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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통한 학습

정보 담고 소식 전하고 소통하고 함축적 漢詩, 선현들의 SNS

김인호 |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정보력이 빈약했던 전통사회에서 시()는 유용한 정보를 담는 학습도구였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활용한 덕택에 함축적 의미를 담아내면서도 산문보다 전파력이 좋고, 간결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시는 또한 자신의 감성과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귀족들끼리 좋은 시를 서로 베껴 쓰거나 외워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게 일상적 관행이었다. 특히 선현들은 나중에 자신이 쓴 시를 모아 문집으로 출판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시를 써서 줄 때에도 사본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곤 했다. 이 밖에도 시는 여론을 조성하고 반영하는 도구로서의 기능도 톡톡히 담당했다. 지금처럼 SNS가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선 시가 지배층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담당했다.

 

 

 

()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개발한 글쓰기다. 어느 문명이든 일찍부터 춤과 노래를 발달시켜 왔다. 이를 글로 표현할 때 자연히 리듬이 들어갔다. 일종의 노래였다. 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詩經)>은 고대 중국의 시가, 즉 노래를 채록한 모음집이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대중가요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래였지만 글로 옮겨질 때에는 형식을 갖추게 됐다. 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중국의 통일제국을 이룬 한()대부터였다. 이때에도 노래에 가까운 형태이기에 엄격한 형식은 없었다. 그러다가 5개나 7개의 한자로 이뤄진 형식의 시가 생겼다.

 

동아시아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도구, 한시(漢詩)

 

한시(漢詩)의 형식과 내용은 글로벌 제국인 당()에 이르러 최고조로 발전했다. 당은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이었다. 국토의 통일과 안정, 남북 지역을 잇는 대운하 개통, 비단길을 통한 국제 교역의 활성화는 부의 축적과 그에 따른 귀족문화의 발전을 낳았다. 이백(이태백), 두보, 왕유 등과 같은 시인이 이 시기 문학가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시의 고전이 돼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 됐다. 한국 고전에 인용된이태백의 경우는 현재 검색 가능한 범주에서도 거의 1000건이나 되며 두보는 4800여 건이나 된다. 그것도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보유한 고전만 헤아린 것이어서 실제로는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당의 수도인 국제도시 장안(長安, 현재 西安)에는 많은 국가들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에는 통일신라인들도 많았다. 주로 승려와 유학생들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상(義湘)대사는 10년간이나 유학하면서 당시 최고의 유학생으로 칭송받았다. 어릴 때 유학 갔던 최치원(崔致遠)은 당의 과거 시험에 합격했을 정도였다. 의상대사와 최치원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당과 신라를 오갔다. 당의 한자문화는 자연스레 신라로 전해졌고, 한시는 귀족의 문화적 교양이 돼 갔다.

 

이런 전통은 고려와 조선으로까지 이어져 갔다. 우리 선현들은 <시경>과 그 외 수많은 중국의 시들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지금의 영어처럼 한자는 동아시아의 공통 문자였다. 비록 말은 달랐지만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의 귀족들은 한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특히 중국에 사신으로 간 고려와 조선인들은 공식적 업무는 통역의 도움을 받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격조 있게 한시를 적어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했다. 시를 모르고서는 귀족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시는 동아시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다.

 

시는 교훈으로 학습하게 한다

 

원래 시는 은유적 표현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메시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시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 우리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배울 수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기에 세계화를 틈타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조인규(趙仁規)는 그중에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평양 출신인데 청소년기에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당시 고려에는 몽골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똑똑한 청소년을 선발한 것이다. 조인규는 몽골어 실력이 잘 늘지 않자 3년 동안 문을 닫아걸고 몽골어 학습에 몰두했다. 이런 노력 탓에 그는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 앞에서 재치 있는 통역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실력을 바탕으로 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그가 사망하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남긴 시다. 일종의 유언이다.

 

 

 

임금을 섬기는 덴 마땅히 충성을 다할 것이니

事君當盡忠

사물을 대하여선 마땅히 지성스러워야 한다

遇物當至誠

바라노니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願言勤夙夜

낳아 준 아비를 욕되지 않게 하라 無忝爾所生

 

자기 집안이 성장하게 된 것에 대한 이유가 먼저 나오고, 자식들의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강조했다. 자기 수양의 내용은 실력과 도덕성 함양이 될 것이다. 이 시는 조인규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았는데 자기 수양이야말로 다가올 조선왕조의 선비들이 가장 강조한 삶의 주제였다. 이 때문이었을까. 그의 증손자는 조선왕조 행정 체계의 기틀을 세운 조준(趙浚)이다. 조인규의 시가 실제로 후손들의 학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짧은 메시지를 통해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요즘의 경영에서도 고려해봐야 할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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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호

    김인호

    - (현)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 일본 히로시마대 객원연구원 역임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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