로 중흥의 기운이 나타난다. 리더가 자질이 뛰어나지 않아도 그 리더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는 ‘향심력(向心力)’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선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소공과 자신을 추대한 중신들의 의중, 그리고 백성들의 희망을 정확히 읽어야 했다. 아울러 리더로서 자신의 능력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지속적인 개혁에 만전을 기했어야 했다.
 
리더들이 흔히 빠지는 자기 함정 중에서도 가장 쉽게 찾아드는 ‘자만(自滿)’은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만은 십중팔구 ‘자만(自慢)’을 불러오고, 끝내는 ‘자멸(自滅)’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선왕의 재기의 리더십은 그것이 실패한 뒤에 더 큰 재앙을 가져오는 화근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역사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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