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헬리콥터에 탑승하다.’ 이것은 올해 3월 국내 한 일간지 칼럼 제목이다. 칼럼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의장이 “3000억 달러(약 400조 원)의 장기 국채를 사들여서라도 시중에 돈을 풀겠다”고 언급한 내용을 다뤘다.
버냉키 의장은 원래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2002년 한 강연회에서 “경제 살리기(디플레이션 예방)를 위해서는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야 한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발언을 인용한 후 이 별명을 얻었다. 어쨌거나 버냉키의 통화 정책은 그만큼 과감하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우선, 달러가 흔해지면 ‘세계 기축통화’라는 기존 지위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 향후 발생할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도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세계적 경제학자로 통하는 버냉키가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헬리콥터 정책’의 이면에는 무언가 수긍할 만한 사상과 철학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버냉키는 세계 50대 경제학자이며, 하버드대를 최우수로 졸업한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 종신 교수직에 오른 석학이다.
버냉키, 대공황 연구에 평생 바쳐
버냉키는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던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의 그늘에 가려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린스펀은 무려 18년 동안 연방준비은행 의장을 지냈다. 심지어 버냉키가 취임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의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 중 무려 67%가 “버냉키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버냉키라는 사람을 이해해야 미국의 금융위기 대응 방안과 앞으로의 경제 정책 및 새로운 금융 질서 재편의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금융 경제 전문가인 에단 해리스의 책 ‘Ben Bernanke’s Fed(번역서: 벤 버냉키의 선택)’는 독자들에게 시의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리스는 버냉키의 이론적·학문적 배경과 스타일, 시각이 어떻게 연방준비은행의 정책에 영향을 줄 것인지를 분석했다.
해리스가 지적한 버냉키 의장의 첫 번째 특징은 그가 ‘대공황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란 점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역할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2가지 초대형 경제 재앙의 재발을 막는 일이다. 그 하나는 1930년대 대공황이며,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일어났던 악성 인플레이션이다.
물론 오늘날 연방준비은행의 역할은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다고 하지만, 버냉키는 현재 인플레이션보다는 대공황과 같은 디플레이션(경제 전반의 가격 수준이 떨어져 경제 활동이 침체되는 현상) 방지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디플레이션의 심각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물가가 떨어지면 소비자들은 구매를 미루고 기다리는 행태를 보인다. 소비 위축은 실업률을 높이고, 이로 인해 소비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빚이 있는 기업들은 매출 부진뿐만 아니라 자꾸만 올라가는 돈 가치 때문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에 이른다. 디플레이션의 심각성은 특히 통화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더 커진다. 아무리 경제가 나빠져도 이자율을 0% 이하로 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 심해지면 통화 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없어진다.
두 번째 특징은 학자 시절 버냉키가 신념을 갖고 ‘연방준비은행의 투명성 확보’를 추진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린스펀 전 의장은 애매하고도 화려한 화법의 ‘연막 전술’을 곧잘 사용했다. “적절한 인플레이션율은 얼마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가계나 기업의 의사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낮고 안정적인 수준의 인플레이션율”이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버냉키는 이런 관행을 뿌리부터 바꾸고자 했다. 그는 연방준비은행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인플레이션 타깃’을 미리 설정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했다. 타깃이 있으면 개별 경제 주체들이 임금이나 가격 인상에 신중해지며, 이는 결과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율 유지’라는 선순환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였다. ‘인플레이션 타킷팅’은 버냉키 자신의 신념을 실현한 것이었으나, 의장의 재량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버냉키가 연방준비은행의 ‘리스크 관리(risk management)’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학자 시절 자산 가격의 변화가 통화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금융 가속도 모델(financial accelerator model)’을 주창했다. 사람들은 주택 등 자산의 가격이 오르면 자신이 훨씬 더 부유해졌다고 느끼며, 이에 따라 소비를 늘리는 경향이 있다. 집값이 1억 원 오르면 소비가 연간 600만 원 정도 늘어난다는 연구도 있다. 집값 상승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을 늘려 경제 전체적으로 ‘버블’을 키울 수 있다.
이런 학문적 배경 아래서 버냉키는 자산 가격의 폭등 및 폭락이 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유달리 예민해 이와 관련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대공황 연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위기, 특히 금융 시장의 위기는 조기에 강력히 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