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렁∼ 익숙하지 않은 콧소리가 들렸다.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이불 위로 수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두껍고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이 이불을 훑는다. 이불을 살짝 들어 바깥을 염탐하니 악어처럼 생긴 얼굴에 커다란 입, 날카로운 이빨, 털이 없는 잿빛 피부…. 헉! 공룡이다.
6월 6일 개봉하는 영화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쥬라기 월드2)’에는 티라노사우루스에 벨로시랩터, 그리고 여러 동물의 유전자를 섞은 하이브리드 공룡 ‘인도랩터’가 등장한다. 인도랩터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포악하고, 벨로시랩터보다 조금 크지만 여전히 날렵하다. 영화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공룡이다.
1993년 영화 ‘쥬라기’ 시리즈의 첫 편인 ‘쥬라기 공원’을 만들 때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미국 몬태나주립대 고생물학자인 잭 호너의 자문을 받아 공룡 모양의 로봇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최신 특수 효과를 덧입혀 공룡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지난 20여 년간 고생물학자들은 새로운 공룡 화석을 대거 발굴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공룡의 새로운 특징을 찾아내고, 이를 공룡 복원에 반영했다. 하지만 ‘쥬라기’ 시리즈의 공룡은 여전히 1990년대 모습에 머물러 있다. 이번에 개봉하는 쥬라기 월드도 마찬가지다.
국내 공룡학자인 이융남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전작과 내용이 이어지는 시리즈물인 만큼 공룡의 외형을 갑자기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영화는 영화대로 즐기는 한편, 고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옥에 티’를 찾으며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쥬라기·벨로시랩터
중생대에서 두 번째 시기로 약 2억100만 년 전∼약 1억4500만 년 전에 해당한다. 표기법은 ‘쥐라기’로 쓰는 게 맞지만, 기사에서는 영화의 제목을 살리기 위해 ‘쥬라기’로 표기했다. 마찬가지로 벨로시랩터는 ‘벨로키랍토르’로 쓰는 게 맞지만 영화에서처럼 미국식으로 표기했다. |
옥에 티 1호박 속 모기에서 뽑은 공룡 DNA로 복원했다영화 ‘쥬라기 공원’은 도미니카산 호박(琥珀·amber)에서 공룡의 DNA를 뽑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공룡의 피를 빤 모기가 호박에 갇혔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과학자들은 이 DNA를 이용해 공룡을 복원했다. 염기서열 중 비어 있는 부분에는 개구리 유전자를 채워 넣었다.
하지만 아무리 모기가 호박 속에 완벽히 밀폐된 채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피 같은 액체 성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날아간다. 모기의 형태가 화석 속에 남아 있을 수는 있지만, 호박 자체도 1만 년 정도 지나면 변질될 수밖에 없다. 영화 설정처럼 수천만 년이 흘렀다면 공룡 피는커녕, 곤충의 DNA를 뽑아내기도 어렵다.
이 교수는 “도미니카산 호박은 약 4000만 년 전∼2500만 년 전인 신생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호박이 변질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중생대 후기인 약 6600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의 피가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고 말했다.
비어 있는 염기서열에 개구리 유전자를 넣어 복원했다는 설정도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교수는 “‘쥬라기 월드’에는 갑오징어와 뱀 등 공룡과 계통적으로 거리가 먼 동물의 유전자를 섞는 것으로 나온다”며 “이 경우 제대로 된 생명체가 태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공룡이 악어 같은 파충류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현재 고생물학계에서는 닭이나 타조 등 조류와 계통발생학적으로 훨씬 가깝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8년 미국 뉴멕시코대 연구팀은 공룡 암컷의 뼈에서 현존 조류인 타조나 비둘기처럼 알을 만들 때 칼슘을 공급한 흔적(골수골)을 찾았다. 골수골은 악어 등 파충류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조류의 고유한 특징이다.
2014년과 2015년에는 잭 호너(호너는 난독증으로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했고, 몬태나주립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와 미국 하버드대 진화생물학과 연구팀이 각각 달걀에서 일부 유전자를 없애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공룡처럼 긴 꼬리를 가지거나, 부리 대신 긴 주둥이를 가진 배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윤리적인 이유로 달걀에서 공룡을 탄생시키는 실험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손상되지 않은 완벽한 공룡 DNA를 찾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 ‘쥬라기 월드’에서 오웬 그래디(배우 크리스 프랫)는 수신호와 언어로 벨로시랩터를 다룰 수 있다. 벨로시랩터 유전자를 가진 인도랩터도 과연 그의 수신호를 따라 움직일까. 실제 벨로시랩터도 영화에서처럼 영리했을까. UPI코리아
옥에 티 2벨로시랩터의 피부가 털 없이 매끈하다‘비주얼’에서 영화와 실제가 가장 다른 공룡은 벨로시랩터다. 영화에서는 몸길이 약 2∼3m에 파충류처럼 생긴 머리, 털 하나 없이 매끄러운 잿빛 비늘 등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학계는 벨로시랩터를 몸길이 약 1.2m(긴 꼬리 포함), 체중 15∼20kg으로 아담한 체구에 온몸에 화려한 깃털이 나 있어 새와 닮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 공룡학자들은 육식공룡 대부분이 깃털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물 사체는 시간이 지나면 뼈처럼 단단한 부위는 화석으로 남지만, 근육이나 내장, 눈알처럼 부드러운 부분은 썩어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식공룡에서 깃털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유는 화석에 깃털 자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룡의 깃털 화석은 몸 색깔을 추정하는 단서도 된다. 깃털에는 수 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 크기의 색소 주머니(멜라닌 소포체)가 있어 색깔을 낸다. 멜라닌 소포체는 길쭉하거나 공처럼 둥글거나 납작해 모양이 다양하다. 이에 따라 반사하는 빛의 파장이 달라지고 색깔도 달라진다. 따라서 공룡의 깃털 화석에 찍힌 멜라닌 소포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현생 조류의 깃털에 있는 멜라닌 소포체와 비교하면 색을 추정할 수 있다.
푸첸 장 중국과학원 척추동물진화계통분류학과 교수팀은 중국 랴오닝성 근처에서 발굴한 시노사우롭테릭스 화석을 관찰한 결과, 몸통에 있는 멜라닌 소포체는 길쭉한 막대 모양이며(길이 0.8∼1μm, 너비 200∼400nm), 꼬리에 있는 멜라닌 소포체는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길이 500∼700nm, 너비 300∼600nm). 연구팀은 이 공룡이 전체적으로 누런색이고, 꼬리에 갈색 줄무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직 티라노사우루스와 벨로시랩터의 깃털 화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중국에서 깃털공룡 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지역은 셰일과 화산재 지층으로 공룡이 시루떡처럼 눌리면서 깃털까지 찍힌 경우가 많다”며 “반면 티라노사우루스와 벨로시랩터 화석이 많이 나오는 북미와 몽골 지역은 사암지층으로 깃털과 근육 등이 비교적 빨리 썩고 뼈 형태만 남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다만, 중국에서 티라노사우루스의 조상격인 ‘관롱’과 ‘딜롱’의 깃털 화석이 발견돼 티라노사우루스도 깃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덧붙였다.
벨로시랩터의 경우 2007년 깃혹(깃털이 달린 돌기·quill knobs)이 있는 앞발뼈 화석이 발견됐다. 깃혹은 현생 조류의 날개뼈에도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벨로시랩터의 앞발에도 큰 깃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해 중국지질과학원과 영국 에딘버러대 공동연구팀은 중국에서 발굴한 벨로시랩터의 사촌 격인 첸유안롱 화석을 발굴했다. 그리고 분석 결과, 온몸이 깃털로 뒤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몸에 비해 날개가 작은 탓에 조류처럼 하늘을 날기보다는 짝짓기 상대를 찾기 위한 치장 목적으로 깃털을 활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한편 영화에서는 벨로시랩터가 문고리를 잡아 돌려 문을 열거나 사람의 명령을 알아들을 만큼 지능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 교수는 “사냥을 했던 육식공룡이 초식공룡에 비해 훨씬 똑똑했을 것”이라면서도 “현생 조류보다 진화가 덜 된데다, 대뇌화지수가 낮은 공룡이 영화에서처럼 영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영화 ‘쥬라기 공원’과 ‘쥬라기 월드’에 등장하는 벨로시랩터는 몸길이 2∼3m로 사람보다 훨씬 크고, 악어처럼 생긴 얼굴에 피부는 털 없이 매끄럽다(왼쪽). 반면 최근 공룡학자들이 복원한 벨로시랩터는 몸길이가 약 1.2m이며 깃털로 뒤덮여 있어 새와 비슷하다(오른쪽).옥에 티 3브라키오사우루스는 소처럼 먹는다그간 영화 ‘쥬라기’ 시리즈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면은 목이 긴 초식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등장할 때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긴 목을 꼿꼿하게 세워 나무 꼭대기에 달린 나뭇잎을 따먹은 뒤 소처럼 천천히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과학적으로는 옥에 티다.
공룡이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이빨화석을 보면 알 수 있다. 벨로시랩터와 알로사우루스 등 육식공룡의 이빨화석은 대부분 칼 모양으로 뒷날에는 스테이크 칼처럼 톱날이 달려 있다. 특히 티라노사우루스는 이빨이 납작하지 않고 두꺼워 먹잇감을 뼈째 씹어 먹었다. 이미 발굴된 똥화석에 잘게 부서진 뼛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초식공룡의 이빨은 형태가 다양하다. 멋들어진 뿔을 가진 트리케라톱스는 위아래 이빨이 가위처럼 맞물리는 구조다. 가윗날처럼 맞닿는 부분이 에나멜질로 덮여 있어 나뭇잎을 잘라먹었다. 오리주둥이공룡(하드로사우루스류)은 수천 개의 작은 이빨을 갖고 있다. 위아래 이빨들이 서로 부딪쳐 맷돌처럼 식물을 으깨 섭취했을 수 있다.
하지만 브라키오사우루스처럼 용각류(목이 긴 초식공룡)는 이빨이 매우 허술하다. 연필처럼 생긴 이빨이 주둥이 앞부분에 듬성듬성 나 있는데, 서로 잘 맞물리지 않아 음식물을 절대 씹을 수 없는 구조다.
이 교수는 “용각류는 이빨을 갈퀴처럼 사용해 나뭇잎을 긁듯이 입 안에 잔뜩 모아 씹지 않고 삼켰을 것”이라며 “장내 미생물이 이빨 대신 나뭇잎을 소화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몇몇 초식동물의 뱃속에서는 위석(자갈)이 있어 음식물을 잘게 부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생 조류 중 단단한 씨를 먹는 새들은 부리에 이빨이 없는 대신 모래주머니에 위석이 있어 소화를 돕는다.
이외에도 굳이 영화 속 옥에 티를 꼽자면, 티라노사우루스가 최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쫓아가는 장면이다. 과거에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시속 약 40㎞로 달릴 수 있어 자동차만큼 빠르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2016년 캐나다 앨버타대 연구팀이 미국 와이오밍주에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의 발자국 화석을 분석한 결과 사람의 이동 속도(시속 약 4.5∼8㎞)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공룡은 청년기이며 다 자란 티라노사우루스 성체는 이보다 더 느리게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룡이 사람을 낚아채 날아가는 장면도 너무 앞서갔다. 새의 긴 발가락뼈는 사람 손가락처럼 하나하나 구부릴 수 있어 나뭇가지에 앉거나 물건을 움켜쥘 수 있다. 하지만 익룡의 발은 사람 발처럼 발바닥뼈 다섯 개가 길고 서로 붙어 있을 뿐 아니라 발가락이 매우 짧다. 땅 위에서 편평한 발로 매우 어색하게 걸어 다녔다는 얘기다.
1. 벨로시랩터의 앞발뼈.
2. 앞발뼈 일부를 확대하면 깃털이 달려 있었던 돌기인 깃혹(화살표)을 확인할 수 있다. 깃혹은 현존하는 조류의 날개뼈에도 있어, 벨로시랩터에 깃털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3. 독수리의 일종인 터키콘도르의 날개뼈에 있는 깃혹(점선 원).
4. 깃털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연조직만 해부했다.
영화 ‘쥬라기 월드2’ 주인공 오웬이 자이로스피어에서 내린 채 티라노사우루스와 맞닥뜨렸다. 큰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모습이 무시무시하다.1993년에 개봉한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한 브라키오사우루스.브라키오사우루스의 이빨. 갈퀴처럼 이빨로 나무를 긁으면서 잎을 모아 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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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