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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이순신 자살설 - 초라한 리더십의 자화상

임용한 | 44호 (2009년 11월 Issue 1)
1598년 11월. 7년간의 임진왜란이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 한 달은 전체 전쟁 기간 중에서도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기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공격보다 더 어려운 것이 철수다. 게다가 바다(엄밀히 말하면 전라도 남단 해역)는 조선 수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철수 과정에서 사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부대가 가장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일본군은 여러 부대가 있지만, 주력은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의 부대였다. 군인으로서는 카토가 훨씬 유능하긴 했지만, 점령 범위가 넓고 세력이 가장 강했던 부대는 고니시의 부대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바로 이 고니시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노량에서의 최후 결전
고니시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에게 사신을 보내고 뇌물까지 바쳐가면서 퇴로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단호한 거절로 이 제안은 실패했다. 진린도 퇴로를 열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뇌물을 받고 일본군 4명이 탄 작은 배 하나가 만을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 배가 남해에 주둔한 일본 수군에게 고니시의 위기 상황을 보고했다.
 
일본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을 구하기 위해 일본 수군의 주력이 총출동했다. 수군 2만 명에 동원한 배만 500여 척이 넘었다. 이순신과 진린의 연합 함대는 400척이 못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조선 함대는 80여 척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의 출동을 감지한 조명 연합 함대는 노량에서 이들을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진린은 전투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순신이 강경하게 요청해서 작전이 결행됐다고 한다. 그곳은 약 300년 전 정지의 조선 수군이 왜구의 함대를 수장시킨 바로 그 장소였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 지금의 남해대교가 놓여진 협로 근처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렇게 시작된 해전은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전투로 발전한다. 양국의 장병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치르는 마지막 전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한 계단 앞에 펼쳐진 사선은 너무나 깊고 처참했다. 양군은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일본군 병사들은 바다 건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조선의 병사들은 침략자를 격멸하고 승리자로서 귀환하기 위해서.
 
이 전투가 얼마다 대단한 격전이었는지 조·명·일 3국의 대장선이 모두 한두 차례씩 위기를 겪었을 정도였다. 얼마 후 함대의 좌측을 맡았고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명나라의 노장 등자룡(鄧子龍)의 배가 갑자기 화염에 휩싸여 통제 불능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배로 난입하여 등자룡을 살해했다. 조선 수군은 명나라군보다 더 악착같이 싸웠던 만큼 피해가 컸다. 이순신의 부하 중 장수급만 10여 명이 전사했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장수급 전사자의 절반이 이날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가 된 유형 장군은 갑옷에 여섯 발의 총탄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격렬한 전투는 정오쯤에 끝났다. 해전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사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측 사료는 일본 병선 200척을 격침했다고 했고, 명군의 보고는 100척 포획에 200척 파괴라고 했다. 고니시는 혼란을 틈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해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의 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년 후 고니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의 패권을 두고 격돌한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 편에 섰다가 패배하여 현장에서 살해됐다.
 
이순신 자살설 확산
노량해전은 위대한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조선은 최고의 영웅을 잃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 환멸을 느낀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참전했다는 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7세기에는 이미 상당히 퍼져 있어서 조정의 고관까지도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다. 숙종 때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서하 이민서(1633∼1688)는 이순신 장군이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갑옷을 벗고 전쟁에 임했다고 서술했다. 이여는 숙종대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는데 그도 이순신의 자살설을 믿었다. 이순신의 자살설은 근래까지 이어져 고명한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 설을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순신의 자살설이 등장한 배경에는 조선 사회의 정치 문화에 대한 회의가 담겨 있다. 전쟁 중에 이순신은 수군 최고사령관 직에서 쫓겨나 일반 사병으로 강등되었다. 이순신이 물러난 자리에는 그의 라이벌이며 당파도 달랐던 원균이 등용됐다(이순신은 동인, 원균은 서인이다). 그 대가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패배하여 거의 전멸해버렸다. 이 피해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수보다 많고, 이순신이 해임되기 전에 거둔 모든 전과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이순신 해임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진상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정치적 음모가 개입됐다고 믿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벌어지는 이 치졸한 정치 싸움과 그 엄청난 대가에 대해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조선 정부의 치졸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카토 키요마사의 군대를 몰아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정문부도 역모에 걸려 살해됐다. 의병장으로 최고의 공을 세운 곽재우는 아예 관직에 나오지도 않고 은거했다. 역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도 모함에 걸려 죽었다. 그뿐인가. 대체로 숙종 무렵부터 당파 싸움은 점점 치열해지더니 대규모 숙청과 정적에 대한 살해까지 나타났다. 대유학자이자 정치계의 거두였던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정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관리 등용과 인사 행정에서는 혈연과 지연, 학연이 더욱 중시되기 시작했다. 든든한 배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정치판에 실망하는 만큼이나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을 더욱 확신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자살설은 영웅에 대한 모독
결론부터 말하면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은 진실이냐 허구냐를 논하기 이전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최대 모욕임을 먼저 밝혀둔다. 자살설의 골자는 이순신 장군이 대놓고 자살을 할 수가 없어서 일부러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창 전투 중에 그것도 7년 전쟁 중 최대의 격전이며, 부하 장병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엄청난 전투에서 지휘관이 앞으로 닥쳐올 세상은 보기 싫고, 자살했다는 불명예는 쓰기 싫어서 갑옷을 안 입고 싸우다가 전사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전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한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면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의 생명과 전투의 사명감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명예와 체면만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생전에 가해진 어떤 비난이나 백의종군의 처벌보다도 통분할 이야기가 자살설이다.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자신이 맡은 과업과 부하들에 대한 책임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적인 이익은 물론이고, 비난과 굴종마저도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최고 미덕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었던 이유도 조정에서 요구하는 잘못된 전략을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그 대가로 해임과 백의종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원균은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 결국 자신과 조선 수군 2만 명의 목숨을 칠천량에 수장해야 했다.
 
자살설의 배경에 정치 문화와 폐쇄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회의가 놓여 있다는 사실, 그 혐오감이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조직 생활을 잘 모르는 순박한 농부들과 시골 선비들 사이에 유행한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국가 경영을 책임진 고위 관료와 최고 지식인들 사이에도 퍼져 갔고,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리더는 조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토대로 과업을 달성하기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리더의 역할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또 훌륭한 리더십을 행사한 리더가 한국 사회에서 부족하다는 점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특히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각 영역에서 필요한 책임자의 숫자는 급속히 늘어났지만 충분한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불균형이 지속되면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준 역할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민족적 영웅에 대한 오해와 곡해도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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