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은 테니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라이벌이다. 피트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 스테판 에드베리와 보리스 베커, 존 매켄로와 지미 코너스 등 테니스 역사를 장식한 많은 라이벌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조합도 이처럼 많은 주목을 받진 못했다.
“또 나달과 페더러야?” 2011년 프랑스 오픈의 결승자가 확정됐을 때 많은 테니스 팬들이 한 말이다. 두 사람은 2000년대 중반부터 세계 테니스계를 양분해왔다. 페더러는 2003년 윔블던에서, 나달은 2005년 프랑스 오픈에서 처음 우승했다. 나달의 첫 우승 이후 올해 프랑스 오픈까지 총 25번의 메이저 대회가 열렸다. 둘은 이 중 무려 23회의 우승(페더러 13회, 나달 10회)을 나눠 가졌다. 다른 선수들은 우승은커녕 결승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했다.
20대 후반이 된 페더러의 기량이 서서히 하락하면서 두 사람의 대결 구도는 한풀 꺾이는 듯했다. 그러나 페더러는 올해 41연승을 구가하며 화제를 모은 세계 2위 노박 조코비치를 준결승에서 꺾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둘은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또 명승부를 연출했다.
정교함과 기량을 앞세운 ‘신사’ 이미지의 페더러와 저돌성과 힘을 앞세운 ‘야수’ 이미지의 나달의 대결은 테니스 전체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둘의 경기에는 항상 엄청난 스포트라이트와 거액의 스폰서십이 몰린다. 강력한 적수인 서로를 꺾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원래도 좋은 두 사람의 기량이 더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 데뷔 초기에 비해 나달의 서비스가, 페더러의 백핸드가 몰라보게 좋아진 주요 원인으로 둘의 경쟁 구도를 꼽는다.
선의의 경쟁과 상호존중만 있다면 라이벌처럼 개인과 조직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적인 도구도 없다. 다른 상대보다 라이벌과 싸울 때 훨씬 더 집중하고 노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때 쓰인 파라고네(paragone)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로 풀이하면 비교(comparison)에 가깝다. 르네상스 시대의 세력가들은 두 명의 예술가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일을 즐겼다. 서로가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경쟁을 유도한 셈이다. 시스티나대성당을 건축할 때 교황의 명을 받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당연히 둘의 예술혼도 불타 올랐다.
국민 MC로 꼽히는 유재석과 강호동 역시 2000년대 중반부터 2강(强)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공중파의 주요 예능 프로그램을 두 사람이 독식한 지 꽤 오래됐지만 2인자 그룹에 속하는 수많은 MC 중 누구도 둘과 대적하지 못하고 있다. 나달과 페더러처럼 두 사람의 캐릭터 차이도 뚜렷하다. 유재석의 코드가 덕장, 배려, 경청이라면 강호동의 코드는 맹장, 유머, 투박이다. 둘이 워낙 명확한 대립각을 형성하다 보니 시청자들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데 익숙하다. 새로운 MC가 나와도 둘 중 하나의 ‘미투(me too)’ 상품으로만 여길 뿐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코카콜라는 1886년, 펩시콜라는 1898년 설립됐다. 100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음료업체가 등장했지만 둘의 아성을 깨지 못했다. 콜라를 만드는 데 엄청난 신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아할 정도다. 강력한 라이벌 구도로 두 회사의 마케팅 비용 지출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대신 100년 동안 세계 어느 시장에서도 다른 콜라업체는 살아남지 못했다. 성별, 인종,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소비자들이 ‘콜라는 코크(Coke) 아니면 펩시(Pepsi)’라는 대결 구도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력한 라이벌은 그 자체로 높은 진입 장벽의 기능을 한다. 또 훌륭한 마케팅 수단이자 스토리텔링의 좋은 소재다. 충성도 높은 고객층, 즉 강력한 팬덤(fandom)을 만들 때도 더없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기업은 라이벌 구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데 서투르다. 소모적인 가격 경쟁, 상대방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등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는 식으로만 접근한다.
축구에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쟁이 없다면, 야구에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쟁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무조건 1위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강력한 2강 구도를 만들어 다른 경쟁자가 애초에 진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게 더 현명할 수 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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