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 보완을 위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는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두며 무사히 끝났다. 인터뷰 참가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임해 주었고, 전문적인 식견과 관심이 있어서인지 다양한 의견을 펼쳐주어 실제 제품에 반영했을 때 반향을 일으킬 만한 아이디어도 여러 개 얻을 수 있었다. 이게 다 손대수 덕이다. 손. 대. 수. 덕.
내 힘이 아닌 손대수의 힘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인사치레로 건넨 ‘네 덕’이라는 말에 호들갑을 떨면서 오버하는 손대수. 저런 헐렁이가 어떻게 그런 인맥을 총출동시킬 수 있었을까? 허구한 날 능청스러운 농담이나 하고 사람들과 놀기나 좋아하는 ‘뺀질이’인줄 알았는데 의외의 복병이 내 옆에 있을 줄이야. 내가 못난 건가, 손대수가 잘난 건가. 나도 모르게 손대수와 나를 비교하게 된다. 새파란 후배 앞에서 작아져만 가는 내 모습이라니. 회사를 그만둔 유 대리님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렇다면 결국 나도 유 대리님처럼 좌초되는 거 아닌가? 헉,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래, 살아남기 위해 지금의 나의 부족한 점을 쿨하게 인정하고 새파란 후배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적극 배워 보자. 특히 능청스러울 정도로 밝은 성격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당당함은 억지로라도 따라해 보고 싶을 정도다.
손대수 따라잡기 첫 번째.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를 실천할 때가 왔다. 미래상품기획팀의 주재 아래 제품 기획 최종 점검 회의가 열렸다. 오랜만에 총무팀, 마케팅팀, 디자인팀 등 관련 부서 담당자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내가 회의를 이끌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회의를 주도해 성과를 내보자!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수 조명 기기 시제품 기획을 위해 콘셉트 보드 평가와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거친 결과 우리가 메인 소비 타깃으로 삼았던 고소득층 독신자들보다 스트레스 해소와 심리적 안정, 집중력이 필요한 수험생이나 기업 임직원, CEO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라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좋은 의견이 있시면 말씀해 주시죠.”
“제품 개발 자체의 의미가 있느냐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집중력 향상을 위한 기기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잖아요. 후발 주자로 시장에 진입하려면 가격경쟁력과 차별성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아니죠. 그건 백 대리님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 제품은 조명 기기라는 점에서 큰 차별점을 갖고 있어요. 이건 이렇고, 저런 저렇고….”
(한 시간 경과)
“그러니까 영업팀 최 과장님 말씀은 소비자가 너무 세분화되어 있어서 충분한 매출 확보가 어려울 거란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라, 우리 기존 제품의 방식을 벗어난 다른 판촉 방법을 찾아봐야 한단 말이죠.”
“홍보를 조금만 더 강화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봐요, 강 대리. 홍보는 공짜로 한다고 생각해요?”
“저, 그럼. 회계팀에서 예산을 조금만 더 늘려 주시면….”
(두 시간 경과)
“그 문제는 좀 더 고민을 해 본 뒤에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합시다. 자, 이제 어떤 얘기가 남았죠?”
이때 갑자기 그동안 잠잠하던 마케팅팀 나 과장님이 발끈하신다.
“대체 언제까지 우릴 이렇게 붙잡고 있을 생각이죠? 다른 사람들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어려운 얘기는 다음에 하자고 하고. 오늘 회의는 왜 한 건가요? 우릴 여기에 왜 부른 거죠? 오늘 회의의 목표는 무엇이며, 결론은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