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눈이 떠진다. 아직 5시. 오늘 밤에만 벌써 네 번째다. 월드컵 응원을 하면서도 잠을 잤던 나였는데, 한번 잠이 들면 천둥 번개가 쳐도 절대 일어나지 않던 나였는데 이렇게도 잠을 설치다니….
이런 기분, 10년도 훨씬 전 첫사랑에게 차이고 난 뒤에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본다. 그렇다. 오늘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다.
한 달 전, 내 눈을 사로잡았던 사내 공고 한 장.
<Y전자 제 2의 도약을 위한 ‘미래상품 기획팀’ 팀원 모집 공고>
차세대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갈 혁신 제품 개발을 위해 기존 기획팀 뿐 아니라 연구소, 디자인팀, 영업팀을 총망라하는 새로운 팀에 참여할 직원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회사의 최정예 전략기획팀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기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상품에 대한 빛나는 아이디어를 모두 갖춘 뛰어난 기획자를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미래상품 기획팀’의 준비된 팀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바로 ‘미래상품 기획팀’ 지원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아이디어 상품인 ‘알람시계가 장착된 1인용 압력밥솥’에 대한 기획안을 야심 차게 작성해 제출했고, 결국 ‘미래상품 기획팀’에 선발되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미래상품 기획팀’으로의 첫 출근 날이다.
아직 5시. 좀 더 잘까 하다가 출근을 앞당기기로 했다. 오늘따라 날씨도 유난히 좋다. 7시에 도착한 사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빈 책상들, 새롭게 장만한 듯한 컴퓨터와 사무집기들…. 6년 동안 정들었던 연구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다.
나는 여전히 Y전자의 대리이고, 여전히 회사를 위해, 나를 위해 일을 할 텐데 울컥하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앞으로 난 이곳에서 어떤 꿈을 꾸며, 어떤 미래를 보게 될까? 과연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어쨌거나 뭔가 재밌고 뿌듯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오전까지는….
오전 시간은 새롭게 모인 팀원들 사이의 인사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으로 보냈다. 우리 회사의 전설적인 존재로 거의 모든 사원들의 심정적인 멘토 역할을 해주고 계신 김 팀장님과 사내 최단기간 과장 승진의 신화적 인물 이 과장님과 같은 팀원이 되다니…. 내가 벌써 그들과 같은 위치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밖에 천하태평 박 차장님과 ‘만년 대리’ 유 대리님, 디자이너 임 주임, 신입사원 손대수가 한 팀이 됐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업무 파악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김 팀장님이 나를 부르신다.
“강 대리가 제출한 기획안 잘 봤어. 알람시계가 달린 1인용 압력밥솥이라. 아이디어가 좋은 것 같은데?”
(역시, 팀장님이 내 실력을 알아봐주시는구나.^ ^)“아, 네. 평소에 조금씩 끄적이던 걸 정리했을 뿐입니다”
“어떤 근거로 이 제품을 기획한건가?”“네? 그건… 제가… 평소에… 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뭐지?”
“저… 그러니까… 제가 혼자 살다보니… 자명종이 울려서 잠이 깼을 때 밥도 다 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실제로 소비자 니즈와 시장 규모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한 건가? 이 기획서에 구체적인 수치나 근거 자료는 없는 것 같은데?”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제 친구들한테도 물어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