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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니키 리

치열한 장난스러움으로 나를 찾다 내 예술은 나 자신을 갖고 노는 것일 뿐!

신동엽 | 155호 (2014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혁신, 자기계발, 인문학

이미 존재하는 목적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행동은 철저한 계산과 분석에 따라 이뤄진다. 차가운 이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는 창조적인 행동은장난스러움의 영역이다. 그러나 창조적 혁신을 낳는 장난스러움은 무의미한 유희나백수건달류의 빈둥거림과는 다르다.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장난만 가득했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모차르트는 사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워커홀릭이었다. 뉴욕에서 세계 최고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 니키 리 역시 치열한 장난스러움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고 이를 표현한다. 창조적 혁신을 원하는 조직, 기업들 역시 경계를 넘나들고 발칙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치열한 장난스러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1부 연재를 마칩니다.

 

한 젊은 한국 여성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한 여성을 중심으로 찍은 인물 사진이다. 머리를 황갈색으로 물들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청소년들의 사진도 있고, 누가 봐도 전형적 레즈비언으로 보이는 여성 동성애자들의 사진도 있으며, 교복을 얌전하게 차려 입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수다 떠는 여고생들의 사진도 있다. 또 길거리 흑인 힙합걸 모습도 있으며, 스트립바에서 춤추는 반라의 무희들 모습도 보인다. 또 행여 추위에 감기라도 걸릴까 모자를 쓰고 외투를 두껍게 껴입은 푸짐한 몸매의 백인 할머니의 사진도 있고, 월스트리트나 실리콘밸리의 글로벌 기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장을 차려 입은 프로페셔널 여성 경영자의 모습도 있으며, 야자수가 드리운 남태평양의 해변에서 화려한 꽃무늬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히스패닉 여성의 사진과 영국 펑크족 사진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진들은 초보가 찍은 듯 함께 찍힌 사람들의 모습이 잘려나간 것들도 다수 있다. 심지어 렌즈 초점을 잘못 맞춰 얼굴 윤곽이 여러 겹으로 번진듯한 이상한 사진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앨범을 정리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가위로 오려내고 자신의 모습만 남긴 사진 같기도 하다. 또 어떤 것들은 어린 청소년들의코스프레(코스튬 플레이)’ 장난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실은 이 모든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타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끊임없이 정체성을 바꿔가며 사진의 대상이 되는 획기적 창작모델을 선보인 이가 있다. 세계 미술계의 메카 뉴욕 화단에서 백남준 이래 한국이 낳은 최고의 시각예술가라는 극찬을 받은 세계적 아티스트 니키 리다.

 

장난스러움과 심각한 엄숙주의

‘톡톡 튄다는 표현이 시사하듯이 예술이나 과학, 기업경영 등 분야를 막론하고 창조적 인재들은 장난끼가 넘치고 엉뚱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게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 예술가 중 한 명인 모차르트를 다룬 밀포스 로만 감독의 명화아마데우스를 보면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철없는 어린애 수준의 장난으로 점철되고 있다. 왕궁의 동물박제 장식품을 가면처럼 뒤집어쓰며 좋아하기도 하고, 술집에서 만취한 채 친구들에 의해 거꾸로 들려 피아노를 완벽하게 연주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모차르트의 라이벌로 묘사된 살리에르가 작곡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살리에르는 의관을 정제하고 곧은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엄숙하게 기도를 한 후 마치 전투라도 하는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작곡에 임하며 좋은 악상이 떠오르면 즉시 감사 기도를 올린다. 평소에도 항상 장난만 치는 백수건달 같아 보이는 모차르트와 정반대로 살리에르의 일상 또한 수도승처럼 한순간의 허비도 없이 엄숙하고 심각하며 권위를 지키려 애쓴다. 그런데 결과는 역설적이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시대와 문화권을 뛰어넘어 여전히 전 세계 인류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주는 창조적 음악으로 극찬받는 데 비해 살리에르의 음악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범작에 그치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백남준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한국 예술가 니키 리

 

창조성의 원리에 대해 조직이론의 거장 마치(J. G. March) 교수는 1970년에 저술한바보스러움의 기술(technology of foolishness)’이라는 짧은 논문에서 이미 존재하는 목적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행동이 철저한 계산과 분석 같은 차가운 이성의 영역이라면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는 창조적 행동은 장난스러움(playfulness)의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거대한 피라미드형 관료조직이 지배한 20세기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은 바로 주어진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극도로 심각하고 엄숙하며 경건하기까지 한 현대 조직의 분위기에서 장난스러움은 바보처럼 보이기 십상이었으나 21세기 창조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목적을 찾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행동을 위해서는 이런 장난스러움이야말로 진정한 기술이다. 영미권 사람들과의 회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아이디어를 가지고 장난친다(play with ideas)’라는 영어표현을 생각하면 이런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 혁신을 낳는 장난스러움은 무의미한 유희나백수건달류의 빈둥거림과는 다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난스러움은엄숙주의심각함의 반대말이다. 즉 치밀하게 꽉 짜여진 기존의 틀과 규칙, 절차에 따라 주어진 일을 정해진 방법대로 기계처럼 수행하는 피라미드형 거대 조직의 분위기는 심각하고 엄숙하다. 이런 거대한 기계 같은 피라미드형 조직에서는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며 철저하게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질서가 지배하고, 구성원들은 항상 초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런 엄숙주의와 권위주의적 질서에 바탕을 둔 거대 피라미드형 조직이 대량생산적 효율성의 핵심 기반이었지만 결코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심각한 엄숙주의의 반대말로서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장난스러움은 주어진 틀을 훌쩍 벗어나 보고, 정해진 규칙이나 절차를 과감하게 어기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역발상을 서슴지 않고 시도하고, 대세를 거스르는 독특한 선택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행동을 말한다. 엄숙한 권위주의적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이런 자유분방한 행동은 기득권자들과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장난스럽고 바보스럽게 보이겠지만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창조성의 본질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필수 요건이 된다.

 

치열함이 창조적 장난스러움의 핵심

물론 창조적 장난스러움을 빈둥거림이나 느슨함과 착각해선 안 된다. 이것은 엄숙하고 심각한 권위주의적 질서에 순응하는 기계적 행동이 치열하다고 착각하는 오류의 반대 이미지다. 치열함과 엄숙주의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권위주의적 엄숙함은 경직성에 가깝다. 이에 비해 창조적 장난스러움은 모든 기존 질서와 고정관념을 넘어서기 위해 모든 역량과 감각을 총동원하고 집중하는 가장 치열한 행위다. 게으르게 빈둥거리다 운 좋게 떠오른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먹고 사는 건달 정도로 오해받기 쉬운 예술가들은 실은 가장 치열하게 불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타고난 천재적 재능으로 너무나 쉽게 뛰어난 음악을 작곡하고 평소에는 매일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장난치는 것으로 소일했던 것으로 인식되는 모차르트는 실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워커홀릭 중 한 명이었다. 모차르트가 35세의 짧은 생애 동안 작곡한 곡들은 보통 사람이 잠을 전혀 자지 않고 꼬박 24시간 일하더라도 단순히 악보에 옮겨 적는 데만 수십 년이 걸릴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다. 초인적 치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모차르트가 요절한 것은 신장 등 건강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밤새기를 밥 먹듯 하며 지나치게 무리하며 창작에 치열하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치열한 장난스러움이 권위주의적이고 엄숙주의적 기존 질서에서 부정적 오해를 받다가 결국에는 창조적 예술을 낳은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창조성의 대명사 피카소는 재기발랄한 장난스러움으로 창조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식사를 하고 남은 생선뼈를 그대로 작업실로 들고가 도예틀에 찍어서 접시를 만들기도 하고 어린 아들이 타고 놀던 세발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을 뒤집어 소머리 모양의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사실상 팝아트로 분류됐던 예술가들의 대부분은 이런 치열한 장난스러움이 그 창작의 핵심이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앤디 워홀은 스프 깡통들을 쌓아놓은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마오쩌둥이나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유명 인사들의 잡지 사진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로이 리히텐스타인은 만화의 화풍을 그대로 사용했고,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신호탄으로 극찬받는 뒤샹은 소변기를 그대로 작품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 또한 치열한 장난스러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작은 부처상이 TV 앞에 앉아서 열심히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유명한 ‘TV부처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또 작은 TV로 여성 첼리스트의 브라를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그 자신이 첼로가 되기도 했다. 백남준은 노년에도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던 클린턴 대통령이 초대한 만찬에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러 다가오자 속옷도 입지 않은 바지를 내려버려 주위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장난스러움의 절정은 그의 장례식이었다. 그의 아내와 친구들은 백남준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항상 하고 싶어 했던 장난을 쳤다. 예복을 잘 차려 입고 온 조문객 전원에게 자신이 매고 온 넥타이를 가위로 반 잘라서 백남준의 관속에 넣음으로써 조의를 표하게 했는데 값비싼 명품 넥타이를 매고 온 뉴욕 예술계의 거물들도 흔쾌히 이 거장의 마지막 장난에 동참했다고 한다.

 

필자가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창조적 혁신의 원리를 밝히고자 시도한 책인 <창조성의 원천>을 집필하기 위해 만난 20여 명의 세계적 예술가들 중치열한 장난스러움의 측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니키 리(Nikki S. Lee)였다. 니키 리에 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해외 미술계에서의 세계적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세계 미술계의 최첨단인 뉴욕 화단에서 니키 리의 위상은 백남준 이래 한국 예술가로는 최고라고 불릴 정도다. 니키 리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MOMA, 구겐하임, 스미소니언 등 세계 최고의 미술관들에 영구 소장되고 있으며 <뉴욕타임스>에서는 양면 전면에 그녀의 예술 세계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화단에서 니키 리는 슈퍼 스타급이다. 그러나 그녀는 국내 화단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이유가 뭘까? 한 미술평론가는 필자에게 니키 리가 우리나라 화단을 양분하고 있는 세력인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대가 아닌 중앙대 출신이어서 우리 미술계의 뿌리 깊은 파벌구조를 깨뜨리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학맥도 이유가 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필자가 볼 때 근본적인 이유는 니키 리의 모든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치열한 장난스러움을 엄숙주의와 권위주의적 문화가 지배해온 우리 사회와 예술계가 소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치열한 장난스러움은 피카소, 뒤샹, 앤디 워홀 등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이 개척한 이래 뉴욕과 같은 세계 미술계의 최첨단에서는 당연시되는 창조의 원리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니키 리의 치열한 장난스러움의 예술적 가치를 뉴욕 화단은 극찬하는 데 비해 엄숙주의와 권위주의적 문화가 지배하는 국내 예술계에서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인적 치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모차르트가 요절한 것은 신장 등 건강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밤새기를 밥 먹듯 하며 지나치게 무리하며 창작에 치열하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니키 리를 통해 치열한 장난스러움과 창조성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본명이 이승희인 니키 리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거창에서 자랐다. 그녀는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시초이자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진취적인 교육을 시도했던 거창고등학교를 다닌 후 1993년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전문학교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와 뉴욕대(NYU)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공부했고,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뉴욕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데뷔했다. 니키 리가 뉴욕과 세계 미술계를 매혹시킨 창조적 예술을 만들어내는 원리와 과정, 그리고 그 기반 메커니즘을치열한 장난스러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자.

 

자유분방한 청소년기

부모님들이 전혀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가족들 간 유난히 허물없고 정이 많은 분위기에서 자란 니키 리는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충만했을 뿐 아니라 장난끼 많고 고집 세며, 또래의 남자 아이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당차고 모험심 강한 소녀였다. 청소년기를 복잡하게 꽉 짜여진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거창에서 보낸 니키 리는 자연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지들이 근처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익명의 군중 속에 고립돼 자란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속에 깊이 배태된 분위기에서 자랐다. 특히 그녀는 친구가 많았는데 동성 친구들뿐 아니라 남자 친구들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활달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청소년기 니키 리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경험 중 하나는 거창고에 다닌 것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고 전영창 교장이진정한 교육은 자신을 온전히 상대에게 내어주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믿음에 기반해 만든 학교다. 학생과 교사들, 지역사회와 자연환경이 진정한 만남(encounter)을 갖는 곳, 또한 그것을 실현하는 대안적 교육을 위해 설립한 거창고에서의 학창 시절은 니키 리의 최대 자산 중 하나다. 거창고에서는 자율적인 삶, 자연친화적인 삶, 믿음이 있는 삶을 사는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비전을 추구해왔다. 따라서 절대로 학생들에게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는 금기사항을 부과하지 않으며 학생 개개인을 성숙한 인격체로 존중해 자율적으로 판단하게 한다. 또 산업사회의 도래로 단절된 인간과 자연의 진정한 만남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눈 오는 날이면 전교생이 근처 야산으로 나가 토끼몰이를 하는 것이 이 학교의 전통 중 하나다.

 

후일 니키 리의 예술관에 영향을 미친 거창고의 교육관 중에서 특이한 것은 고 전영창 교장이 남겼다고 전해지는직업선택 10라고 불리는 미래 경력설계에 대한 지침이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월급이 적은 곳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새로 개척해야 하는 황무지 같은 곳을 택하라. 5)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피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 약혼자가 결사 반대하는 곳이면 주저하지 말고 택하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니키 리는 이 직업선택 10계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며 자신의 특이한 선택도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출세나 이익보다 이상과 꿈을 강조하고내 인생은 내 손 안에 있다’ ‘군중의 눈으로부터 해방되자’ ‘과거로부터 해방되자’ ‘참 자유인이 되자등의 거창고에서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성장한 니키 리는 대학에 진학할 때 일반적인 인기 학과가 아니라 자신이 흥미와 열정을 느끼던 시각예술과 사진예술을 더 공부해보기 위해 중앙대 사진학과를 선택한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한 니키 리는 사진예술 공부 못지 않게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생활의 매력과 재미에 푹 빠져 그 나이 또래의 대학 신입생들처럼 대학생활의 낭만과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데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니키 리는 그녀 특유의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의 장점을 십분 발휘해 사진이나 미술뿐 아니라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훗날 그녀의 창작활동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타인과의 관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뉴욕을 만나다

1993년에 중앙대를 졸업한 니키 리는 그야말로 불쑥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다.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뉴욕에서의 생활은 니키 리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줬다. 미술, 패션, 음악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이 최초로 시도되고 전 세계로 확산되는 세계 문화예술의 허브인 뉴욕은 그야말로 최첨단 액션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인종의멜팅팟(용광로)’으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럼 없이 뒤섞여 살아가는 역동적인 세계 도시였다.

 

“처음에는 FIT가 패션 전문 학교라 패션 사진가를 해야겠구나 생각했는데 뉴욕 가서 막상 패션 스쿨에 들어가니까 이런 걸 평생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했어요. 이유는 첫째, 패션은 비즈니스여서 저랑 안 맞고요. 둘째는 그 환경이 성향에 잘 안 맞았어요. 제가 모델들이랑 잘 어울리고 잘 맞는 성향이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재미가 없었어요.”

 

일단 패션 쪽이 자신의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되자 니키 리는 신속하게 대안을 찾았고 영화, 사진, 음악, 연극, 디자인 등 응용예술 분야의 명문인 뉴욕대(NYU) Tisch School 사진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우연히 진학하게 된 NYU 사진학과에서 니키 리는 전혀 의도치 않게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는 뉴욕의 순수 예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Projects 시리즈로 뉴욕 미술계를 매혹시키다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니키 리는 우리나라 미대생들도 모두 개최해야 하는 졸업전시회에서 그녀의 작가 경력에 결정적 계기가 될 작업을 우연히 시도하게 된다. 니키 리를 단숨에 뉴욕 화단의 스타로 만들어준 Projects 시리즈는 만일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심각하고 엄숙하게 고민했더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야말로 재기발랄한 창조적 작품이다. 니키 리는 전업으로 창작에 매진하는 전문 작가들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졸업 필수요건을 채우기 위한 전시를 준비했을 뿐이었다. 아무런 제약이나 손익에 대한 계산 없이 자신이 어릴 때부터 상상해오던 재미있는 모습들을 자신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품에 담아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가끔씩은 자신이 실제와는 다른 나이나 인종, 직종, 혹은 성별 등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여자 어린이들은 상상 속에서 공주가 돼보기도 하고, 배우가 돼보기도 하며, 간호사가 돼보기도 한다. 니키 리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바꿔보기로 한다. 아이디어 자체는 장난스럽고 자유분방하며 기발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행해서 작품으로 구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치열했다.

 

Projects로 이름 붙인 이 연작 시리즈에서 니키 리는 자신이 사진사로서 어떤 대상을 찍는 전통적 의미의 사진예술이 아니라 자신이 변화무쌍하게 정체성을 바꿔가며 피사체로서 사진예술의 대상이 되기로 한다. 즉 어떤 대상을 어떻게 잘 찍을까를 고민해온 200년 가까운 세계 사진예술의 근본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그야말로 파격적인 시도였다. 게다가 그녀가 상상만 해오던 다른 정체성의 사람들의 핵심을 표현하기 위해 히스패닉계 중년 아줌마, 레즈비언, 스트립 댄서, 대도시 여피족, 백인 할머니, 영국의 펑크족 등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외모와 행동, 습관의 특징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후 니키 리는 완벽하게 그들처럼 살을 찌우거나 빼고, 분장을 하며, 옷차림을 바꿔서, 그들이 사는 환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사진에 찍혔다’. 실세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니키 리는 그녀가 궁금해하고 상상해본 다양한 정체성들을 작품을 통해 완벽하게 연출해냄으로써 무한한 수의 정체성을 언제든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한 뉴욕대 교수의 소개로 니키 리는 졸업하기도 전에 뉴욕의 대표적 갤러리 중 하나인 레슬리통크나우 갤러리(Leslie Tonkonow)에 전속 아티스트로 스카우트됐다. 뉴욕 평단의 반응 또한 극찬 일색이었고 <뉴욕타임스>는 후에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한 특집 기사를 양면 전면에 걸쳐 싣기도 했다.

 

“졸업을 채 하기도 전에 갤러리에 픽업이 돼서 전시회 하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이 전시가 <뉴욕타임스>에서 이슈가 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저는 정작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놀랍거나 당황하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아무런 어젠다가 없었기 때문에 당혹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뉴욕타임스>에 기사가 났다고 해도 귀찮아서 사러 가지도 않으니까 제 갤러리 딜러가 미치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누가 사든가 말든가. 내가 인생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나의 최대 관심은 그냥 나예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니키 리는 다양한 정체성을 탐구하는 Projects 시리즈를 계속 작업했고 뉴욕 평단은 열광했다. 우선 니키 리의 작품이 단숨에 뉴욕 화단을 사로잡은 것은 워낙 발상 자체가 기발하고 창조적이며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그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1990년대 후반 뉴욕의 문화적 코드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니키 리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작품들을 통해 그녀 자신을 과감하게 치열한 장난스러움의 대상으로 던져주고 그녀 자신에 대해 그녀만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딱 맞아 떨어졌어요. 작업했을 때, 시뮬레이션이 굉장히 유행을 했고,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의들이 있었죠. 그때 당시에 다중 문화(multiple culture), 다중 정체성(multiple identity) 등의 이슈가 제기되고 있었는데 제 작품과 딱 맞아떨어졌어요.… 저는 진짜 아티스트가 싫었어요. 그 당시 어렸을 때 생각에, 고등학교 때는 아티스트 하면 담배나 피우고 있고, 어둡고 해서 저는, 난 정말 예쁘게 살고 싶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이런 마음을 따라 가다가는 나는 절망 속에 빠질 거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반대 지점으로 나가보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나름 반대방향의 아름다운 세상이라 생각한 패션으로 갔는데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 결국은 그 자리로 돌아오더라고요. 작품을 하면서도 내가그래 졸업작품까지만 하는 거야. 여기에 빠지면 안 돼. 내 인생에 마지막이야라고 생각하고 이걸 해보자라고 했는데 이제까지 내가 인생에서 느끼지 못한 뭔가를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 작품 만들기에 치열해졌어요. ‘Projects’를 두세 개 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고 어느 순간 치열해지면서남들이 뭐라 그래도 나는 이걸 계속해나가야 될 것 같아라고 생각했죠. 그 당시에는 이걸 갤러리든 어디든 누구에게 보여준다 이런 개념도 없었어요.”

 

 

 

 

 

 

 

 

 

Projects 시리즈

 

Parts Layers 시리즈로 끊임없이 진화한 치열한 장난스러움

Projects 연작을 통해 다양한 대안적 정체성의 문제를 치열하게 탐구하기 시작한 니키 리는 후속 작업인 Parts 시리즈에서는 관심사를 자연스럽게정체성의 사회적 원천으로 옮겨갔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은 각자가 내부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연결되느냐라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의 사회적 원천에 대해 재미있는 장난을 쳐본다면 어떨까, 만일 주위에 연결돼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단절된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할까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니키 리는 즉시 이를 작품에 구현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한다. 2000년대 중반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이게 바로 니키 리의 뉴욕 화단에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준 Parts 시리즈다.

 

 

 

 

 

 

Parts 시리즈

 

Parts 작업 때만 해도 제가 남자친구랑 되게 힘들었어요, ‘이게 뭔가. 그리고 왜 내가 똑같은 니키인데 이 남자한테는 하루 종일 전화 기다리면서 힘들어 하고 그가 전화하면 맨날 짜증을 내는 걸까? 아 인간이 왜 이러는 거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또도대체 사랑의 한순간이 너무 허무하다. 정말 다 줄 것같이 만나놓고 또 헤어지고, 1년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고. 이게 도대체 뭘까.’ 그런 생각들을 했죠. 그게 그때 제 얘기였고 제 이슈였던 거죠. 그러면서 그 작업이 나온 거죠.”

 

Parts 시리즈에서 니키 리는 사귀는 상대 남자에 따라 달라지는 한 여자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여자는 니키 리 자신이다. 그런데 Parts 시리즈에서 니키 리와 다양한 남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으나 그 어느 사진에도 니키 리와 사귀는 남자들의 모습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며 단지 니키 리와 접촉하고 있는 그의 손이나 다리 등 신체의 일부만 귀퉁이에 나온다. 즉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면 각 개인의 정체성은 파트, 즉 일부만 유지되며 결코 그전과 같은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사회학자들이 어려운 이론들로 심각하게 연구하는 주제다. 그러나 니키 리는 단지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고민하던 자신의 이야기일 뿐 결코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고 가볍게 말한다.

 

Parts 시리즈는 또 한번 뉴욕 평단을 매료시키며 니키 리는 뉴욕의 대표적 갤러리인 시케마 젠킨스 갤러리(Sikkema Jenkins & Co.)로 소속을 옮긴다. 이어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흥미진진한 작업인 Layers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작업에서 니키 리는 다양한 타인들이 보는 개인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즉 각 개인의 정체성이란 각자가 스스로 규정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보는 타인들이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은 무수하고 다양하므로 동일한 사람이라도 각 타인이나 집단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다르게 인식한다면 그 사람의 실제 정체성은 수많은 타인들이 인식한 다양한 정체성 이미지들이 겹겹이 쌓여 층(Layers)들을 이뤄서 형성된다고 본 것이다.

 

 

Layers 시리즈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니키 리는 세계 각국의 길거리 초상화 화가들을 그녀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표현해줄 타인으로 선택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남미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길거리 초상화 화가들에게 반투명 종이 위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 다음 그 초상화들을 겹쳐놓고 빛을 비춰 떠오르는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어 합성한 작업을 한 것이다. 동일한 대상인 자신을 보는 다양한 문화권들의 시각 이미지들이 층을 이뤄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작품화한 것이다. Layers 시리즈는 또다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적 아티스트로서의 니키 리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진작가가 아닌 ‘나’와정체성에 진정성으로 천착하는 아티스트

이런 면에서 니키 리를 사진작가로 분류하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 예술가로서 니키 리의 장르 정체성은 그녀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딱 잘라 규정하기 어렵다. 어떤 평론가들은 그녀를 사진작가로 분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퍼포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그녀가 사진을 예술매체로 자주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녀를 사진작가로 분류하는 것은 너무 좁은 시각이고 간단하게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녀는 사진을 예술표현의 매체로 많이 사용했지만 그녀가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고 그 피사체, 즉 사진의 모델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작가는 아니다. 또 앞에서 설명했듯 Layers에서는 세계 각국의 길거리 초상화 화가들이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니키 리의 예술적 정체성이 모호한 것은 회화, 조각, 설치 등 시각 예술의 세부 분야들 간의 경계가 무너진 현대미술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백남준도 흔히 비디오 아티스트로 분류되지만 회화도 하고, 작곡도 하며, 연주도 했으며, 60년대 세계 예술계를 강타한 플렉서스 운동의 선봉에 서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퍼포먼스를 무대에서 벌이기도 했다. 현재 활동 중인 또 다른 우리나라 출신 세계적 예술가 서도호 또한 일반적으로 설치미술가로 분류되지만 원래 동양화가였다가 미국에 건너가 서양화를 전공하다 설치미술로 진화하면서 정형화된 장르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니키 리를 사진작가라기보다는자신의 정체성이라는 난해하고 심각한 주제를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가지고 노는(play)’ 치열한 장난스러움으로 세계적 최고의 수준에 오른 창조적 아티스트로 본다. 니키 리가 사진이라는 시각예술의 특정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 매체가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 조작된 사실기록 영화라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인데 니키 리는 이 당연시되는 장르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연출된 다큐멘터리를 예술의 한 형태로 발전시켰다. 니키 리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아이디어가 잘 구현된 예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여배우들이란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분 등 각 세대별 대표적 여배우들이 본명 그대로 등장하며 실제로 각 여배우들에게 일어났던 개인적 일들이 거론된다. 이들이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적 허구인지 혼동에 빠지게 된다. 니키 리가 제작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A.K.A. Nikki S. Lee’는 새로운 예술 형태의 가능성을 보여준 혁신적 아이디어로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전시장인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에서 2006년 상영되며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니키 리는 자신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A.K.A. Nikki S. Lee’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논 것, 즉 장난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치열한 장난스러움이 잘 보여지는 대목이다.

 

내가 인생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나의 최대 관심은 그냥 나일 거예요.

내가 재미있는 것, 내가 행복한 것.

그것만 이뤄지면 그 다음에 나오는 파생되는 효과 같은 것들은 관심 없어요.

 

A.K.A. Nikki S. Lee의 경우, 사람들은 제 작업을 보면서 니키는 레즈비언이라는 등 오해를 해요. 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그냥 내 자신을 갖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아티스트 Nikki Lee를 가지고 두 사람을 설정해서 제가 역할 놀이를 하는 거예요. ‘당신들은 아티스트 Nikki Lee를 모를 거예요라고 도전하며, 한편으로는당신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이렇게까지 역할 놀이가 가능한데 도대체 뭘 사실로 믿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예를 들어 어느 날 저녁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가슴 파인 옷을 입고 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어머, 저 사람 술집 아가씨인가 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저는어머, 이런 옷차림 보고 믿는 거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Fuck identity! 너희들이 그걸 진실로 믿었니?’ 이런 식인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Projects, Parts, Layers와 같은 니키 리의 모든 작품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A.K.A. Nikki S. Lee의 주제도 바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니키 리에게 예술이란 예술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치열한 진정성이 그 핵심이다. 따라서 니키는 예술가 자신만의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없는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고 본다. 바로 그것이 예술 작품에서 독창적 창조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누구의 삶과도 같을 수 없는 각자 자신만의 독창적 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스토리를 진정성을 가지고 표현할 때 창조적 예술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키 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미술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잘 팔릴 만한 소재나 기법, 사조를 따라 작업을 하는 대세추종형 예술이다. 그녀는 반대로 예술가 자신의 삶을 통해 매일매일 축적된 내면의 스토리가 밖으로 분출돼 나오는 작품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면에서 니키 리는 결코 엄숙하거나 권위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자신과 타인에게 극도로 진지하며 솔직하고 진정성으로 충만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어떤 관습이나 유행하는 대세도 당연시하지 않으며 과감하게 넘어서서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는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한다. 재기발랄하고 자유분방하며 장난기 넘치지만 그 모든 과정은 극도로 치열하다. 무엇보다 니키 리는 그녀 자신만의 스토리에 완벽하게 충실하다. 아무리 평단이나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라도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완벽하게 믿지 않으면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

 

“아무리 비평가나 갤러리, 콜렉터들이 좋아할 것 같은 작품이라도 아티스트 자신이 진정으로 믿지 않으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아요. 좋은 예술이 탄생하려면 완벽한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최근에 어떤 작업을 하나 시작했다가 그만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에요. ‘애완동물이 사람에게 뭘까를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애완동물들이 죽으면 박제하기까지 하니 인간의 집착 같은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제가 박제된 개들을 가져와서 합성 이미지를 만들어봤어요. 렌티큘러(lenticular) 렌즈로 여러 각도로 찍은 이미지를 합성해 3D 이미지를 만들었어요. 비주얼(visual)도 좋았는데 한계를 느꼈어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비주얼도 좋고 이슈도 좋고 하니까. 그런데 내가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고, 내가 그렇게 외로운 상태도 아니고, 도대체 아무리 봐도 아니더라고요. 내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내 이야기, 내 느낌이 아닌 거죠. 오히려 남편으로 만들었으면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남편을 애완동물 상태로 바라보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이 작업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거예요. 쥐어짜는 것 같았어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죠. 그래서 때려치워버렸어요. 아깝죠. 속상해요. 왜 내가 이걸 가지고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을까? 그런데 안돼요. 머리로 작업했던 거예요. 그런 한계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저한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 역시 이건 아니구나. 머리로 접근하는 건 아니구나깨닫는 순간 6개월간의 작업들을 주저 없이 폐기해버렸어요.”

 

세계를 놀라게 할 니키 리만의 또 다른 치열한 장난스러움을 기다린다

니키 리를 실제로 만나보면 엄숙한 자세와 심각하게 고뇌하는 표정으로 세계적 작가로 출세하겠다는 야심에 가득 찬 스테레오타입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항상 유쾌하고 솔직하며 장난기 넘친다. 그녀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준 창조적 작품들은 이런 그녀의 진정성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산출물일 뿐 명성이나 원대한 야망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저는 원대한 목표 같은 것은 없어요. 아마 내가 인생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나의 최대 관심은 그냥 나일 거예요. 내가 재미있는 것, 내가 행복한 것. 그것만 이뤄지면 그 다음에 나오는 파생되는 효과 같은 것들은 관심 없어요.… 사회적 이슈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삶의 본질을 건드려야 하는 거죠. 예술의 기능이 그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고, 저 같은 경우도 제가 감히좋은 작업들을 해 왔구나라고 내 스스로 평가를 하는 것은잘 팔았을 때가 아니예요. 작업을 10년 동안 하면서 내가 많이 변한 것을 느꼈어요. 처음에 저는 그저 나밖에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기도 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랬다가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이 작업이 들어갔는데, 하다 보니 나를 좀 더 알아보려는 욕심 때문에 남한테 관심이 간 거죠. 어느 순간인격적으로 옛날보다는 훨씬 더 남들을 배려하고 있구나.’ 작업을 통해서 내가 성숙돼 가고 있는 나의 지점들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작업에 대한 만족감이 오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니키 리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매력이 넘치는 아티스트다. 외국인이 좀처럼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뉴욕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세계적 작가이므로 분명 우리말보다 영어를 훨씬 많이 쓰고 가치관이나 태도가 완전히 서구화된 여성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기 쉽지만 실제로 만나본 니키 리는 일상생활에서도 권위주의나 허세가 전혀 없이 소탈하고 솔직하며 거침없고 털털한 한국 여성이었다. 엄숙한 권위주의적 위계질서가 지배해온 남성위주 문화의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빛을 발할 기회 자체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피겨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나 LPGA를 압도하고 있는 여성 골퍼들, 김지영, 김주원 등의 세계적 발레리나들, 진은숙과 김지영 등 세계 최고의 작곡가들, 그리고 정경화, 홍혜경 등을 필두로 끝없이 배출되고 있는 여성 연주자들 등 실은 전 세계 어떤 나라의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과 비교해도 월등하게 명민하고, 재기발랄하며, 창조적이고, 아름다우며,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필자가 만나 본 니키 리는 이런 한국 여성의 수월성과 매력,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와 조직들이 21세기를 맞아 창조성이라는 화두에 열광해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창조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나 창조적 혁신의 창출이 그리 만족스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혹시 남성위주의 엄숙주의와 권위주의가 지배해온 전통적 사회와 조직 체제는 그대로 유지한 체 유행하는 화두만질서와 효율성대신창조성과 혁신으로 대체한 데서 오는 괴리 때문이 아닐까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의 대상으로 끊임 없이 창조적 작품을 발표해 세계 미술팬들을 매혹시켜온 한국의 여성 아티스트 니키 리. 그녀가 또 어떤 자신만의 새로운 스토리와 치열한 장난스러움으로 세계 미술계를 다시 놀라게 할지 기다려진다.

 

필자 주

귀한 시간을 아낌없이 인터뷰에 내어주신 니키 리 작가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신동엽 교수는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스프링국제실내악축제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국립발레단 등 여러 문화예술단체들을 자문해왔다. 조직이론 분야 최고 학술지인 와 문화예술 분야 세계적 학술지인 등에 논문을 실었다. 최근에는 세계적 예술가들의 창조 프로세스를 심층 분석한 <창조성의 원천>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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