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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中有訓

그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을지니…

고연희 | 140호 (2013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호피(虎皮)를 걷어내다

 

그림 제목은횡거철피(橫渠撤皮, 장횡거가 호피를 걷어내다)’이다. 그림 속의 동자가 호랑이 가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앙증맞도록 작지만 인상적이다. 조선왕실에서 18세기에 제작된 고전학습서 <예원합진(藝苑合珍)>을 펼치면 오른쪽 페이지에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의 섬세한 필적으로 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왼쪽 페이지에는 대학자 윤순(尹淳)의 필적으로 다음의 글이 적혀져 있다.

 

장횡거가 서울에서 호피에 앉아 주역을 강의하니 듣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어느 저녁 두 정씨 선생(정호, 정이)이 와서 주역을 논했다. 다음 날 장횡거는 호피를 거두고는내가 지난 날 강의한 것은 도를 혼란하게 한 것이라, 두 정씨가 근래에 왔는데, 도를 밝게 알고 있어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더라. 그대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하고 섬서지역으로 돌아갔다.

 

- <성리대전>

 

 

 

장횡거(張橫渠)는 중국 송나라 학자다. 그는 학문이 높고 강의의 내용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 두 학자가 그에게 왔는데 그가 보니 자신보다도 나은 경지를 터득하고 있었다. 장횡거는 그 다음 날로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났다. 장횡거의 행동은 너무나 쿨 해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그는 수도를 떠나 곧장 고향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장횡거의 본명은 장재(張載, 1020∼1077). 장횡거라는 이름은 조선후기 학자 홍대용(洪大容)이 수백 년 전의 장횡거가 지동설을 논했다고 언급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알려진 인물이다. 실로 장횡거의 저서 <정몽(正蒙)>을 살피면땅이 하늘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돈다고 하며 별과 달의 움직임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찰과 묘사를 읽을 수 있다. 이 한 가지 예로 장횡거의 학문의 깊이와 정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학자들에게 장횡거는 과학자였다기보다는 성리학자였다. 장횡거는 주자(朱子)가 추숭해 모신 학자의 한 사람이었기에 성리학의 대학자로 존경받았다. 위 글에서 두 정씨 선생으로 등장하는 학자들, 곧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 1033∼1107)는 주자가 더욱 높이 추앙한 학자들이다. 장횡거, 정호, 정이 등의 학문과 사상을 토대로 주자의 철학이 완성될 수 있었다.

 

뛰어난 학자 장횡거가 뛰어난 후배 정씨 형제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를 선뜻 내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는 만인의 귀범으로 판단됐다. 조선의 왕실에서 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한 까닭이다.

 

호피(虎皮)는 무엇인가

 

옛 사람들은 범가죽 외에도, 곰가죽, 노루가죽, 너구리가죽, 양가죽 등 동물 가죽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예전에도 동물 가죽은 귀한 물건이었다. 범가죽에는 호피(虎皮)가 있고 표피(豹皮)가 있었다.한반도의 산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호피나 표피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주변국의 요구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인들은 한국의 범가죽 얻어가기를 몹시 좋아했다. <동사강목>에 기록된 선혜청의 물품명에는 표피 130, 호피 80, 생노루 30, 수박은 1냥 등의 가격표가 제시돼 있다. 호피나 표피 등의 물건은 가격도 비쌌지만 많은 양이 나라에 공물로 받쳐져야 했기에 더욱 더 귀한 물건이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충성스런 언행을 한 신하들에게가상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노라는 뜻을 전달하면서 호피를 선물로 내리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이 호피를 하사한 기록이 수백 건에 달한다. 말하자면 명신(名臣) 혹은 충신(忠臣)으로 인정받은 이라면 의당히 임금으로부터 받은 호피를 소유하고 있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 호피를 깔고 앉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호피는 이를 누릴 만한 사람의 물건이었고, 특히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하는 상징적 물건이었다. 호피는고비(皐比)’라고도 불렸다. 주자가 일찍이장횡거 초상화에 부친 찬송시, ‘횡거선생찬(橫榘先生贊)’과감하게 고비(皐比)를 거두시고, 한 번 변하시니 도()에 이르셨도다라고 지적했다. 이 말은 이 그림의 행적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문인들은 선생의고비아래서 가르침을 듣고자 한다고 말하곤 했다. 고비는 곧 호피를 일컫는 오래된 말로 스승의 자리를 뜻하는 말이 됐다. 이덕무는 후학들에게 장횡거의 행적을 본받으라 가르쳤다. “고비를 걷어내는 일에 인색하지들 하지 말게(省尤莫吝掇皐比)”라고.

 

그치고 물러가다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한 뒤에 편안함이 있고, 편안한 뒤에 생각하게 되고, 생각한 뒤에 얻음이 있다라는 말이 <대학(大學)>에 나온다. <대학>사서삼경사서중 하나로 조선의 학자라면 대개 암송하던 책이었다. 이 말의 출발은그칠 데를 안다(知止)”이다. ‘지지’(知止)란 알기도 어렵지만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칠 데를 알려면 자신의 능력과 기력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릇이 작고 욕심이 많아 양보할 줄 모르면 망신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노자(老子)>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만나볼 수 있다.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知足不辱), 그칠 데를 알면 위태롭게 되지 않으리라(知止不殆).” 그칠 데를 알고 물러서라는 훈계는 유가의 경전이나 도가의 경전이 가리지 않은 가르침이었다.

 

조선후기에 널리 읽혔던 소설 <수호지(水湖志)>를 보면 장횡거와 반대방식의 인물, 즉 지지(知止)를 모르고 버티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인물의 전개가 극단적으로 제시돼 있다. 양산박의 처음 두령 왕륜이 임충의 능력을 인정하거나 포용하지 못한 결과, 임충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옛 역사에 전하는 열전(列傳)류 이야기 속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도 때를 알아 물러났던 공신들의 지혜로움이 기록돼 있다. 이들은 물러남으로써 자신을 지켰을 뿐 아니라 가족을 지켰다. 유교의 경전과 도가의 경전, 소설과 역사서에서 모두 그칠 줄 알라는 경고와 가르침이 끊이지 않았건만 오늘날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그칠 줄 모르는 어른이 많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어르신도 사실상 적지 않다.

 

뛰어난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장횡거는 정이와 정호 형제의 출현을 보고 두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림 속 동자가 들고 선 값비싼 호피(虎皮), 그것은 권력의 자리를 단숨에 걷어낼 줄 알았던 장횡거의 소탈한 현명함을 돋보이도록 한 장치이자, 완곡한 가르침이다.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lotus126@daum.net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홍익대, 연세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저자다.

  • 고연희 고연희 | - (현) 서울대 연구교수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lotus12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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