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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퇴계에게 배우는 ‘꼰대 방지책’

유교 사상이 ‘꼰대’라고? 오히려 정반대, 겸손한 퇴계는 제자에게도 예를 갖춰

이치억 | 249호 (2018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꼰대질’의 유래를 ‘유교’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오해다. 유교 사상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주 강력한 ‘꼰대 방지책’이 들어 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퇴계 이황 선생이다. 그는 신진 학자 율곡 이이와 고봉 기대승에게 ‘많이 배웠다. 가르침을 줘서 감사하다’고 당연하게 인사할 만큼 상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고치기를 서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야만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맹자는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고 일갈했는데 어쩌면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꼰대’는 굳이 남에게 참견하고 가르치려 들고 겸손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을 ‘내 기준’에 맞춰 바꾸려 노력할 시간에 스스로 돌아보며 자신을 바꿔가려는 노력, 그것이 유교사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퇴계 선생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줬던 최고의 ‘꼰대 방지책’이자 ‘꼰대 극복법’이다.

‘꼰대’와 ‘갑질’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권력이나 지위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꼰대는 인성 자체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갑질’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압력을 행사하고 때로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동반하는 나쁜 행위이지만 꼰대는 단지 권위적이고 완고할 뿐 상대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며, 따지고 보면 옳은 말을 한다는 점에서 꼰대는 어떤 면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꼰대는 결코 환영받을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면할 수 없어 보인다.

갑질과 꼰대는 수직적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직적 인간관계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 뚜렷이 갈라지고, 상하 관계에 따라 호칭도 달라진다. 상명하복이 당연시돼 윗사람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관습적으로 금기시돼 있다. 이쯤에서 이러한 수직문화의 배후로 지목될 만한 ‘물건’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유교’다.

한 번 미운털이 박힌 사람에게는 온갖 죄가 다 뒤집어 씌워진다. 이는 사상이나 문화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유교는 가부장제를 만들어 여성과 어린이를 억압하고, 신분제를 공고화해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외세의 침략에도 대응하지 못한 문약(文弱)한 나라로 만든 망국 정치의 장본인이다. 뜬구름 잡는 학문만을 최고로 숭상하면서 탁상공론을 일삼고, 농(農)·공(工)·상(商)의 실업(實業)은 천시해 경제의 발전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유교의 특징 아닌가? 이쯤 되면 사실 ‘꼰대’나 ‘갑질’도 슬쩍 유교에 뒤집어씌우면 될 것 같다. 유교의 수직문화가 결국 오늘날 꼰대정신(?)의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그 반대이거나 오해다. 가부장제와 신분제, 남녀차별은 결코 유교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근대 이전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15세기의 영국에 신분제와 가부장제, 여성 차별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유교사회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은 전근대사회의 특성이지 유교사회의 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나라는 비록 문(文)을 숭상했고 상대적으로 무(武)가 약했지만,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500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신으로 한글이 만들어졌고, 유교 덕에 평화로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조선이 망했던 것은 왕조의 수명이 다한 시점에 식민제국주의가 침략했던 탓이지 결코 문을 숭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를 잃은 시기에 강력하게 저항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문(文)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엄격한 상하관계 또한 유교의 산물은 아니다. 일례로, 유교국가에서는 왕권(王權)이 결코 신권(臣權)보다 강하지 않았다. 공자는 임금을 매우 존중하기는 했지만 임금이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지체 없이 떠났다. 맹자는 한술 더 떠서 임금도 감히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불소지신(不召之臣)임을 자처했다. 실제로 맹자는 임금을 알현하려 집을 나서다가도 임금이 사신을 보내서 왕궁에 좀 와 달라고 하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학덕이 높은 신하를 만나고자 한다면 소환을 할 것이 아니라 임금이 직접 찾아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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