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인간을 외소하게 하는 절대적 크기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외면하고자 하는 온갖 배설물과 쓰레기들이 가득 찬 잉여물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를 마주할 때 인간은 불쾌와 역겨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나 자신 역시 언젠가는 그 배설물들처럼 부패해 소멸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숭고함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를 겸허하고 작아지게 만드는 현실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Invitation to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어두운 전시관을 들어서면 하얀 벽면에 큰 스크린이 걸려 있다. 스크린에는 영상이 나타난다. 스크린 상단부에는 황동의 밸브에 커다란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다. 물방울은 점점 커진다. 이윽고 물방울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쿵’ 하는 소리가 방 안 전체를 감싼다. 실제로는 별로 크지 않지만 컴컴하고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에서 이 소리는 마치 세상의 적막을 깨는 태초의 폭발음과 같은 엄청난 소리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음을 졸이면서 물방울을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의 내면이 개입된 심리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 전시는 한때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 1951∼)의 작품으로 제목은 ‘그는 당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He weeps for you)’이다.(그림 1) 제목을 통해서 우리는 스크린 속에 맺힌 물방울의 이미지가 눈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눈물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스크린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관객을 대신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관객이 스크린에 나타난 물방울의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이미지가 물방울 속에 거꾸로 매달려 나타난다. 실시간 카메라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을 찍어서 관객과 전시장 일부를 스크린의 물방울 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눈물방울의 주체는 관객과 이 전시장을 모두 볼 수 있는 전능한 시선이어야 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주체는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그를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물방울의 주체는 우리 인간을 넘어선 전능한 주체이다.
관객은 물방울을 바라보고 그것을 눈물로 인지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주체를 볼 수 없으며 그가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결코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의 조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신비감만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신비감은 대상의 형식적 조화나 안정적 구도에서 느끼는 미감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그 눈물의 정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면 신비감이나 겸허함의 감정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이 이윽고 떨어지면서 내는 ‘쿵’ 소리와 함께 절정에 이른다. 이 ‘쿵’ 하는 소리는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관객의 귀에는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들린다. 말 그대로 관객은 ‘심쿵’ 한다.
‘심쿵’이라는 말만큼 이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심쿵’ 한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보았을 때 느끼는 예외적인 감정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심쿵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단지 잘생기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한 대상에 대해서 심쿵 하지 않으며, 그저 아름답거나 잘 생긴 사람들에게 심쿵 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심쿵함을 느끼는 순간은 대상에 대해서 예외적인 느낌을 받았을 때이다. 물론 이 심쿵함의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이미 예외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며, 심쿵함을 유발시키지도 않을 터이다. 우리가 심쿵함을 느끼는 대상의 정체는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상의 것, 즉 그 대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어떤 힘인 것이다. 비올라의 작품은 관객이 아름다움 이상의 것, 즉 심쿵함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 아름다움 이상의 것, 어떤 대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미학적으로는 ‘숭고(함)’이라고 부른다. 비올라의 전시를 통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미감이 아닌 숭고함이다.
숭고는 절대적 크기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태고부터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의 감정뿐만 아니라 숭고의 감정을 느꼈겠지만 예술의 본질이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숭고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체계화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와서이다. A.D. 1세기 고대 수사학자 롱기누스의 저서로 알려진 <숭고에 관하여>에서는 숭고란 독자를 압도하는 힘으로 묘사된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에게 계승되는데 그는 <미와 숭고의 이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숭고를 대상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쾌감과 달리 경악과 고통, 그리고 존경의 감정이 섞인 매우 역설적인 상태로 묘사한다. 숭고는 아름다움과 달리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평온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동요를 유발하는 격렬한 감정이다. 이러한 숭고의 감정은 우리가 쉽게 지배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의 크기를 대상이 지니고 있을 때 발생한다. 숭고의 정체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위력이다.
박영욱imago1031@hanmail.net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