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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Insight from Biology

두 세포 이야기: 엄청난 기여, 무시된 보상

이일하 | 184호 (2015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세포생물학 분야에 유명한 두 세포가 있다. 하나는 흑인 여성의 자궁암 조직에서 얻은 헬라세포로불멸의 세포라는 특성 때문에 지난 60년간 전 세계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돼 학문적·경제적 성과를 톡톡히 얻었다. 다른 하나는 낙태한 태아의 폐 조직에서 얻은 WI-38 세포주로서 세포 노화의 원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풍진, 광견병, 소아마비, 홍역, 수두, 대상포진 등 백신 생산에 널리 이용돼 인류의 보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세포주 제공자들은 어떠한 경제적 이득도 취하지 못했고, 이를 개발한 과학자들 역시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도 구성원이 모두 수긍하는 적절한 보상 체계가 필요하다.

 

편집자주

흔히 기업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경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뜻합니다. 30여 년 동안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이일하 교수가 생명의 원리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이 생물학과 관련된 여러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기업 경영에 유익한 지혜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생물학에서는 세포를 분리해 배양한 뒤 여러 가지 세포학적인 연구를 수행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동물세포는 배양하면 같은 종류의 세포가 반복적으로 증식된다. 근육세포를 배양하면 근육세포가, 심장세포를 배양하면 심장세포가 반복적으로 증식된다. 식물과 달리 동물세포는 이미 결정된 분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 세포생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재료로 널리 이용되는 두 세포주(細胞株·반복적 분열이 가능한 세포)가 있다. 암 연구에 널리 이용됐던 헬라(HeLa) 세포주와 노화 연구에 널리 활용됐던 WI-38 세포주가 그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활용됐는지, 이 세포주에 얽힌 영욕에 대해 알아보자.

 

불멸의 세포주헬라(HeLa)’

흔히불멸의 세포주라 불리는 헬라 세포주는 1951 31세의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의 자궁경부암 조직에서 채취한 세포를 배양해 얻은 것이다. 배양의 용이성과 무한 증식이 되는 특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포학 연구에 매우 유용한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다섯 아이의 엄마였던 헨리에타 랙스는 아이를 출산하고 몇 달 되지 않아 존스 홉킨스대에서 자궁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한다. 이때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가 정상 조직과 암 조직에서 각각 세포의 일부를 떼어 배양을 했는데 암 조직의 세포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대학의 의과학자였던 조지 게이(George Gey) 박사에게 세포배양을 의뢰하게 된다.

 

당시까지는 세포 배양을 하면 모든 세포는 일정 기간 세포분열을 하고 난 뒤 2∼3일 이내에 죽어버린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헬라 세포주는 몇 달이 지나도 왕성하게 증식을 하는 특성을 보였다. 이에 게이 박사는 헬라 세포주를 확립하고 다른 일반적인 세포와는 다른 특이성을 갖는 헬라세포의 특성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후 전 세계 많은 과학자들이 불멸의 특성을 가진 헬라세포를 연구해보고 싶어 했다. 이렇게 해서 그 세포의 주인인 헨리에타의 동의도 없이 헬라세포는 배양됐고, 전 세계의 연구실에 퍼져나가 무한 증식을 하게 됐다.

 

헬라세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아마도 소아마비 백신(폴리오 백신) 개발에 이용되면서일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해변 도시 라호야에는 소크연구소라는 세계적인 생물학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연구소의 설립자인 조너스 소크(Jonas Salk) 교수는 소아마비 백신을 대량 생산해 미국을, 나아가 전 세계를 소아마비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위대한 과학자다. 소크 교수는 1950년대 말 뛰어난 증식 능력을 가진 헬라세포를 이용해 소아마비 백신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 덕에 미국은 소아마비 풍토병에서 해방됐고 소크 교수는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됐다. 하지만 소크 교수는 돈에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소아마비 백신 대량 생산 기술을 특허 등록도 하지 않았고 재산을 소크연구소의 설립을 통해 사회에 환원했다. 왜 그 기술을 특허 등록하지 않았냐는 질문에태양을 특허로 등록할 수 있느냐고 답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1

 

이후 유명해진 헬라세포는 빠른 속도로 전 세계 연구실로 퍼져나갔다. 2009년 현재까지 전 세계 연구실에서 증식된 헬라세포의 총량은 대략 20톤 정도로 헨리에타 본인 몸무게의 무려 400배 정도가 불려진 셈이다. 이렇게 불려진 세포주는 암 연구뿐 아니라 에이즈 연구, 독성 분석, 유전자 지도 작성 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됐다. 이러한 헬라세포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2009년까지 6만 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됐고, 현재도 매달 300편씩 새로운 논문이 쏟아진다고 하니 학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세포주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헬라세포를 이용한 관련 특허 또한 11000건에 이른다고 하니 학술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용한 세포주라고 할 수 있다.

 

 

 

헬라 세포주 활용의 윤리적 문제

1950년대 당시에는 세포주를 배양할 때 제공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기본적인 상식 따위가 없을 때였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을 때였다. 인권의식이 매우 취약할 때의 관행으로 기껏해야 세포 제공자의 신분을 가리기 위해 세포주 확립 초기에는헬렌 레인’ ‘헬렌 라슨등의 가명으로 세포 이름을 붙인 정도가 유일한 배려였다. 그나마도 몇 년 뒤 언론에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이름을 딴 헬라세포가 공공연해졌다. 가족들은 한동안 그녀의 세포가 전 세계 실험실에서 가공할 만한 양으로 증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1970년대 들어와서야 알게 됐다. 헬라세포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그 가족의 유전적 소양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지면서 가족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환장할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후 2009년 레베카 스클룻이라는 전기 작가가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Immortal Life of Henrietta Lacks)>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출판하면서 여러 가지 윤리적, 법적인 문제가 제기됐다. 헬라세포는 의학연구에 대단히 중요하게 사용돼 왔을 뿐만 아니라 의약개발이라는 실용적 목적에도 활용됐다. 따라서 경제적 가치가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 엄청난 가치를 가진 세포가 원주인인 헨리에타의 동의를 받은 적도 없이 무한 증식됐다. 더구나 의약개발이라는 실용적 가치 창출에도 활용이 됐다면 이미 죽고 없는 헨리에타 대신에 그녀의 가난한 후손들이라도 그 경제적 혜택을 얻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법적 문제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세포가 전 세계 연구실에서 무한 증식되고 있다는 사실엔 윤리적 문제도 존재한다. 레베카 스클룻의 책은 그런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인간 세포를 재료로 사용할 경우 유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학계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3년 봄에는 헬라세포의 전체 게놈염기서열을 후손들의 동의도 얻지 않고 학회지에 발표해 버려 학계가 더욱 떠들썩했다. 그 염기서열의 정보엔 후손들에 대한 유전병 관련 유전인자의 정보도 들어 있어 유전자 사생활 침해라는 법적 문제도 제기됐다. 결국 저자들은 그 논문을 철회하고 헬라세포의 게놈염기서열정보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완전히 삭제했다. 물론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닐 것이다.

 

WI-38 세포주

헬라세포가 암 세포에서 떼어냈기 때문에 무한 증식이 가능한 불멸의 세포라면 WI-38 세포주는 이론적으로는 불멸의 세포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론 실험실에서 계속해서 배양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불멸의 세포다. WI-38 세포주를 구축한 건 세포 노화 등 세포 생존의 한계를 나타내는헤이플릭 분열한계(Hayflick limit·세포를 계대 배양하면 50회가량은 분열하지만 그 이후로는 분열능력을 상실)’ 현상을 발견한 레너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 박사다.

 

헤이플릭 박사는 1950년대 후반 미국 필라델피아 위스타연구소(Wistar Institute for Anatomy and Biology)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위스타 연구소장이던 힐러리 코프로프스키(Hilary Koprowski)의 지도하에 연구를 하던 헤이플릭 박사는 바이러스가 암을 유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아이디어를 확인하기 위해 바이러스 감염 확률이 극히 낮은 태아 조직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태아 세포는 바이러스에 걸려 있을 확률이 지극히 낮아 바이러스 없는 세포주의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위스타연구소가 있던 펜실베이니아에서는 낙태가 금지돼 있었지만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낙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헤이플릭 박사는 어렵지 않게 태아 조직을 구할 수 있었다.

 

태아 조직의 배양을 통해 헤이플릭 박사는 대단한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헬라 세포주의 영향 탓에배양된 세포는 적절한 조건만 제공되면 영원히 증식한다는 패러다임이 만연해 있을 때였다. 그런데 막상 태아 조직을 배양해 세포주를 키워보니 오래된 세포들이 천천히 증식하다 결국 한꺼번에 성장이 멈추게 된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배양한 태아조직 세포는 대략 50회의 세포분열 후 일제히 세포분열이 중지돼 버렸다.

 

기존 패러다임에 반하는 연구결과를 얻은 헤이플릭은 이를 동료인 폴 무어헤드(Paul Moorhead) 박사와 함께 1961 <실험세포연구(Experimental Cell Research)>라는 저널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은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가 됐다. 이후 모든 세포는 세포 분열의 횟수가 정해져 있다(아이에게서 얻은 세포는 보다 더 많이, 어른에게서 얻은 세포는 보다 적게 세포분열을 할 수 있다)헤이플릭 분열한계’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지면서세포 노화라는 생물학의 새로운 장이 태동됐다.

 

헤이플릭 박사는 또한 태아 조직을 배양한 세포가 냉동실에 얼려서 쉽게 보관이 가능하고, 각종 바이러스에 잘 감염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기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세포주 구축 계획을 세운다. 냉동실에 보관할 수 있으니 다양한 세포주기의 세포주를 무한정 증식할 수 있고, 각종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니 백신 생산을 위해 더없이 좋은 세포주였기 때문이다.

 

1962 2, 헤이플릭 박사는 위스타연구소의 이름으로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비 지원을 받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해 6월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Karolinska Institute)로부터 스웨덴의 한 여성이 합법적으로 낙태하는 과정에서 얻은 태아의 폐 조직을 항공우편으로 받아 이로부터 WI-38 세포주를 구축하게 된다. 증식된 세포주를 조그만 유리용기 앰풀(ampul) 800개에 나눠 담은 헤이플릭 박사는 이를 전 세계 연구실에 적극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당시까지 대부분의 세포주가 헬라 세포주처럼 암세포이거나 비정상세포에서 유래된 세포주였는데 정상적인 세포인 WI-38을 연구할 수 있게 되면서 기초 과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됐다. 헤이플릭 박사는 백신을 만드는 제약업체에까지 WI-38을 아낌없이 나눠줬다. 덕분에 미국의 화학·약학 기업인 머크(Merck)에서는 WI-38을 이용해 풍진 백신, 수두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고, 다른 제약업체들에서도 소아마비, 홍역, 대상포진 등 다양한 질병에 대한 백신 생산은 물론 류머티즘 관절염, 낭포성 섬유증 치료를 위한 의약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포 역시 헬라세포 못지않은 윤리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낙태한 태아를 이용한 세포라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WI-38의 연구실 활용 및 이를 이용해 개발된 백신의 판매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WI-38은 윤리적 문제보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바로 세포주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다.

 

 

코프로프스키 박사는

WI-38 세포주에 대해

대단히 자랑스러워했으나

개발자인 헤이플릭 박사의 공로는

거의 인정해 주지 않았다.

 

WI-38 세포주의 소유권 분쟁

헤이플릭 박사는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인용 횟수를 자랑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엄청난 의학적 가치를 창출하는 WI-38 세포주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위스타연구소의 대접이 신통치 않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박사후 연구원 신분을 벗어나지도 못했지만 연구소장이었던 코프로프스키 박사는 자신을 하급 연구원 정도로 여긴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코프로프스키 박사는 WI-38 세포주에 대해 대단히 자랑스러워했으나 개발자인 헤이플릭 박사의 공로는 거의 인정해 주지 않았다. 여러 제약회사들과 WI-38 사용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에서도 헤이플릭 박사의 이름은 철저히 배제됐고, 심지어 자신의 실험기법(protocol)을 그냥 내줘야만 했다. 이러한 계약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모두 위스타연구소에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헤이플릭 박사는 스탠퍼드대 교수 자리를 얻어 1968 6월에 직장을 옮기게 된다. 헤이플릭 박사가 연구소를 떠나자 WI-38 세포주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불거졌고, 그해 1월에 코프로프스키 소장은 연구비를 제공한 NIH, 위스타연구소를 대표한 코프로프스키, 세포주 스톡센터(ATCC·American Type Culture Collection) 대표, 헤이플릭 박사가 모두 함께 논의하는 모임자리를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 그때까지 남은 앰풀 370개 중 10개는 헤이플릭 박사가 스탠퍼드대로 가져가고, 10개는 위스타연구소에 남겨놓고, 나머지 350개의 앰풀은 모두 세포주 스톡센터에 보관해 뒀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포한다는 협정서를 체결한다.

 

하지만 헤이플릭 박사는 이 협정서의 내용에 불만을 가졌고, 스탠퍼드로 가기 직전 직접 자동차를 몰고 위스타연구소에 가서 세포주 앰풀 370개를 모조리 실어가지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스탠퍼드대로 옮겨온 헤이플릭 박사는 WI-38 세포주를 세포주 스톡센터가 세포를 분양할 때 받는 실비용($15)과 같은 금액을 받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받은 돈은세포배양기금이라는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어 따로 관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위스타연구소에서도 큰 문제를 삼지 않았고, 연구비 제공기관인 NIH에서도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헤이플릭 교수가 NIH에서 새로 개설한노화연구소에 소장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불거졌다. NIH가 강력한 소장 후보로 거론되는 헤이플릭 교수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과거 NIH 연구비를 이용한 연구업적물을 사사로이 훔쳐갔다는 전력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이 언론에 발표되면서 헤이플릭 교수의 인생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스탠퍼드대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WI-38 세포주 앰풀들을 모두 빼앗겼고, 국가 세금으로 얻어진 연구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절취한 매우 나쁜 인간으로 언론에 매도됐다. 결국 1976년엔 자신의 직장인 스탠퍼드대에서조차 손가락질을 받고 쫓겨나야 했다.

 

다행히 세포 노화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학자로서의 명성이 남아 있어서 다음 해인 1977년 오클랜드에 있는 아동병원에 자리를 얻었고, 이후 세포 노화 분야 연구로 NIH 연구비를 따게 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심사위원들에 의해 그의 연구계획서가 선정됐지만 NIH에서 그의 과거 전력을 문제 삼아 연구비 집행을 미뤘고, 지루한 법적 투쟁을 벌인 결과 1981 1월에 NIH 연구비와 WI-38 원 세포주 앰풀 6병을 돌려받게 됐다. 또한 그해 여름 재판정은 NIH와 헤이플릭 교수의 합의를 유도해 원 세포주 6병의 소유주는 헤이플릭 교수로 인정하고, 19병은 NIH가 갖게 했으며, WI-38 세포주를 배포하면서 만들어진세포배양기금’ 9만 달러는 헤이플릭 교수가 개인적으로 써도 좋다고 소유를 인정한다. 하지만 헤이플릭 교수는 이 돈을 모두 변호사비로 쓰고 말았다고 한다.

 

성과에 대한 적절한 보상 체계 마련이 중요한 이유

세포 노화 분야의 선구자적 발견과 최고의 인용 횟수를 자랑하는 논문, 더구나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려냈다고 평가받는 백신 개발에 기여한 혁혁한 공로를 생각하면 헤이플릭 박사는 당연히 노벨상을 받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로열티가 부당하게 배분되는 걸 지켜본 헤이플릭 박사는 심사가 뒤틀렸고, 이 때문에 협정서에 서명까지 하고서도 세포주 앰풀을 모조리 훔쳐 달아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헤이플릭 교수에 대해 학자로서 재물욕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조직의 경영자라면 당시 연구소장이었던 코프로프스키 박사의 실책에 주목할 줄 알아야 한다. 애초에 우수한 성과를 내는 조직원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했다면 이런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기업으로 치자면 직무발명에 대한 적절한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해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은 조직원들의 기술개발 의욕을 북돋워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기업의 기술 축적과 이윤 창출로 이어져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소탐대실에 사로잡혀 성과를 낸 조직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 주지 않는다면 우수 인력이 조직에서 이탈하는 것은 물론 지적재산권 소유를 둘러싸고 소송에도 휘말릴 수 있다. 인재 유출이나 소송 위험 등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계속적인 핵심기술 개발을 통해 기업의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서라도 연구개발 성과를 낸 직원들을 제대로 대접해 줄 필요가 있다.

 

누가 뭐라 하건 헤이플릭 교수가 이뤄낸 학문적 성과의 가치는 인정해줘야 한다. 그가 만약 학교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실직 생활을 감당하지도 않았다면 학자로서의 경력 단절 없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 결과를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 전체에 공헌하는 바도 커졌을 것이다. 조직의 리더라면 무조건 헤이플릭 교수의 물욕을 탓하기에 앞서 성과에 대한 적절한 보상 체계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일하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ilhalee@snu.ac.kr

필자는 서울대 식물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0여 년간 꽃을 공부해 온 과학자로 1993년 개화유전자 루미니디펜던스를 찾아내는 등 개화 유도 분야의 선구자로서 명성을 굳혀오고 있다. 저서로 <이일하 교수의 생물학 산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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