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기술과 기기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사람의 미래를 바꾼다. 몇십 명, 몇백 명의 미래가 아니라 몇천만 명, 몇십억 명의 미래를 말이다. 기술이 안겨줄 성과와 함께 부작용과 희생까지 살필 수 있는 넓은 시야가 없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SF 디스토피아의 세계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SF(Science Fiction)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유전자 편집으로 탄생한 ‘신인류’와 유전적 결함을 간직한 자연 인류의 갈등, 지적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 웜홀을 이용한 우주 탐사와 우주 식민지 개척, 인공 인체를 통해 ‘향상’된 개조 인간…. 주로 영화에서 봤던 이야기나 이미지들이 머리를 스칠 것이다. 그런데 최근 1993년생 젊은 작가가 쓴 첫 SF 소설집이 교보문고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어 눈길을 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이다. 2019년 6월 출간된 이 책은 거의 반년이 지난 현재까지 쭉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머물러 있다. ‘장르문학의 불모지’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현상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SF의 근대적 기원흔히 ‘공상과학소설’이라 번역하는 SF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상상력을 핵으로 삼는다. ‘과학이 발전하면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바로 이 질문을 기원으로 삼아 탄생한 SF라는 장르는 오랜 역사에 걸쳐 대형 장르로 성장했다.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스페이스 오페라, 하드 SF, 평행우주 같은 다양한 하위 장르를 통해 풍성해진 SF 특유의 상상력은 오늘날 한국의 대중 서사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2016년 방영돼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시그널’ 같은 사례가 있다. 무전기를 통해 30년이란 시간을 넘나들며 범인을 추적하는 이 이야기는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상상력이 없었으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SF는 산업혁명 이후 근대 과학의 담론적, 기술적 발달과 보조를 맞춰 등장한 이래로 대략 120여 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SF의 시초로 여겨지는 작품 중 하나가 시간여행’이란 소재를 최초로 전면에 내세운, 영국 소설가 H. G. 웰스가 1895년 발표한 『타임머신』이다. 바야흐로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 세계를 해명하고 변혁하는 패러다임이 도래하면서 상상력에도 일대 근대적 전환이 일어났던 셈이다. 이와 같은 탄생의 역사적 조건상 SF는 근대 과학 발전의 기수를 잡았던 서양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에서 형성된 타 장르와 비교해볼 때 SF는 한국에 신속하게 소개된 편이다. SF의 시초로 여겨지는 작품 중 하나가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이 1870년에 발표한 『해저 2만 리』인데 이 소설이 1907년 『해저여행기담』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소개되며 ‘한국 최초의 과학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이로부터 단순 계산해보면 한국에 SF가 들어온 지도 벌써 100여 년이 넘는 셈이다. 근대 초기, 당시 대중에게 너무나 생소했던 SF가 국내에 소개된 계기는 굉장히 거창했다. SF가 ‘과학입국(科學立國)’이라는 개화기 특유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장르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서양처럼 과학의 힘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국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SF 도입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고전적 SF 작품들은 그저 허황된 몽상으로 보이기 쉬웠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 시간여행, 심해를 거니는 잠수함과 첨단 병기로 수행되는 전쟁…. 과학이 발전가도를 달리고 있던 서양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 SF의 상상력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신선이 구름 위를 노니는 고전소설이나 SF나 모두 공상(空想)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과학이 곧 문명이고 힘이라는 고전적 SF의 이데올로기에는 제국주의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식민지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격변을 생각해봐도 SF는 여전히 낯선 상상력이기 쉬웠다. 잇따른 전쟁과 민주화 혁명, 경제 발전과 사회적•정치적 구조 변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문학의 초점은 ‘미래’가 아닌 ‘현실’에 맞춰지곤 했다. 이러한 조건 때문인지 SF는 계속해서 진지한 허구(Fiction)로서보다는 허황된 공상으로 여겨져 온 것 같다.
그렇게 이 땅에 SF가 소개되고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SF의 풍부하고 다양한 상상력은 대중문화계에 흠뻑 스며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창작은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현대에 들어 SF 창작이 활성화됐다고는 하나 SF를 전면에 내세워 일반 대중에게 그 이름을 널리 알린 작가나 작품을 선뜻 꼽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SF의 ‘중심’은 서양이고 여기는 ‘변방’이라는 인식이 한국 SF를 둘러싸고 조금씩 쌓여왔다. SF에 친숙해진 오늘날 대중 독자들도 이미 검증된 서양의 ‘고전’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 같은 국내 SF 문학 시장의 오랜 침체를 깬 작품이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다. 바위를 깨뜨린 계란처럼 창작의 힘이 시장의 장벽을 깨뜨린 이 의미심장한 순간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의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