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Philosophy

거리에서 탄생한 힙합예술 “관행과 틀을 벗어라”

218호 (2017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거리는 질서와 무질서, 좋은 냄새와 역한 냄새, 아름다운 말씨와 욕설이 얽혀 있는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자 예술 그 자체이다. 힙합과 그래피티 예술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거리에서 탄생됐다. 예술이 아름다움과 상상력, 자기완결성을 지닌 유기체라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이제 벗어나라. 거리는 아름답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 자체가 예술의 장(場)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길거리도 갤러리가 될 수 있다고?

2005년 청계천이 복구되면서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이를 상징하는 조각품이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초입에 설치된 높이 20미터의 대형 조각 작품은 청계천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스프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웨덴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올덴버그(Claes Thure Oldenburg, 1929∼)에 의해서 제작됐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올덴버그의 작품이 청계천 거리에 설치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미리 접하고 들뜨기도 했다. 유명한 조각품을 보기 위해 관람료를 내지 않고도, 또 특별히 어려운 발걸음을 하지 않고도 무심코 흘깃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꿈같은 혜택일지 모른다. 예술작품이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에 전시됨으로써 길거리 자체가 예술적인 공간, 즉 갤러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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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렇게 길거리를 예술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흔히 우리가 ‘공공미술(Public Art)’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예술 형태가 지향하는 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을 주도하는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APAP·Anyang Public Art Project)는 이 프로젝트가 ‘대중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도시 자체를 하나의 갤러리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해 3년마다 열리는 이 프로젝트 전시는 현재 22명의 국내외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예술작품을 공공의 장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프로젝트 전시가 열리는 안양예술공원은 개장 당시부터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됨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공원과 같은 공공 공간을 갤러리로 만듦으로써 예술이 지니는 본래의 공공성을 회복한다는 취지다.

예술이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공공적인 특성을 지녀야 한다는 지향점은 20세기 후반 공공미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본디 예술이 지닌 가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일이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미술품들이 박물관이나 갤러리라는 특정한 전시공간에 갇히기 전까지 예술작품은 일상과 크게 구분되지 않은 공공의 장소에 존재해왔다. 가령 그리스를 대표하는 조각은 독립된 공간에 전시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신전을 장식하는 일부분이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들 역시 대부분 벽화였으며 이것은 글로 쓰인 성경을 대신해 ‘보이는 성경’으로서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공공의 성격을 지녔다.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제외하고는 희랍어나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 교리를 공유하는 공공적 수단이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그림에서 이미지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공유된 뜻을 담고 있는 도상 기호(icon)로 간주돼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령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비둘기는 평화를, 단검을 들고 있는 남자는 성 세바스찬을, 13명의 남자들이 식탁 위에 있는 장면은 최후의 만찬을 의미하는 도상으로 해석돼야 한다. 이들 그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코드로 이뤄진 공공의 텍스트였던 것이다.

근대 이후 박물관과 갤러리는 예술작품의 공공성을 제한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이러한 관행에 대한 예술가들의 간헐적인 반발도 이어졌다. 가령 프랑스의 설치 작가 뷔랑(Daniel Buren, 1938∼)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레임 내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Within and Beyond Frame, 1973)에서 자신의 서명과도 같은 줄무늬 모양의 깃발을 갤러리 내부 공간뿐만 아니라 갤러리 창을 통해 반대 건물의 벽까지 확장함으로써 갤러리의 내부와 외부 경계를 없애고 연속적인 공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것은 갤러리라는 제도적 공간에 대한 풍자와 예술의 공공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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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박물관 혹은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의 벽과 창살을 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원이나 거리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예술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대중들이 일상에서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거리 자체를 갤러리로 만드는 것이 공공미술의 미덕인 것일까?




거리,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공간

사람들에게 공공미술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장면은 낙후된 시골마을이나 어촌, 혹은 도시의 빈민가의 벽을 일군의 작가들이 아름다운 예술의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정부 혹은 지방단체가 모금 또는 자비로 경비를 제공해 일련의 젊은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이 예술과 거리가 먼 문화소외계층들의 공간을 예술로 바꾸어 놓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추악함과 지저분함, 그리고 빈민의 공간을 미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이 ‘아름다운 벽’은 공공미술의 현실화이자 거리 예술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벽이 과연 ‘거리’의 예술과 예술의 ‘공공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을까?

벽화의 기원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낙서화(그래피티·Graffiti)’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물론 20세기 중반에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작가들은 남미사회주의 운동의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벽화를 그렸다.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걸개그림 역시 벽화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익명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행해지는 벽화의 전통을 대변하는 것은 미국의 힙합 문화와 관련된 낙서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낙서화는 아름다움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미국의 대도시 슬럼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낙서화는 말 그대로 낙서에서 시작된 것이다. 낙서란 지저분하고 차마 입에 오르지 못한 장면이나 문구로 돼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낙서는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아닌 하루라도 빨리 지워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인식됐다.

그래피티의 예술적 생명력은 그것이 제도권 예술과 달리 전혀 길들여져 있지 않으며 애초에 아름다움이니, 숭고니 하는 미적 범주를 염두에조차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그래피티 예술은 거리의 예술이다. 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으로서 제도적인 공간과 달리 비합리적이고 비체계적인 공간이다. 제도적으로는 인종이나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지만 거리에서는 인종과 여성 차별이 존재하며 싸움과 협박,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에스카르고나 스테이크, 고급 향신료의 냄새, 댄디한 사람들의 향수도 풍기지만 시궁창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 맛이 간 해산물 비린내, 노숙자들의 악취가 마구 뒤섞인 공간이 바로 일상의 거리다. 그래피티는 이렇게 합리와 비합리, 제도와 일탈, 정의와 부패, 점잔과 비열함이 공존하는 거리의 원초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그래피티는 단지 거리라는 공간에 전시된 예술이 아닌 ‘거리에서 탄생한’ 예술이다. 이런 점에서 그래피티는 예전의 어떤 예술과도 다른 특징을 지닌다. 거리, 특히 그래피티가 있는 음습한 도시의 골목은 도시의 원시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이 길들여지지 않은 원초적인 야생의 지대라면 뒷골목은 가장 발달한 문명인 도시 속에 존재하는 야만적인 장소다. 범죄와 약물, 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곳은 마치 우리의 인격 속에 감추어진 무의식처럼 원초적인 장소인 것이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고 정제되지도 않은 감당하기 힘든 이 낙서들은 꿈이 여과되지 않은 무의식을 표출하듯이 도시, 아니 우리의 일상에서 억압된 진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의 예술인 그래피티는 제도에 대해서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낙서화가 반정부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낙서화라는 존재 자체가 위협적인 것이다.

그래피티 예술은 그 자체가 익명적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예술의 관행에서 벗어나며 마치 길거리의 노상방뇨처럼 그 자체가 범법적 행위라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예술과 다르다. 게다가 이들의 범법적 행위는 미리 계산되거나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며 자의식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소변이 마려우면 골목길의 담벼락에 스스럼없이 방뇨를 하듯 미적인 기준이나 예술사적인 고뇌 없이 붓과 펜을 휘갈긴 것뿐이다. 팝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낙서화가 출신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8∼1988)의 차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워홀은 어린 바스키아를 발굴해 유명하게 만들었다. 워홀은 자본주의 사회와 예술적 관행을 위협하고자 했지만 그의 이러한 위협은 의식적이고 계산된 것이었다. 그가 브륄로 박스를 제작한 것도, 온갖 대중적 아이콘들을 도용해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한 것도, 심지어 자신의 작업장을 ‘공장’이라고 부른 것도 의식적인 행위의 산물이다. 이에 반해서 바스키아의 그림에선 어떤 의식적 행위도 발견되지 않는다. 바스키아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래피티를 그렸던 낙서화가 출신이다. 그의 그림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낙서처럼 보인다. 색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낙서처럼 글씨들을 새겨놓았는데 대부분의 글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나 뉴스의 한 구절이다. 말하자면 어떤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 무의미한 것들이 우리의 거리를 채우고 있는 소리들이며 색이며 형태들인 것이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어린아이처럼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제도권에 속하지 않은 빈민가 흑인 소년의 감성에서 비롯된 진짜 어린아이의 그림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처럼 그린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그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은 매우 정치적으로 계산된 자의식의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혁명을 논하고 일탈을 꿈꾸지만 지적인 만족에 그치고 마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취향을 채울 뿐이다. 반면 바스키아는 제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거리의 빈민 흑인 소년이었으며 그의 그림은 제도권 바깥에 있는 거리의 자생적인 그림이다.

앤디 워홀은 비록 거리를 배회했지만 거리의 예술가가 될 수 없었던 반면 바스키아는 끊임없이 백인사회를 비웃으면서도 그 속으로 들어오고 싶었지만 거리의 예술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관행과 제도적 틀을 벗어날 때만 가능한 것이다.




힙합은 무엇으로 사는가?

힙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재즈음악 역시 거리의 음악에서 출발했다. 재즈는 흑인들이 거주하던 음습한 도시의 뒷골목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음악이다. 그 바탕은 흑인 블루스 음악이다. 원래 블루스 음악은 서양의 장단조 음계와는 다른 음계를 사용하는 매우 이질적인 음악이다. 가령 여기서 1도 화음은 도, 미, 솔의 전통적인 3성 화음이 아니라 여기에 시b이 첨가된 4성 화음이다. 도, 미, 솔은 장조를 이루지만 여기에 첨가된 시b은 단조화음에 속하게 되는 등 전체적으로 블루스 음악에서 사용하는 화음은 장조도 단조도 아닌 모호한 특성을 띠고 있었다.

1940년대 이후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등의 재즈 대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블루스 음계가 아닌 장단조의 음계 및 다양한 중세 선법을 활용한 비밥 음계 등을 사용하면서 재즈 음악을 체계화했다. 재즈 음악은 단순한 블루스 음악을 탈피해 매우 풍부하고 복잡한 음악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달리 보면 블루스 음악이 지닌 흑인 음악적 고유의 특성, 즉 장조도 아니고 단조도 아닌 비서양음악으로서의 독특한 특성은 사라진다. 이들은 마이너, 도미넌트, 메이저라는 종지(cadence)의 형태를 정형화함으로써 서양의 전통적인 화음전개의 틀을 수용한다. 물론 전통적 서양음악과 달리 부분적으로는 블루스 음계와 새로운 다양한 음계들이 사용되지만 이때부터 재즈는 더 이상 흑인 음악이 아닌 보편적인 음악이 된 것이다.

영국의 사회학자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재즈 음악에 대한 형식적인 이해는 없었지만 사회학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는 재즈 음악이 20세기 중반 이후 흑인의 음악이 아닌 백인 중산층을 위한 음악이 됐다고 주장한다. 재즈는 팝음악처럼 지나치게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클래식과는 다른 지적인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새로움을 갈구하는 지적인 백인 중산층에게 딱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재즈 음악의 보편성이 재즈 음악 자체가 지닌 거리의 미덕을 청산하면서 획득됐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것이다.

힙합 음악의 경우도 재즈 음악과 마찬가지의 경로를 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힙합 음악 또한 재즈 음악과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탄생했다. 힙합은 미국 동부의 흑인들이 길거리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카세트로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어대면서부터 출발했다. 이들의 무대가 길거리가 아닌 클럽으로 옮겨지면서 디제잉이나 엠씨잉과 결합돼 본격적인 새로운 장르로 정착됐다. 그렇기 때문에 힙합의 원천은 거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것은 힙합 음악이 지닌 일탈성이 거리라는 일탈의 장소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힙합 음악이나 댄스의 중요한 관행 중 하나인 배틀은 거리에서 탄생한 것이다. 배틀은 개인이나 집단의 일정 영역에서의 지배권과 관계가 있다. 배틀이라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일탈적 행위이며 실제로 힙합 음악은 갱스터 랩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갱과도 관련이 있었다. 힙합 음악의 초창기에 배틀은 실제 갱들의 전쟁을 암시하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동부의 힙합을 대표하는 ‘노터리우스 비아이지’(Notorious B.I.G, 1972∼1997)와 서부의 힙합을 대표하는 ‘투팍’(2Pac, 1971∼1996)의 끔찍한 죽음은 배틀이 단지 랩이나 브레이크 댄스의 대결이 아닌 실제 일탈 행위로서의 배틀과 중첩된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힙합 댄스의 경우에도 그것이 다른 춤과 달리 거리의 춤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힙합 댄스를 상징하는 브레이크 댄스만 하더라도 그것은 전통적인 춤의 관행에서 보자면 상당히 일탈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도권의 무대의 춤은 중력을 거슬러 가볍게 상승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서 브레이크 댄스는 중력에 저항하기보다는 중력을 활용해 몸을 비틀거나 주저앉거나 넘어지는 동작이 대부분이다. 이는 중력의 지배를 받는 비체계적인 일상의 공간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또한 힙합 댄스의 대표적인 동작 중 하나인 팝핍 댄스(Popin Dance) 역시 현실적인 길거리 동작에서 비롯됐다. 팝핀은 마치 음악에서 스타카토처럼 관절의 움직임을 툭툭 끊어서 표현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동작을 리듬에 맞추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다. 분주하고 일상적인 소음이 지배적인 거리의 공간에서 멜로디나 화음이 아닌 리듬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음악적 전달수단이었다.

힙합 음악은 랩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가 없다. 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론 가사이지만 음악적인 형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요한 견인요소는 리듬이다. 힙합 음악은 초창기에 그것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짧은 리듬과 멜로디가 반복되는 루프(Loop)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 저급한 형식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이는 편견이다. 전통적인 제도권 음악은 화음과 멜로디를 중요시함으로써 사실상 리듬을 무시했다. 관객의 몸에 직접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심장을 뛰게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 두드러지면 음악의 예술적 진지함이 방해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화음과 멜로디의 단조로움과 반복성은 오히려 힙합 음악이 지닌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멜로디와 화음이 강조될 경우 상대적으로 리듬감은 실종될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음악은 관객에게 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상을 강요하며 몸의 참여를 불가능케 한다. 불레즈(Pierre Boulez, 1925∼2016)는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i, 1882∼1971)의 음악을 분석하면서 그의 음악이 리듬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멜로디나 화음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곧 리듬과 멜로디의 반비례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힙합 음악이 멜로디와 화음을 단순화한 것은 단순히 그 음악적 저급함 때문이 아니라 거리의 특성을 최적화하기 위한 자생적인 전략적 산물인 것이다.



더군다나 멜로디와 화음의 단순성과 반복성은 랩을 수용하기 위한 최적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랩은 매우 산문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이뤄져 있다. 기존의 가사가 함축적이고 정제된 것에 반해서 랩은 일상적인 말투, 즉 대화, 연설, 욕설, 혹은 잡담이나 넋두리 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산문적인 형태의 말은 복잡한 멜로디와 조응하지 않는다. 랩은 멜로디와 결합된 가사의 형태가 아닌 리듬과 결합된 운율을 띤 형태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의 전통음악이 우리의 판소리와 달리 왜 음악과 일상적인 산문을 결합하는 데 실패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오페라에서 아리아(곡)가 아닌 대사의 형태로 말을 전달하는 부분, 즉 노래처럼 전달되는 대사를 ‘레치타티보’라고 한다. 이 부분은 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부분이기에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늘상 골칫거리였다. 어쩌면 극의 전개를 위해서 불가피한 부분이겠지만 음악적 완성도를 위해서는 제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판소리에서는 곡과 레치타티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것은 가사를 멜로디와 연결 짓는 서양의 음악적 관행 때문이다. 멜로디 중심의 서양음악은 일상 언어와 결합되기 어려운 반면 리듬 중심의 우리 판소리는 일상 언어와 음악이 이질감 없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쇤베르크(Anold Scoenberg, 1874∼1951)는 레치타티보와 멜로디의 구분을 없애고 아예 멜로디가 없는, 즉 말하듯 노래하는 ‘슈프레히슈티메(Sprechstimme)’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익숙한 멜로디만 없을 뿐 한 음에 하나의 음절을 붙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관행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그 자체가 예술의 장이다

힙합 예술이 주는 교훈은 이러하다. 거리는 예술적 감상을 위한 갤러리로 꾸며야 할 공간이 아닌 그 자체가 예술의 공간이다. 유명한 설치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아름다운 벽을 꾸미는 것은 거리를 예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지닌 무한한 예술적 가능성을 말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공미술은 아름다움이란 거리가 아닌 갤러리라는 특별한 공간에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따를 뿐이다. 뷔랑의 작업처럼 갤러리의 공간을 길거리로 확장하겠다는 모더니즘의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거리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미와 추, 질서와 무질서, 좋은 냄새와 역한 냄새, 아름다운 말씨와 욕설이 얽혀 있는 역동적인 삶이자 예술 자체이다. 예술이 아름다움과 상상력, 자기완결성을 지닌 유기체라는 전통적인 생각은 오히려 일상을 비루하고 상상력이 고갈된, 무미건조하며 비천한 곳으로 여기게 만든다. 힙합은 거리의 예술을 대변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이러한 통념을 비웃는다.

예술의 공공성은 예술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길거리를 전시장으로 만들어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거리는 제도로부터 언제든지 예술적 반란을 꾀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적 가능성이 숨어 있는 공간이다. 공공성이란 이미 만들어진 제도로 도시의 숨은 곳까지 지배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지금까지 억압된 거리의 잠재성을 담론으로 활성화하고 이를 끌어올리고 무한한 생산의 영역으로 보존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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