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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품격

금욕과 절제 덕에 행복했던 제논의 비밀

김헌 | 371호 (2023년 0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젊은 시절 부호를 꿈꿨던 제논은 사업에 실패하고 소크라테스 사상에서 깨달음을 얻으면서 스토아학파를 이끄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가 98세까지 장수한 비결은 불행이나 격정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인 ‘아파데이아(apatheia)’의 실천과 정제된 말을 신중하게 하는 ‘로고스’의 존중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제논은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라는 공식에서 분모인 욕망을 줄이는 길, 즉 금욕과 절제로써 행복에 이르고자 했다. 아테네의 청년들은 그의 가르침을 존경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왕조차 부러워한 철학자 제논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고노스 2세(기원전 320~239)는 마음이 헛헛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로서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할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가 세운 왕국을 물려받았고,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며 권력과 명예로는 최정상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이 허전함은 왜일까? 행복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 물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행운과 명성에서는 당신보다는 훨씬 앞서지만 이성과 교양뿐만 아니라 당신이 누리는 궁극의 행복에서는 한참 뒤진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당신을 초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디 나와 모든 마케도니아의 사람들의 스승이 돼 주십시오.” 왕은 자신이 누리는 권세와 부귀영화보다도 그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그를 행복하게 만든 고귀한 사상을 부러워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헬레니즘 시대 스토아철학을 창시한 제논이었다. 그는 어떻게 왕조차 부러워할 행복을 누리는 철학자가 됐을까?

제논은 지금의 사이프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키프로스라고 했던 커다란 섬나라의 도시 키티온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사이프러스는 하나의 독립 국가지만 예전에는 그리스와 포에니키아의 식민 도시들로 구성돼 있었다. 제논 당시에 키티온은 포에니키아의 식민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리스어가 통용됐다. 지금도 사이프러스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고, 대부분 국민이 기독교의 일종인 그리스정교 교인이기도 하다. 제논은 그리스어에 능통한 포에니키아인이었던 것 같다. 아니, 태생이 그리스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를 그리스 철학자로 기억한다.

그런데 젊은 시절 제논은 해양 무역을 하며 부자가 될 꿈을 안았던 상인, 사업가 지망생이었다. 스토아철학이라고 하면 금욕주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상인이 돼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려는 야망과 금욕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제논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삶에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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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의 실패와 알 수 없는 신탁


제논이 30세가 됐을 때였다. 그는 포에니키아로 건너가 해상 무역을 시작했다. 어느 날, 자줏빛(퍼플)을 내는 염료의 재료인 뿔고둥을 배에 잔뜩 싣고서 포에니키아에서 아테네로 가고 있었다. 당시 자줏빛 염료는 가장 비싼 물품이었다. 나중에 로마제국의 시대에 황제만이 입는 색으로 통할 정도였으니 제논이 얼마나 큰 사업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구찌, 에르메스, 루이뷔통 같은 명품을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30세의 젊은 사업가가 뿔고둥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포에니키아를 떠나 지중해와 에게해를 가로질러 아테네로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빛나는 태양과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무화과를 입에 넣고 맛있게 먹는다. 기록에 따르면 제논이 말리지 않는 생무화과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다리가 굵고 키가 크지만 마르고 다부지지 못한 몸매에 기운이 약해 보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이번 항해만 성공한다면 큰 부자가 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큰 어려움 없이 자라 사업도 쉽게 꾸려나갈 수 있었다. 물려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큰 명성과 부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의 꿈과 희망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테네로 통하는 항구인 페이라이에우스(지금의 피레우스)항을 눈앞에 두고 그만 배가 난파하고 말았다. 폭풍을 만났는지, 아니면 뜻하지 않게 암초에 부딪혔는지, 아니면 배에 사고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배가 침몰하면서 그의 꿈을 이뤄줄 뿔고둥도 모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항구에 도착했다. 얼마나 허탈하고 황망하고 절망했을까? 목숨은 건졌지만 모든 의욕을 잃고 나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재기를 꿈꾸며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기엔 타격이 너무 컸고, 요즘 말로 갑자기 ‘현타’가 온 것이다. 뭘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고 답답했던 제논은 자신의 미래를 신탁에 맡겼다.

그런데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답이 주어졌다. “그대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죽은 자들과 사귀는 것이라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죽은 자들과 사귀라는 것은 이승에 머물지 말고 저승으로 가라는 건데, 자살이라도 하라는 것일까? 제논의 사정에 비춰보면 딱 그렇게 해석될 판이었다. 사업에 뜻하지 않게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은 제논은 그때 정말 살고 싶지 않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제논도 처음엔 그렇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기엔 너무 젊지 않은가? 그는 신탁이 혹시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다시 곱씹기도 했다.


살아 있는 제논이 죽은 소크라테스를 만나다

그러던 제논은 우연히 두루마리들이 진열된 가게를 지나가다가 그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가 읽은 책은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1 이었다. 라틴어로는 Memorabilia(메모라빌리아), 그리스어로는 Apomnēmoneumata(아포므네모네우마타)라고 하는데 저자가 직접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되살려 쓴 책이다. 우리가 부딪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에 관해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재구성한 책인데, 예를 들면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같은 도덕적인 문제에서부터 친구의 의미, 정치가의 조건, 출세하는 방법 등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관해 대부분 철학자인 플라톤의 저술을 통해 알고 있는 편인데, 군인이며 정치가였던 크세노폰은 사뭇 다른 시각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려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경건하고 절제적인 사람이었는지, 그가 친구들과 식구들, 제자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존재였는지, 구체적인 내용도 읽을 수 있다. 그 책이 절망한 제논을 구원한 ‘인생의 책’이 됐다.

가게에 앉아서 두루마리를 읽던 제논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빛이 비치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거구나! 그는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다. ‘죽은 사람들과 사귀어라. 그러면 그대의 인생은 가장 좋은 삶이 될 것이다.’ 이 말은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았던 현인들의 삶과 생각, 사상을 읽고 깊이 숙고하며 삶을 살아간다면 가장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논이 읽었던 책을 쓴 크세노폰은 기원전 355년에 죽었고, 그가 쓴 작품 속의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죽었으니 모두 제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제논은 기원전 334년에 태어나 262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제논은 크세노폰의 책을 읽고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음미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영혼을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 ‘죽은 사람들과 사귀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책방 주인에게 아테네에 혹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책방 주인은 마침 가게 앞을 지나던 사람을 가리키며 “바로 저 사람이요, 저 사람을 따라가시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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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의 만남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 그가 누구인가? 제논이 따라간 그 사람은 크라테스였다. 이름이 비슷하다 보니 일종의 ‘아재 개그’ 같지만 그리스인들의 이름에는 ‘크라테스’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크라테스는 ‘강한 자’라는 뜻인데 신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에 다양한 말이 접두사처럼 붙어서 이름을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안전한, 구원의’라는 뜻의 ‘소’를 ‘크라테스’에 붙여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많은 권력,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폴뤼크라테스’라는 이름도 있고, ‘손님, 주인’을 뜻하는 ‘크세노’를 붙인 ‘크세노크라테스’라는 이름도 있다.

어쨌든 제논은 크라테스를 따라가게 되는데 크라테스는 이름만큼이나 소크라테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크라테스는 디오게네스의 제자였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조금만 비켜주시오, 태양이 가려지지 않게”라는 말로 유명해진 철학자다. 디오게네스의 스승은 안티스테네스라는 아테네의 철학자였는데 이 안티스테네스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학연으로만 따지면 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자뻘이니 제논의 사상적 뿌리도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있었다. 안티스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가운데 덕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금욕주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모든 소유를 버리고 ‘개처럼’ 생활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디오게네스와 그 제자들을 ‘견유(犬儒)학파’라고 부르는데 ‘개(犬)처럼 사는 철학자들의 학파’라는 뜻이다. 제논은 그런 크라테스를 따라가게 된 것이다.

제논은 크라테스에게서 철학적인 삶의 태도를 배웠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맞보았다. 그는 스승과 자주 충돌하고 나중에는 결별했지만, 그와 철학적 관계를 가진 것을 귀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제논은 “그때 내가 난파당한 것은 성공적인 항해였다”고 말했다. 그때 만약 무사히 항구에 도착해 뿔고둥을 팔아 막대한 재산을 얻고, 그것을 다시 투자해 또 다른 사업을 추진하고 성공을 거듭했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됐을 것이며, 철학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계속 채워나가는 무한의 성취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철학적인 삶을 통해 욕망을 절제하며 사는 데서 더 큰 행복을 느꼈다. “운명이 나를 난파시켜 철학으로 몰아가다니 운명아, 정말 고맙구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주랑의 철학자, 스토아학파를 이루다

정말 철학이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제논은 그런 의아함을 일소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실패의 상황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는 도전 정신만은 배울 만하다. 소크라테스와 크라테스로부터, 그리고 크라테스를 떠난 후 여러 스승으로부터 배운 철학을 통해 제논은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그의 핵심 주제는 행복이었다. 그가 설파하는 행복의 비결에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였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들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페이시아낙스의 주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가르쳤다. 아테네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아고라의 북쪽에 세워진 건물인데 비가 내려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모일 수 있도록 큰 기둥에 지붕을 얹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쳤기 때문에 제논의 무리를 스토아학파라고 불렀다. 주랑, 기둥을 그리스말로 스토아라고 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고노스도 그를 사사하고자 왕실로 초청할 정도니 제논은 정말 철학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러나 제논은 안티고노스 왕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런 답장을 보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당신의 마음을 나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나는 노령에 따른 쇠약한 육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든의 나이니까요.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영혼과 관련해서는 나보다 뒤지지 않지만 육신과 관련해서는 나보다 훨씬 앞선 나의 학문적 동료를 보냅니다. 그들과 사귄다면 당신은 궁극적인 행복에 다다른 그 누구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능한 제자들을 파견했다. 안티고노스는 철학을 사랑하며 나라를 잘 다스려서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 왕에 가까웠다고 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마케도니아로 가는 것을 거절한 제논이었지만 그는 그로부터 18년을 더 살고 9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병 없이 평생을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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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행복의 비결, 아파데이아

제논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은 그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는 이성과 감성, 욕망, 의지 등이 있는데 이성이 주인이 돼 욕망과 격정을 잘 다스리며 절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검소하고 단정한 생활을 했다. “소량의 빵과 꿀을 먹고 소량의 향기 좋고 도수가 약한 포도주를 마셨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식욕을 절제하는 소식가였다. 그는 “절제는 아름다움의 꽃봉오리다” “아니, 아름다움은 절제가 피워내는 꽃봉오리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절제하는 생활, 소식하는 생활 습관이 그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파데이아(apatheia)’이다. ‘파토스(pathos)가 없는 상태’ 또는 ‘파토스를 없애는 일’이라는 뜻이다. 파토스는 ‘겪는다, 경험한다’는 말에서 온 것인데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에서 내가 겪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감정을 뜻하기도 한다. 감정도 외부의 자극에서 내가 겪는 것,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분노, 슬픔, 두려움과 같이 격정적인 감정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격정을 일으키는 불행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불행이나 격정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아파데이아라고 한다. 그리스말에서 ‘아’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어떤 자극과 불행에도 평온함을 느끼는 태도, 그런 것을 아파데이아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안 받는 단단한 마음이나 태도라고 할까? 모든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하는데 아파데이아를 실천한다는 것이 제논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 된 것 같다.


로고스를 존중하라

그런 태도는 이성을 존중하는 스토아철학에서 나온다. ‘이성’은 그리스 말로 ‘로고스’인데 이것은 ‘말’이라는 뜻도 있다. 논리학을 영어로 ‘Logic’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바로 로고스에서 왔다. 그래서 제논의 여러 일화 가운데에는 수다스럽게 떠드는 것을 경계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이성이 주인이 돼 감정과 욕망, 격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통한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욕망과 격정에 이성이 굴복하는 현상인 셈이다. 제논은 수다스럽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젊은이를 보고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이것 보게, 젊은이. 우리에게 귀가 둘, 입이 하나인 것은 더 많이 듣고 더 적게 말하라는 신의 뜻이 있는 것이네.” 나아가 제논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신 자체가 로고스라고 믿었다. 말이 곧 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된다. 좋은 말, 정제된 말을 신중하게 할 때, 비로소 경건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논의 스토아 사상은 기독교와 통하는 바가 많다. 예수의 제자 중에 요한이 쓴 글에는 “태초에 로고스(말씀)가 있었다. 로고스가 신과 함께 있었고,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다. 그로 인해 세상이 창조됐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실 이 내용이 스토아철학의 사상과 아주 유사하다. 제논도 신이 곧 로고스라고 했고, 로고스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독교가 성립하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시대였고, 로마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철학이 바로 스토아철학이었으니, 서로 모종의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네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도 스토아철학자였는데 그가 신약성서의 여러 책을 써서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한 사도바울과 친구였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에 스토아학파에서 논리학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을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 유명한 삼단논법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그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바로 이 삼단논법을 더욱 심화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스토아학파이다. 이들은 철학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눴는데, 말을 다루는 학문인 논리학을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놓고, 말을 가지고 세상과 자연을 파악해나가는 자연학과 인간의 삶과 행동에 관련된 윤리학을 그 위에 정초하는 식으로 스토아철학의 체계를 이뤘다. 이런 철학적 사상의 구조는 신으로 규정된 로고스를 중심에 놓고, 그것에서 자연, 인간도 다 나온 것으로 파악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욕과 절제가 행복이 되는 이유

그런데 많은 독자가 의아해할 것이다. 욕망을 채워나가는 성취와 만족감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금욕과 절제가 어떻게 행복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것은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행복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철학자들은 행복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분수의 공식으로 제시하곤 한다.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Happiness= Achievement/Desire)”라는 것이다. 이 공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행복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잘 맞는 것 같다. 이 공식에 따르면 내가 바라고 욕구하는 것보다 성취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감이 커지고, 성취가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감이 적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공식대로 하면 행복의 길은 두 가지로 열린다. 열심히 노력해서 최대한 성취의 값, 즉 분자의 값을 높이는 것, 야망을 크게 가지면서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먼 곳까지 나아가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면 반대로 욕망의 값을 작게 하는 것, 즉 분모의 값을 작게 하는 것도 행복에 이르는 좋은 길이 된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나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을 뜻한다. 1986년에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랑게르한수 섬의 오후』라는 책에 써서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공식을 기독교와 불교에 적용해 설명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창세기에는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창조한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축복했는데 이를 무한 확장, 무한 성취의 태도로 해석한 것이다. 즉,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라는 공식에서 분자인 성취 값을 키워서 행복의 크기를 키우는 삶의 태도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본 셈이다. 반면 불교는 나의 감정과 욕망을 지워나가면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해탈해야 한다는 지침을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라는 공식에서 분모인 욕망의 값을 줄여서 행복의 크기를 크게 하는 방법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를 잘 설명했느냐에 관해 논쟁이 있을 수는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금욕과 절제를 주장한 제논은 성취를 크게 하는 쪽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욕망을 줄이는 길로 행복에 이르려고 했다. 이성을 통해 욕망을 조절하고 누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적극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것, 즉 성취에 집중하는 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스토아학파와 대립했다. 행복의 공식에서 한쪽은 분자인 성취를 크게 하는 쪽으로, 한쪽은 분모인 욕망을 적게 하는 쪽으로 각각 행복의 값을 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제논은 왜 그렇게 죽었을까?

제논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98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논은 스토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화를 나눴다. 강연을 마치고 스토아에서 나오던 그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발가락이 부러졌다. 그러자 그는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비극 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간다. 운명이여, 왜 나를 소리쳐 부르는가?” 그리고 세상을 떠났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살? 왜 그랬을까?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왜 그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자살은 단식이었다는 설도 있다. 단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스토아학파에서는 자살을 금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짐작건대 스토아를 나오면서 아마도 크게 다치자 신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것이 정녕 운명의 부름이라면 이를 거부하고 더 살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의 자살은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스토아철학에 충실했던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젊은 시절 그가 들었던 신탁대로, 이제 죽어서 소크라테스와 같이 죽은 철학자들의 친구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아테네인들은 행복의 철학을 가르쳤던 제논을 정말로 존경했다. 그의 가르침이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덕과 절제를 존중하게 했고,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길로 그들을 인도했다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에게 명예의 관도 씌워 줬고, 고대 아테네의 공동묘지인 케라미코스에 그의 묘를 만들어 줬다. 모든 비용을 아테네가 지원했고, 플라톤의 학교가 있는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가 있는 뤼케이온에 제논의 뜻을 기리는 두 개의 비석도 모두 국비로 세웠다고 한다. 철학자를 극진하게 존중하고 대접하는 아테네, 역시 철학의 도시라고 할 만하다.
  • 김헌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필자는 서울대 불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및 서양고전학 석사, 서양고전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서양고전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 『천년의 수업』이 있으며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교수로 일하고 있다.
    kimcho@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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