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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ty vs. Business Strategy

동부전선의 히틀러, 록펠러센터 산 미쓰비시 리더의 독단이 참패를 낳았다

김경원 | 197호 (2016년 3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전쟁 사례: 히틀러와 독소전쟁

1943 7,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 간 벌어진 동부 전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히틀러는 사령관인 만슈타인의 의견(: 즉각적인 공격, 예비대 파견)을 잇따라 묵살. 그 결과, 오랜 준비기간과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도 독일군은 막대한 전력 피해를 입고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

 

경영 사례: 미쓰비시 록펠러센터 인수

일본 미쓰비시는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자리잡은 록펠러센터 빌딩군을 소유하고 있는 RGI의 지분 80%를 인수하는 데 총 14억 달러를 지불. 당시 미국 부동산 시장에 대해버블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미쓰비시 경영진은 이를 묵살, 과도한 인수대금을 지급. 향후 입주업체들로부터 받을 임대료를 올려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미국 경기가 침체기에 빠지면서 임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RGI 파산보호 신청 제출.

 

<손자병법>모공(謀攻)’편에는난군인승(亂軍引勝)’이라는 말이 나온다. 군주가 군대가 처한 상황을 잘 모르면서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전쟁을 지휘하면 적의 승리를 도와준다는 뜻이다. 기업전략을 수립할 때 기획부서가 영업 분야 등 일선 직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만들어진탁상전략은 실행 단계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야기하기 쉽다. 첫째는 전략과 상황의 불일치로 실행 단계에서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거나 처음부터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다. 둘째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임직원들이 처음부터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해 전략 실행의 추진력이 상실될 수 있다. 다음의 전쟁과 경영 사례는 모두 조직의 수뇌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을 밀어붙여 큰 대가를 지불한 경우다.

 

전쟁 사례: 히틀러와 독소전쟁

1941 622일 독일은 1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소련 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은 소련 침공 후 2개월 내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이었다. 1930년대의 대규모 숙청 작업으로 인해 스탈린으로부터 민심이 떠나 있는데다가 장교들이 말살되다시피 한 상태에서붉은 군대의 전투력도 형편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농노 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된 소련의 특성상 대부분의 병사들은 교육받지 못한 농부 출신이었다. 따라서 현대전에 필수적인 장비 조작 및 정비 능력이 없어 포병, 기갑, 항공 등의 전력이 매우 낮을 것이라는 게 독일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과연 개전 이후 몇 개월간 소련군은 독일군 앞에 연전연패를 당했다. 병사들이 장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탱크의 숫자보다 고장 나서 버려진 탱크의 수가 훨씬 많을 지경이었다. 독일군은 특유의전격전을 통해 소련 영토 깊숙이 들어가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그해 8월부터는 소련의 정신적 수도인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공격해 곧 함락시킬 기세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저력은 만만치 않아 그해 11월부터 대반격에 나섰다. 스탈린그라드를 공격 중이던 파울루스 대장의 제6군을 포위한 다음 맹렬하게 공격해 그 이듬해 1월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독일군의 뼈아픈 첫 패배였다.

 

독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1943 2월 하순부터 3월 중순까지 하르코프라는 소련 남부의 도시에서는 만슈타인 원수가 이끄는 독일의 남부집단군이 소련군의 52개 사단을 궤멸시켰다. 그 결과 45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해 8만여 명의 소련군을 사상시키고 600대 이상의 탱크를 파괴했다. 이렇듯 양국의 군대는 공격과 반격을 주고받으며 다음 해에도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그런데 곧 이 싸움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때는 1943 75. 소련 영토 깊숙이 자리 잡은 쿠르스크라는 철도 교차지역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은 모든 전투력을 다 걸고 절체절명의 승부를 벌였다. 쿠르스크는 독일군 지역으로 혹처럼 약 90㎞만큼 툭 밀고 나온 형상을 한 소련군의 점령지였다. 만슈타인이 남쪽의 하르코프를 점령하면서 양군 간 전선의 밑 부분을 파먹은 형상으로 만들면서 생긴 돌출부였다. 이에 히틀러는 집게처럼 이 지역을 남북에서 협공해 끊어낸 다음 떨어진안에 고립된 소련군의 대 병력을 섬멸하려 했다. 이를 통해 정체에 빠진동부 전선의 전세를 돌리려 한 것이다.

 

히틀러는 이 계획에다치타델 작전(Untern- ehmen Zitadel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슈타인은 최대한 빨리 작전을 개시하자고 제안했다. 하르코프에서 이긴 독일군도 피해가 상당했으나 소련군은 탱크 등 많은 양의 장비를 손실해 전력이 더욱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이런 소련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를 묵살하고 충분한 장비와 병력을 보충받을 때까지 작전을 연기했다. 3월부터 계획된 이 작전을 7월까지 연기한 것이다. 이는 만슈타인의 판단대로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시간을 번 소련군은 이 4개월간 쿠르스크의 전선을 따라 겹겹의 방어선을 쳤다. 수백㎞에 달하는 참호를 파고 탱크를 막을 함정을 수없이 팠다.

 

 

비로소 1943 75일 작전이 개시됐다. 북쪽에서는 클루게가 사령관으로 있는 중앙집단군이, 남쪽에서는 만슈타인이 이끄는 남부집단군이 각각 소련군을 공격해 서로 합류할 계획이었다.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저항을 뚫고 계획대로 진격했다. 반면 클루게의 중앙집단군은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독일군의 손실보다 소련군의 손실은 훨씬 컸다. 그런데 작전 개시 후 일주일이 지난 712일 히틀러는 돌연 두 장군을 소환해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 710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했으니 동부 전선에 투입된 전력의 상당 부분은 이를 막기 위해 전용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만슈타인은 전력을 완전히 소진한 소련군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별로 없으니 아직 투입하지 않은 아군의 예비대를 이용해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소련군은 실제로 더 이상 버틸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의견을 또 묵살했다.

 

이후 히틀러와 만슈타인 간의 의견 충돌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결국 1944 331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말을 잘 듣는 모델 장군을 임명했다. 이후 히틀러는 더욱 깊숙이 작전에 개입하며 무리한 명령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선은 갈수록 엉망진창이 됐고, 이는 결국 동부 전선에서 패배를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히틀러가 큰 방향만 정해줬다. 실제 작전은 일선 장군들에게 믿고 맡기는 편이었고 전과도 좋았다. 그러나 갈수록 몇 번의 큰 승리를 맛본 히틀러는 현장의 소리보다는 자신의영감을 믿었다. 롬멜, 만슈타인 등 유능한 장군들을 해임하거나 제거하면서 작전에 대한 본인의 목소리를 더욱 키워 갔다.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히틀러가 직접 기획, 지휘한벌지 전투에서 남은 전력을 쏟아붓고 패한 뒤 급속히 몰락해갔다.

 

경영 사례: 미쓰비시의 록펠러센터 인수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인 48가에서 51가에 걸쳐 록펠러센터라는 큰 빌딩군이 있다. 89000㎡에 이르는 대지 위에 19개의 상업 빌딩이 들어서 있다. 석유왕 존 D. 록펠러가 1928년 이 부지의 소유주인 컬럼비아대로부터 최장 86년간 임차한 후, 1930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1939년 완공한 것이다. 당시 총 25000만 달러가 투입된 이 빌딩군은 GE를 위시해 금융회사, 출판사, 방송사 등이 입주해 미국 비즈니스의 상징이자 뉴욕 최고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1985, 그때까지 대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컬럼비아대가 이를 4억 달러에 RGI (Rockefeller Group Inc.)라는 부동산 관리업체에 매각했다. 컬럼비아대는 1970년대 이후 맨해튼 중북부에 위치한 캠퍼스 주위가 슬럼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근처의 부동산을 사들여 개발하려 했고, 이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RGI는 록펠러가 그의 유산을 신탁해 후손들에게 수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든 록펠러 트러스트라는 신탁회사가 소유한 기업으로, 록펠러센터가 건축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 복합건물의 개발 및 운용을 주도해온 기업이었다. 빌딩군의 19개 빌딩 중 5개는 이전에 다른 업체에 매각됐던 터라 결국 RGI는 총 14개의 빌딩과 대지를 소유하게 됐다.

 

대지 소유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 록펠러센터의 소유권은 일본의 미쓰비시그룹에 넘어갔다. 이 그룹의 계열사인 미쓰비시 이스테이트라는 부동산 개발 및 투자 업체가 RGI의 주식 51%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인 1990년에는 추가로 지분을 인수해 최종적으로 RGI의 총 지분 중 80%를 확보했다. 결국 이 회사는 RGI의 대주주 자격으로서 사실상 록펠러센터 대부분을 사들인 것이다.

 

록펠러 트러스트가 록펠러센터를 매각한 데에는 미쓰비시 이스테이트가 제시한 가격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RGI 지분 확보에 14억 달러를 지불했는데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고 평했다. 특히 이는 당시 미쓰비시 이스테이트와 록펠러센터 인수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일본의 미쓰이부동산이 제시했던 가격의 두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미쓰이부동산 역시 일본 굴지의 재벌인 미쓰이그룹 산하의 부동산 회사였다.

 

미쓰비시 이스테이트에는 록펠러센터 인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내부 논리가 있었다. 록펠러센터에 입주한 회사들의 상당수는 1990년대 초에 계약을 갱신하게 돼 있었다. 이에 경영진은 1980년대 초호황기의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처럼 임대료를 크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므로 14억 달러의 투자금액도 결코 과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RGI가 록펠러센터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회사가 주인이 바뀌기 전에 이 센터의 14개 빌딩 중 12개 빌딩을 담보로 13억 달러에 달하는 장기 모기지 대출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쓰비시가 인수할 당시에 이 모기지 대출에 대한 이자 지급 규모가 입주사들로부터 받는 임대료 수입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만약 미쓰비시 본사의 당초 예상이 빗나가서 세입자들과 임대료 갱신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세입자들로 받는 임대료 수입이 모기지 대출 이자를 갚기에 매우 모자란 구조가 지속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임대료 인상을 낙관한 미쓰비시의 경영진은 인수 결정을 밀어붙였다. 이 회사는 이후 유지, 보수 비용 등으로 6억 달러를 추가로 투입하는 등 이 빌딩군의 인수와 관련해 총 2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의 여파로 미국에도 불황의 그림자가 닥치자 미국 부동산 시장도 급랭하기 시작했다. 이 침체는 1990년대 초반 내내 지속됐다. 자연히 록펠러센터의 임대료 갱신도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임대료 수입으로 모기지 이자를 갚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RGI의 누적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결국 1995년에 모회사인 미쓰비시 이스테이트는 법원에 RGI의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이 회사의 경영진은 미국의 상징과 같은 이 부동산을 포기할 결심을 굳혔다. RGI가 가진 록펠러센터의 14개 빌딩 중 담보가 걸려 있는 12개 빌딩의 소유권을 채무변제 명목으로 채권단에 넘긴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이 일본 회사가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는지는 당장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96년 이 회사의 손익계산서에는 록펠러센터 투자건과 관련해 일본 돈으로 1600억 엔의 특별 손실이 반영됐다. 채권자에게 넘기지 않은 2개 빌딩의 소유권은 유지한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환율로 환산 시 투자한 20억 달러의 거의 모두를 손해본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의 학계 및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일본의 증시와 부동산이 심한버블양상을 보인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이코노미스트들은 미국 부동산 시장의 활황도 버블이라고 정확히 경고하고 있었다. 이는 많은 언론에도 보도돼 미쓰비시의 경영진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후에 나온 언론보도에 의하면 주재원들도 그렇게 경고했었다. 하지만 미쓰비시 이스테이트의 경영진은 이런현장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그때까지 제한적으로 해외영업을 하던 일본의 은행, 보험사 등의 최고경영진은 글로벌화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매우 모자란 상태였다. 이 금융회사들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아 국내 시장에서만 영업을 해오던 일본 부동산 회사의 최고경영진도 당연히 글로벌 시장에 대한 이해력이 모자랐다. 이 상태에서 국내 부동산 시장의 초호황으로 생긴 돈을 무작정 해외에 투자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 근거는 일본 시장에 대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경험과 지식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계속 올라왔으며, 특히 1980년대 후반 무섭게 치솟았던 일본 부동산 시장의 경험과 지식을 대입해보면 미국의 부동산 시장도 분명 오를 것이라는 게 그들의 예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 이들의 투자결정은 대부분 이런 낙관적인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약 이들 회사에, 최종 투자 결정을 앞두고 몇 번이고 출장을 가서 현장의 의견을 청취했던 임원들이 단 몇 명만 있었어도 이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교수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디큐브시티 대표, 대성합동지주 사장 등을 역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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