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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코드CEO포럼

“죽음은 마지막 성장의 기회”

정임수 | 13호 (2008년 7월 Issue 2)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리더들이 새로운 생사관(生死觀) 정립에 앞장서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떻게 생을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가. 거의 없다. 성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하면서 더 중요한 죽음에 대한 교육은 전혀 없다. 이게 한국의 실태다. 그래서 죽음학회를 만들었다. 서구는 미국을 중심으로 죽음학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은 시작도 안 된 상황이다.
 
사람은 본인이 죽어야 함은 물론 부모와 배우자, 심지어 가장 안타까운 경우로 자식도 보내야 한다. 죽음은 먼 얘기가 아니다. 언제 나한테, 가족한테 올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죽음을 맞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 리더들의 책무가 크다. 리더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매장을 선호하다가 화장(火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고 최종현 SK 회장이 화장을 하면서부터다. 사회 지도층이 화장함으로써 사회적 구조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 리더들의 역할이 크다.”
 
한국인은 죽음 혐오하고 부정 하기만
“한국의 기현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무거운 주제, 피하고 싶은 주제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술 앞에 장사 없다고, 죽음 앞에서 남녀도, 빈부도, 강자와 약자도 없다.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자세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혐오하거나 부정한다. 죽음을 얘기하면 재수 없다고 하고, 이성적으로는 죽게 되는 사실을 아는데 끝까지 부정한다. 죽음에 대해서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친구 중에 음반 관련 일을 하는 이가 있다. 이 친구에게 죽음과 관련한 음악을 만들라고 권한 적이 있다. 죽기 전에 살아있는 감각은 청각과 촉각 두 가지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상에서 혼수상태에 있더라도 계속 만지고 얘기해야 하는 이유다. 혼수상태에서 사랑한다, 죄송하다고 말해도 늦지 않다. 다 알아듣는다. 마지막까지 청각이 살아있으니 마지막 위안을 주는 음악을 만들라고 친구에게 권한 것이다. 본인도 위안을 받고, 가족도 위안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아닌가.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죽으니까 시장도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친구의 반응은 재수 없다, 죽는 것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하더라. 이게 죽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다.”
 
佛經, 현실을 꿀맛 젖은 사형수에 비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본들, 대통령 같은 엄청난 권력을 가져본들 죽음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경(佛經)에서는 인간의 이런 상황에 대한 좋은 비유를 했다.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는 사형법이 있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도망가고, 코끼리가 뒤쫓아 가면서 죽음이 다가온다. 도망가던 사형수는 칡뿌리가 드리워진 우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런데 우물벽 돌에는 독사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독사를 피해 더 밑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우물 밑에는 악어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런데 마침 쥐들이 사형수가 타고 내려가던 칡뿌리를 갉아먹는다. 인간이 사는 현실이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그런데 나뭇가지 위 벌집의 꿀이 사형수 입으로 떨어진다. 사형수는 꿀의 달콤함에 젖어 그 순간이 절체절명의 위기인지 잊는다. 이게 인간이다. 언제 사고가 닥칠지, 언제 죽음이 닥칠지도 모른 채 인간은 꿀의 유혹에 빠져든다. 여기서 꿀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상징한다.”
 
비가역적 삶에서 죽음 준비에 들어가야
“그렇다면 왜 죽음을 이야기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학교도 학업이 끝나면 졸업식을 한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힘들게 60년, 70년 또는 그 이상을 살았는데 죽을 때도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인간은 삶을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듯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그런데 한국인은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 불치병, 말기암 환자들도 대체로 끝까지 삶에 집착하다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의 죽음은 [표1]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다시 건강해지지 못하는 상태, 간암 말기 같은 경우를 비가역적 삶이라 할 수 있다. 비가역적인 삶도 의식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사로부터 비가역적 상태가 된다는 얘기를 들으면 본격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의식이 없어지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다수 그렇게 하기보다 항암 치료를 받는 등 끝까지 치료에 집착해 멀쩡하던 정신마저 놓치고 황망하게 어느 날 훌쩍 세상을 떠난다.

조사 결과를 보면 비가역적 삶에 들어갔을 때 들이는 의료비가 전체 의료비의 40% 이상에 이른다. 심폐 소생술, 인공호흡기 등에 돈이 엄청 들어간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버리는 돈과 마찬가지다. 환자는 다시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는데 단순한 물리적 생명 연장을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이 투여되는 것은 낭비다. 보통 집안에서는 중환자 한 명이 있으면 집을 팔아 전세로 옮겨간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집안은 전세금까지 빼서 치료하고, 결국 초상까지 치르고 나면 살 집마저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고인은 어차피 생을 다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파산하는 것이다.”
 
죽음은 인격 도약의 기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쓴 책 ‘인간의 죽음(on death and dying)’은 데스(death) 즉 죽음뿐 아니라 다잉(dying) 즉 죽어감에 대해 얘기한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 서 봐야 자기 생을 반추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일들(돈 벌고, 일하고, 회사 다니고, 재테크 하고)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이밖에도 다른 차원의 중요한 일이 많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주인공이 애벌레다. 모든 애벌레가 나무에 올라가려고 애를 쓴다. 다른 애벌레를 발로 걷어차 떨어뜨리는 등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나무에 기어오른다. 나무 위는 구름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경쟁에서 살아남아 나무 꼭대기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삶이 이런 것이다. 죽어라고 싸워봐야 우화와 같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살면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신은 누구인가,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은 차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죽음은 어느 때보다 인격적으로 도약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다. 이 중요한 기회를 항암제나 약에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리고 보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항암 치료는 거부하더라도 진통제는 계속 맞으면서 마지막 성장의 기회를 제대로 보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인간은 존엄하게 자기 생을 다 마치고 갈 수 있다.”
 
사전 의료지시서로 죽음 준비해야
“그렇다면 좋은 죽음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죽으면 좋은 것인가. 적어도 비가역적 삶에서 의식이 있을 때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유언장은 이전부터 써도 좋다. 유언장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것. 하지만 1년마다 다시 써야 한다. 사람 마음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유언장에는 재산 문제를 확실하게 밝히고, 죽은 후에 장기나 시신 기증의 문제 또는 화장할 것인가 매장할 것인가에 관한 항목들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비가역적 삶에서 의식이 있을 때 반드시 써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사전 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s)’다. 여기에는 자신이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면 어떤 치료를 하고, 어떤 치료를 하지 말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다. 예를 들어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인공영양법은 하지 말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 치료는 계속 해 달라는 식이다.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죽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지시서는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작성해서 가족 증인의 서명과 공증인의 서명까지 받게 돼 있다.”
 
좋은 죽음 위해 영면실 필요
“한국 문화는 깨져도 이만저만 깨진 게 아니다. 병원에서 태어나서, 장바닥에서 결혼하고, 병원에서 죽는 게 한국인의 인생이다.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는 데 성스러움이 전혀 없다. 이게 바로 한국인의 천박성이다. 그런데 집에서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아파트에서 죽으면 시신을 승강기로 옮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병원에는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서 편안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둘 만한 공간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6, 7인용 병실에서 인공호흡기·심폐소생기 등 기계에 휩싸인 채 다른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준다. 또 고인의 시신이 바로 보관소로 가지 못하고 몇 시간 침대에 방치되기도 한다. 다른 환자들은 나도 곧 저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죽음에 대해 엄청난 공포감을 갖는다.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싶은데 병원에서 보는 건 인간의 죽음뿐이다.
 
따라서 영면실(永眠室) 또는 임종실이 필요하다. 환자가 죽음이 임박해지면 환자와 가족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방을 옮겨야 한다. 그곳에서 환자는 가족들과 차근차근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영면실이나 임종실을 갖춘 병원이 거의 없다. 현재 강남 성모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 등 몇 군데밖에 없다. 보험처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돈 문제 때문에 못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
“그렇다면 비가역적 삶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해야 되나. 기독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봉사가 해답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산다’를 보길 권한다. 위암 판정을 받고 한 달밖에 살지 못하는 시청 공무원이 주인공이다.
 
30년 동안 지각이나 조퇴도 없이 근속한 이 공무원은 죽음 앞에서 번민한다. 환락가를 찾는 등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들을 시도하며 쾌락을 찾으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다가 죽기 전에 적어도 가치 있는 일을 이루겠다고 결심하고, 주민들이 과거에 요청했다가 공무원들의 무관심으로 실행하지 못한 어린이공원을 만들기로 한다. 그는 관리들을 찾아다니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결국 어린이공원을 만들어 내고, 공원의 그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작은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전력투구하고, 목적을 달성한 뒤 만족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떠난 것이다.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 성장의 기회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높은 차원으로의 도약이다”라고 말한다. 한국죽음학회는 한국인들의 ‘웰 다잉(well-dying)’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다. 죽음학은 결코 죽음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삶에 대한 학문이다. 죽음과 삶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삶과 죽음이 한 단어, 한 문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음과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길 바란다.
 
편집자주 IT전략연구원과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문화·예술적 창의력 배양에 초점을 둔 최고경영자(CEO) 교육과정 ‘퓨처코드 CEO포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포럼의 일부 강의를 요약해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인문학, 과학, 문화콘텐츠, 디자인 등에 특화한 강의를 만나 보십시오. 이번 호에는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의 강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전해 드립니다.
 
최준식 교수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템플대에서 종교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한국학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죽음학회 회장, 국제한국학회 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종교를 넘어선 종교> <죽음, 또 하나의 세계> 등, 역서로 <사후생(死後生)> 등이 각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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