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우연이 다 필연이 되진 않는다. 우연은 우연으로 흘러 잊혀지는 일이 태반이다. 오직 특별한 우연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와 공명하고 있다는 일대 각성에 이르게 한다. 그 우연은 이내 우리의 소명(召命)이 된다. 우연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연을 해석할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그 우연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춰 선다. 마하트마 간디의 마리츠버그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그런 일이 간디에게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당시 그곳에서 1등칸에 타고 있는 유색인종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수모였다. 그런데 어째서 간디만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던 걸까?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난과 착취는 만연해 있었고 누구나 아픔의 현장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왜 유독 체 게바라에게만 잊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각인됐을까?
우연은 영혼의 각성을 촉구한다
우연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우연은 말 그대로 뜻밖에 찾아온 일이지만, 그 일을 맞이하는 순간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제 발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끌림은 실수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원형 이미지에 대한 해법으로 신화에 천착해온 조셉 켐벨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그 주름의 골은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간디는 마리츠버그 사건 앞에서 홀연 각성한다. 그 우연한 사건은 영혼의 각성을 촉구하는 ‘전령관’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는 모험에의 소명을 깨닫는다. 마리츠버그의 우연은 그에게 역사적 사명의 수행을 촉구하고 있었고, 간디는 정신적 통과의례를 거쳐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너무 좁아 더 이상 그의 영혼의 크기에 적합하지 않게’ 됐다. 그는 바야흐로 또 하나의 삶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캠벨은 이런 역사적 소명을 받는 장소나 사건이 대개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 심연으로 상징되는 어둡고 험하고 추한 곳일 때가 많다고 말한다. 간디가 마리츠버그에서 떨며 지낸 하룻밤, 체 게바라가 가난한 노동자 부부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겪은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하룻밤, 박원순 변호사가 감방에서 지낸 시기는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특별한 고통의 순간들이었다.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와 분리될 때의 고통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분리와 탄생의 순간에 불안이 생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는 순간, 길은 별이 보석처럼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에게 의미 있던 사물이 이제는 무가치해져버린 성숙을 경험한다. 이게 바로 각성이다. 이제 빛나는 별밤은 끊임없는 꿈으로 은하수처럼 이어진다.
준비된 사람에게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운명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 사건과 그 사람의 정신세계가 이미 어쩔 수 없이 얽혀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간디가 마리츠버그의 모욕을 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사건이 그의 존재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건 이전에 이미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미 존재의 깊은 심연 속에 ‘중재력을 가진 도덕적 정치가’ 간디가 도사리고 있었고, 영혼 속에 ‘그것이 그의 운명’이라는 각인이 깊이 찍혀 있었다. 마리츠버그 사건은 다만 미래를 암시하는 전령관이자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간디는 소년 시절에 셰이크 메타브라는 이슬람교도 청년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설득에 넘어가 힌두 율법을 깨고 육식을 하거나 담배를 사기 위해 돈을 훔치고 매춘굴을 찾아가기도 했다. 간디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돈을 훔친 다음 자살을 생각하고, 창녀 앞에서 몸이 굳어 아무 짓도 못하고 돌아와 심한 모멸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옳고 그름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년이었다. 그를 규정하는 가장 큰 기질적 특성은 도덕성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중재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