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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현장주의=백성과 소통, 헌신=王과 소통 ‘청백리’ 이원익, 70년 관직의 비법은 있다

김준태 | 171호 (2015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오리 이원익은 88년간의 생애에서 무려 70년 세월을 공직에서 보냈다.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세 명의 왕 밑에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그런데 그는 허름한 집에서 노비도 없이 오직 녹봉에만 의지해 살 정도로 가난했다. 청백리의 표상처럼 회자되는 그지만 사실 업무수행 능력과 1인자와의 관계설정 방법, 아랫사람으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부분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그는 언제나 현장으로 뛰어가 확인하는현장주의자였고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였다. 민심이 그를 향하다 보니 왕으로부터 의심을 살 만했지만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임금으로부터의 신뢰도 확고히 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정미년(1547) 10, 당대의 명신(名臣) 이준경은 상서로운 자색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나라를 떠받칠 인재가 탄생했다며 크게 기뻐했다.1)그날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부근)에서 태어난 아이를 두고 한 말이다. 21년이 지나 무진년(1568). 청년이 된 그 아이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급히 입궐해 임금에게장차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이가 매우 위태합니다. 보필할 재주는 얻기 쉽지 않으니 속히 구해야 합니다라고 간청했다. 왕은 강삼(江蔘) 다섯 근을 내려주며 병을 치료하도록 하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영상이 저토록 관심을 갖는 것일까.’ 왕은 청년이 병에서 낫자마자 입궐시켜 직접 만나봤다. 얼굴은 볼품이 없었고 키도 작달막했다. ‘저런, 내가 강삼 닷 근만 낭비했구나.’ 하지만 그로부터 24년이 흘러 임진왜란. 이제는 어엿한 조정의 대신이 돼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앞장 서는 그를 보며 왕은 감탄한다. “그때 원로(이준경)가 천거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참으로 나라를 떠받칠 재주를 가졌다.”

 

나라를 떠받칠 재주

 

이 일화의 주인공은오리대감으로 유명한 이원익이다. 그는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의 고손자로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의 조정에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청백리에도 뽑혔다. 이원익은 88년의 생애 중 70년 가까운 세월을 공직에 복무했고 이 중 40여 년을 재상으로 있었는데 유능하면서도 청렴한 삶으로 임금뿐 아니라 조야의 신망을 두루 얻었다. 이원익이 영의정이 돼 한양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질 정도다.2)

 

156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원익은 처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훗날 그의 큰 무기가 될 중국어 능력을 키운다. 당시에는 젊은 문관들을 별도로 선발해 중국어를 공부하도록 한 제도가 있었는데 다분히 형식적으로 운용됐고 선발된 사람들도 학습에 충실하지 않았다. 중국어는 역관들이나 잘하면 되는 것으로, 양반이 중인인 역관들의 일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원익은 달랐다. 그는 우직하게 중국어를 공부했고 평가 때마다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이때 이원익이 익힌 중국어는 대명 외교에서 빛을 발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고 명나라 군대와의 교섭 업무도 중요해졌다. 명군에 대한 접대나 보급뿐 아니라 공동 작전계획 등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긴밀한 협의가 필요했다. 그런데 양질의 통역관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원익이 탁월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매끄럽게 일을 처리해 나간 것이다. 명나라 장수로부터이 사람은 한인(漢人)이 아니냐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3)

 

이원익은 황해도 도사로 근무하던 중 율곡 이이의 눈에 띄었다. 황해도 관찰사였던 이이는 군적(軍籍) 정리 등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통해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알아보고 감영의 중요한 정무(政務)를 맡겼으며4)중앙에 복귀해서도 그를 적극 추천했다. 이후 이원익은 안주 목사를 지내며 명성을 떨쳤다. 당시 안주는 관서지역의 요충지였지만 연이은 재해와 기근을 겪으며 모두가 부임하기를 꺼렸던 고을이었다. 이원익은 안주로 가자마자 긴급히 구휼 곡식을 나눠주고, 군정을 개혁했으며, 백성들에게 부과됐던 잡역을 감면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권장해 백성들의 부대수입도 늘려줬다.5)이러한 이원익의 공덕을 기려 관서지역 백성들은 뽕나무를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주에서 얻은 명성은 이원익이 재상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토대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경이 전에 안주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먼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해 인심을 수습하라. 지금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적이 만일 경성(京城)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을 명심하고 대처하라”(25.4.28)며 이조판서였던 이원익을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로 삼아 평안도로 파견했다. 왕의 어가(御駕)로 돌이 날아 올 정도로 인심이 흉흉해진 그때 왕이 안전하게 평안도로 피신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민심을 얻고 있는 이원익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이원익은 임진왜란 초기,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쟁 지휘부이자 보급기지였던 관서지역의 민정을 담당했다. 그는 전란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대책들을 시행했으며 쉼 없이 병력을 충원해 전선으로 보냈다.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야습해 보루를 파괴하고 전마 80필을 빼앗는 등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6)그는 맡은 바 임무에 혼신을 다해오직 이원익만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7)선조도평안감사 이원익의 사람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내 지난 날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며 아들과 사위에게도 관직을 제수해 그의 노고에 보답하도록 했다.8)

 

1)<동고유고(東皐遺稿)> 중 후손들이 덧붙인 부록유사(遺事)’에 나오는 기록이지만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해에 이준경은 평안도 관찰사로서 평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원익이 이준경의 문생(제자) 명단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등 이준경으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2)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원익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인조가승지를 보내 하루빨리 입궐할 것을 거듭 재촉했는데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오자 모든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맞이했다고 기록돼 있다.(<인조실록> 1 316)

3)<연려실기술> 18

4)<선조수정실록> 7 101: <선조수정실록> 9 12

5)<선조수정실록> 20 41

6)허목, <동서기언(東序記言)> ‘오리이상국유사(梧里李相國遺事)’

7)<선조실록> 27 130

8)<선조실록> 2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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