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그림동화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아트 디렉터, 캐릭터 디자이너, 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장, ‘좋은 아버지 모임’ 창립자, 잡지 발행인, 도서 출판인, 대학 교수, 세계책나라축제와 청소년축제 조직위원장, 그리고 남이섬 대표이사까지… 모두 ‘강우현’이라는 이름에 붙은 직함이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저자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2000년 12월 31일 남이섬에 와 며칠을 쉬다 자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2001년 남이섬 대표로 취임했다. 저자는 관광에 대해서는 생판 몰랐다. 게다가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였고, 남이섬의 사업 주체인 경춘관광도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 시끌벅적하고 볼품없던 유원지를 자연과 문화가 살아 있는 관광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2001년 한 해 29만 명이던 방문객은 67만 명(2002년), 86만 명(2003년), 140만 명(2004년), 167만 명(2005년)으로 점점 늘어갔다. 현재 연간 200만 명이 남이섬에 다녀간다. 비결은 ‘상상 경영’. 단지 상상을 현실로 옮겨놨을 뿐이다.
남이섬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해 2005년부터 ‘남이섬 세계책나라축제’를 열고 있다. 여기에 가족 체험 프로그램과 환경학교까지 열자 가족 단위 관광객이 늘어났다. 섬 분위기가 달라지자 예술가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남이섬은 예술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재료도 대주면서 작업을 함께 했다. 조각가, 유리공예가, 흙공예가가 공방을 차려 손님들과 호흡했다. 저자는 또 남이섬 전체를 무대로 꾸몄다. 낡은 건물은 전시관, 빈터는 공연장으로 만들고, 숲 속 무대에서 명상 음악회를 열거나 외국 전통무용단을 불러 공연했다.
자연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컸다. 밤 10시면 무조건 불을 껐다. 그러자 별빛과 달빛이 살아났다. 나무에 농약을 치지 않으니 벌레가 생겼고, 벌레가 생기니 새들이 날아왔다. 새똥에 묻어온 씨앗에서는 야생화가 피었다. 또 방문객들이 섬 안에 자신의 나무를 심어두고 오랜 세월 동안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나미나라 식목일’ 행사를 했다. 방문객 수백 명이 자기 돈 내고 나무를 사서 한꺼번에 심으니 단번에 숲이 생겼다.
남이섬의 부활 이유를 단순히 드라마 ‘겨울연가’의 인기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겨울연가’가 뜨자 남이섬도 한류 관광의 명소가 됐다. 드라마가 방영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인들이 매일 100여 명씩 찾아온다. 하지만 저자는 언젠가 그 열풍이 가라앉을 것을 예상하고 ‘욘사마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6년 ‘나미나라공화국’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남이섬을 하나의 독립국가로 상상하고 꾸민 것이다. 섬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여권을 발급하기 위해 선착장은 ‘입국관리소’로 바꿨다. 공화국 내에서만 통용되는 전용 화폐 ‘나미통보’, 고유 문자 ‘나미짜’도 있다. 저자는 또 남이섬의 세계화에 매달렸다. 외국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각종 국제 문화 행사를 열자, 한번 남이섬에 왔던 외국인들은 친구와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았다.
저자 특유의 ‘지식 경영’ 방식도 신선하다. 그는 지식 경영을 도입하기 위해 직원들의 ‘암묵지’를 문서화해 ‘형식지’로 남기려 했지만 곧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무를 옮기고 잔디밭에서 풀이나 뽑는 아저씨들, 낡은 배를 운전하는 선장들, 문서 작성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주방 아주머니들에게 무슨 노하우를 내놓으라고 하나? 직원들이 가진 소박한 마음과 정성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나타내라고 하나?’ 결국 ‘그냥 내버려두자’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직원들의 정년을 80세까지 보장했다. 어차피 형식지로 꺼내 쓰지 못할 지식이라면 직원들의 마음속에 넣어두고 오래 일하게 하자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