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상품 기획팀에 들어온 후 오늘처럼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는 처음이다. 아침에 한 차례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보고서 준비 시간을 며칠 더 얻게 된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본격적인 작성에 들어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향후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제품을 고민한 결과, ‘개인’ ‘감성’ ‘건강’이라는 키워드를 찾을 수 있었다.
제품 구상을 마친 뒤 보고서를 쓰려고 하는데 또 막막해졌다. 이번에는 워드프로세서 문서가 아닌 파워포인트로 작성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많은 생각을 글과 도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간혹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회의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냥 키워드만 적어놓고 토의하거나, 문서의 일부를 복사해 붙이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서술형 보고서라면 있는 내용을 논리적으로 나열만 해도 될 것 같은데…. 파워포인트로 작성하려니 어떤 제목을 써야 할지, 어떤 말은 쓰고 어떤 말은 빼야 할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장님 보고용이라고 하니 부담도 더 컸다.
나름대로 파워포인트 보고서 작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웹사이트와 카페에 가입하고, 서식 전문 사이트에서 템플릿을 다운받기도 했다. 그런데 필요한 양식을 찾기도 쉽지 않고, 쓸 만하다 싶은 것은 내 실력으로는 수정 자체가 불가능한 도형이 많아 제대로 써먹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또 막상 쓰려고 하니 글자 크기와 글씨체는 어떻게 할지, 도형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관련 사진도 있어야 할지 등등 평소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작은 고민들까지 방해를 했다.
결국 유 대리님에게 예전에 썼던 파워포인트 기획안 샘플을 하나만 달라고 한 것이 오늘 아침의 사단을 만들었다.
“아니, 그렇게 잘나신 분께서 왜 나한테 부탁을 할까? 통계 분석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파워포인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아마도 지난번에 나한테 일을 맡긴 것 때문에 이 과장님한테 한소리 들은 것 같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고 능력은 더 뛰어난 상사한테 야단맞은 심정이야 오죽할까. 그래도 그렇지, 자기를 도와준 사람한테 이러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저,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제가 뭘 잘못했죠?”
“이 과장한테 네가 나보다 일을 더 잘한다고 그랬다면서?”
“!!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유 대리님 처지가 난처해질까 봐….”
“네가 더 잘하는 거면, 나는 통계도 못하는 바보냐? 그래, 그렇게 선배를 밟으니 기분 좋든?”
참자, 참자, 참자. 참으려고 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는 가운데 임 주임이 곁눈질로 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에게 내 정의감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 대리님! 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할일 많아 죽겠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떠넘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한테 화풀이 하시는 겁니까? 제가 일을 제대로 못 해드렸어요? 제 일까지 미뤄가면서 다 해드렸잖아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실 뭐 하나 제대로 하시는 것도 없잖아요. 후배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뭐, 뭐야? 이 자식이!”
“그만들 해!”
김 팀장님이 우리가 싸우는 광경을 모두 목격하고 계셨던 것이다. 결국 팀원 모두 팀 내 직위와 역할, 정확한 업무 분담과 기강 확립에 대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기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전원이 업무 파악 보고서를 작성하고, 출근 시간을 한 시간 당겨 매일 일과 시작 전에 업무진행 회의를 해야 하는 ‘숙제’도 떨어졌다.
결국 내 힘으로 어렵사리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이 과장님의 표정이 곱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