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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고찰

행복한 사람이라야 남을 안다 그런 사람과 있어야 신나게 일할 수 있다

이기동 | 158호 (2014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사기를 진작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나아가게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아무나 유도할 수 없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사기도 진작시킬 수 없다. 사람들은 행복으로 나아갈 때 사기가 오르고 신이 난다. 그런데 무한한 행복은 남과 하나가 될 때 찾아지는 것이다. 나와 하나가 돼 주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인정해주고 믿어주기만 하면 된다. 남을 인정해주는 것 중에서 가장 빠른 방법은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만날 때 그와 하나가 돼 그의 문제를 함께 풀어 가면 된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신이 나고 사기가 충천한다. 사기가 충천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인들의 사기는 세월호 침몰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사람의 일은 순조로울 때도 있지만 탈이 나서 어려워질 때도 있다. 일시적인 실수나 단순 사고에 의해 탈이 난 것이라면 후유증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기가 저하돼 탈이 난 것이라면 후유증은 심각하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육체적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운이다. 기는 몸의 상태보다 선행해 움직인다. 몸을 진찰해 병에 걸린 것을 확인한 뒤에 병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몸의 상태만을 살핀 것이다. 기의 흐름으로 본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의 흐름으로 본다면 사람의 몸에 병이 걸린 것이 확인되기 전에 이미 병에 걸려 있다. 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다. 병이 걸리기 전에 나타나는 조짐을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사람의 나이도 어머니의 몸에서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계산하고, 낮의 시간도 해가 떠서 지는 시간까지로 계산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다르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람의 나이를 계산하고,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이미 낮의 기운이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 낮의 기운은 밤 12시에 시작되고, 밤의 기운은 낮 12시에 시작된다. 태극 속의 음양을 그릴 때 선을 일직선으로 그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기가 떨어져 사건이 자꾸 터질 때 해당 사건을 해결하는 직접적인 방법만 가지고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면 다른 사건이 또 터지고, 그 사건을 해결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환자에게기가 부족하다’ ‘기가 허하다고 진단하는 한의사들의 처방이 이에 해당된다. 기를 보충하고 기를 돋워야 병이 낫는 것처럼 사기가 떨어져 생긴 문제는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사기 충전법

사기를 진작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나아가게 유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행복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신나는 길이다. 신이 나면 사기가 올라가고, 사기가 올라가면 문제는 해결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아무나 유도할 수는 없다. 자기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공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공자가 살았던 중국의 춘추시대는 오늘날처럼 사회가 혼란했다. 전쟁은 계속됐고 사건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빠른 해결책을 서둘러 찾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았다.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는 근본적인 방법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유도하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수기(修己).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로는 성급한 사람이었다. 군자가 나서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회를 바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군자의 역할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공자의 답변은 의외였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자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가지고서는 어느 세월에 이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자로는 의심이 들었다. 공자의 방법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됐다. 공자의 방법은 직접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겉도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자에게 반문했다. “그것밖에 안 됩니까?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세상을 바로잡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부연해서 답변을 한다. “자기를 닦아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공자의 답변에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 자로는 답답했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또다시 했다. “그것밖에 안 됩니까?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세상을 바로잡겠습니까?” 공자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자로가 답답했다. 자기가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하면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을 수 없다.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사건이 터진 직접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는 것은 미봉책이다. 속에서 곪아 터진 피부를 속은 가만 놓아둔 채 봉합만 하는 것과 같다. 피부는 바로 봉합이 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터진다. 피부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속에 있는 곪은 곳부터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그런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공자는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자기를 닦아서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닦아서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이고도 어려운 것이다.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했다.”1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행복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도 많지 않다.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답하는 대신 과학자, 정치가, 공무원, 법조인, 사업가, 회사원, 의사, 학자, 운동선수, 의사, 연예인 등으로 답을 한다. 사람들이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 까닭은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중국 전국시대 때 위()나라에 혜왕이라는 임금이 있었다. 위나라의 수도가 양()이었으므로 위나라를 양나라라고도 불렀다. <맹자>에는 위나라의 혜왕이 양혜왕으로 기록돼 있다. 혜왕은 왕이 돼 많은 재산을 가지고 호화롭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큰 별장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온갖 새와 짐승들을 기르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맹자가 찾아왔다. 맹자는 왕도 아니고 재산도 없었다. 호화롭게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왕은 그런 맹자가 가소로워보였다. 왕은 연못가에 서서 헤엄치고 있는 고니와 뛰어 다니는 사슴들을 돌아보면서 넌지시 비꼬았다.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행복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맹자를 훌륭한 사람이라고들 했다.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혜왕에게는 그런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부귀영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됐다. 자신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자기에게 맹자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찾아왔다. 아니꼬웠다. 혜왕의 물음에는선생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다니지만 그런 것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잖아요? 선생은 죽었다 깨도 이런 행복은 누릴 수 없겠지요?’라는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다. 이에 맹자의 답변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라야 이러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니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이런 것을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맹자의 답변으로 보면 훌륭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훌륭하지 않은 사람은 부귀영화를 누려도 행복하지 않고 고관대작이 돼도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큰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한 사람은 사람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유도한다. 때문에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은 사기가 충천하고 신이 난다.

 

행복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사기가 충천한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나무의 가지를 모두 잘라 꺾꽂이를 하는 방법으로 수많은 나무를 만들었다고 하자. 본래의 나무는 이제 보이지 않고 꺾꽂이 돼 자라고 있는 수많은 나무들만이 보일 것이다. 이 수많은 나무들이 본래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 수많은 나무들은 수많은 나무들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한 그루의 나무일 뿐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나무는 모든 나무들을 하나로 여길 것이고 모든 나무 전체를라고 여길 것이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각각 남남끼리 어울려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남남이 아니다. 나는 부모의 세포로 구성돼 있으므로 나와 부모는 연결돼 있는 하나다. 나와 부모가 하나면 나와 형제가 하나다. 나와 형제가 하나면 삼촌과 나는 하나다. 이런 방식으로 확대해가면 하나인 관계가 사촌, 오촌, 육촌, 칠촌 등으로 무한히 확산되다가 급기야 모든 사람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사람만 하나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도 하나고, 모든 물체와도 하나다. 사람이 만약 모든 존재와 연결돼 있는 본질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울 것이다. 그렇게 살고 있는 개인은 그 개인이 죽어도가 죽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체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개체의 죽음은 전체의 살이 지속되는 방법일 뿐이다. 전체는 영원하고 생명도 영원하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삶이 영생(永生)이다. 영생이란 개인의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하나의 차원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하는 사람에게는 늙음의 슬픔과 죽음의 고통이 없다. 그러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행복이란 바로 이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군자이고 참된 사람이다. 반면에 본래 모습을 잊어버린 개인은 자기만이인 줄 안다. 그렇게 사는 개인은 남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개인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늙고 죽는다.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성공을 해도 불행하다. 그런 사람이 소인이요, 짐승 같은 사람이다. 이를 안다면 사람이 추구해야 할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고, 군자가 되는 것이다. 군자가 되면 어떤 경우에도 행복은 유지된다.

 

사람의 노력은 밀려오는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충격을 받으면 고통스럽다. 밥을 한 끼 굶은 사람은 그만큼의 충격을 받고 그만큼의 고통을 받는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밥을 한 끼 먹는 것이다. 고통을 해결하면 행복해진다. 그 행복의 크기는 고통의 크기와 일치한다. 밥 한 끼 먹었을 때의 행복은 밥 한 끼 굶었을 때의 고통과 크기가 같다.

 

그런데 고통과 행복은 묘한 데가 있다.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 고통이 가장 큰 고통처럼 느껴지지만 더 큰 고통을 당한 뒤에는 그 전의 작은 고통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작은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큰 행복을 얻고 나면 그 전의 작은 행복은 행복 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밥 한 끼만 굶어도 난리를 치던 청년이 실연을 당한 뒤에는 주는 밥도 먹지 않는다. 실연의 고통을 당한 뒤에는 밥 한 끼 굶는 고통은 고통 축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실연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사람도 죽을병에 걸리면 실연의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병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실연을 여러 번 당해도 좋을 것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찾기 어렵다.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그 전의 행복은 행복 축에 들어가지 않고 그 전의 고통 역시 고통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공자는 그런 행복을 얻었다. 공자는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라2 고 했다. “가난하여 거친 밥을 먹고 물만을 마시며, 베개가 없어 팔을 굽혀 베고 누워도 여전히 행복하다3 라고도 했다. 도를 아는 것은 생사를 극복하는 것이다. 도를 알면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행복을 얻으면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전혀 고통이 되지 않는다. 공자의 제자 안연도 그랬다. 공자는 안연에 대해훌륭하구나! 안회여. 밥 한 도시락만 먹고 국 한 그릇만 마시며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렵지만 안회는 여전히 행복하게 지내는구나. 훌륭하구나! 안회여4 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행복한 사람은 사람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유도한다. 때문에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은 사기가 충천하고 신이 난다. 맹자는 그런 내용을 문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시경>에 이르기를문왕이 전망대를 축성하기 시작해 측량하고 재어보고 하자, 서민들이 와서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왔기 때문에 며칠이 가지 않아 완성됐다. 전망대 쌓는 일을 너무 급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서민들이 자녀들처럼 와서 도왔다. 왕이 별장의 뜰에 있을 때는 사슴들이 와서 앞에 엎드리고 있었다. 사슴들은 포동포동했고 백조들은 깔끔했다. 왕이 연못가에 있을 때는 아아! 연못에 가득한 물고기들이 좋아서 튀어 올랐다라고 했습니다. 문왕이 백성들의 힘으로 전망대를 짓고 연못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전망대를 영대라 부르고, 연못을 영소라 불었으며, 거기에 사슴과 물고기들이 있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옛 임금은 백성들과 함께 행복을 누렸으므로 참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습니다.5

 

맹자의 말처럼 백성들을 신나게 만든 것은 문왕의 마음이었다. 문왕은 백성들을 남으로 여기지 않았다. 문왕이 통치할 때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무한한 사기는 무한한 행복으로 인도할 때 가능하다

침체된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들은 행복으로 나아갈 때 사기가 오르고 신이 난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줘도 사기가 오르고, 실연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찾아줘도 사기가 오른다. 외국과의 운동시합에서 한국이 이기는 것만으로도 한국인들의 사기는 올라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올려놓은 사기는 오래 갈 수 없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에게 효력이 없고, 실연 당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찾아주는 것은 사랑을 회복한 사람들에게 효력이 없어진다. 사람들을 작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 행복이 충족된 사람들에게도 효력이 없지만 더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도 효력이 없다. 사기를 무한하게 진작시키는 것은 오직 무한한 행복으로 인도할 때만 가능하다.

 

무한한 행복은 남과 하나가 될 때 찾아지는 것이다. 나와 하나가 돼 주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나와 하나가 돼 주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찾는다면 부모다. 부모는 자녀와 하나가 되는 사람이다. 부모를 만나면 신이 나고 사기가 충천한다. 사람들 중에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부모에게서 얻는 경우가 많다. 올림픽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들의 훈련 과정은 혹독하다. 쉬엄쉬엄 훈련해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보기 어렵다. 많은 금메달리스트들은 혹독한 훈련과정을 견딜 수 없을 때 부모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한다. 부모의 정을 생각하면 힘이 솟구치고 사기가 충천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쉽지 않다. 자기의 자녀에게는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을 자녀처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부모처럼 행동하면 위선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오직 한마음을 회복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한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모가 자녀를 믿고 인정하듯 다른 사람을 믿고 인정한다. 사람은 남에게 인정을 받으면 신이 난다. 한국인들은 왕자병의 소지자이고, 공주병의 소지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국인들은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남에게 무시를 당하면 왕자와 공주는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 한국인들을 신나게 만드는 것이 의외로 간단해진다. 인정해주고 믿어주기만 하면 된다. 한국인들은 남에게 인정을 받을 때 무시당해서 생긴 상처가 낫는다. 남을 인정해주는 것 중에서 가장 빠른 방법은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옛날 황희 정승이 그랬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집에 돌아왔을 때 며느리와 딸이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딸이 먼저 황희 정승에게 다가와서아버님, 소는 문구멍으로 들어가지요?”라고 물었다. 소는 대문으로 다닌다. 대문의 구멍도 구멍이다. 소가 대문을 통과하는 것도 문구멍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딸과 한마음이 된 황희 정승은 딸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답변을 했다. “그래, 소는 문구멍으로 들어간다.” 아버지에게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은 딸은 신이 났다. 신이 나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싸울 일이 없어진다. 마음이 평화로워진 딸은 더 이상 올케와 싸울 일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와서 물었다. “아버님, 소는 문구멍으로 못 들어가지요?” 황희 정승은 며느리와 한마음이 됐다. 며느리의 뜻은 소가 방문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황희 정승은 며느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황희 정승에게 인정받은 며느리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됐다. 마음이 평화로워진 며느리는 시누이와 싸울 일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부인이 말을 걸었다. “소가 문구멍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옳고, 문구멍으로 못 들어간다는 말도 옳다고 하니, 도대체 그런 판결이 어디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들은 황희 정승은 바로 부인과 한마음이 됐다. 부인은 딸과 한마음이 되지도 못했고, 며느리와 한마음이 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부인의 판단으로는 둘 다 옳을 수가 없다. 황희 정승은 그런 부인의 마음과 하나가 됐다. “당신의 말이 맞구려!” 황희 정승에게 인정을 받은 부인의 마음도 치유가 됐다. 마음이 평화로워진 부인은 아무 불만이 없었다.

 

황희 정승의 방식은 어떤 사람과 만날 때 그와 하나가 돼 그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황희 정승은 사람들을 신나게 만든다. 황희 정승이 있는 곳에는 사기가 충천한다. 사기가 충천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황희 정승의 방식을 오해하면 안 된다. 황희 정승의 뜻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황희 정승의 방식은 어떤 사람과 만날 때 그와 하나가 돼 그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최고의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황희 정승은 사람들을 신나게 만든다. 황희 정승이 있는 곳에는 사기가 충천한다. 사기가 충천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황희 정승이 정치하던 시기의 한국인들에게는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한글이 만들어졌고, 과학이 고도로 발달했으며, 예술이 발달하고, 농사짓는 법을 비롯한 각종 산업이 발달했다.이순신 장군이 만들어낸 기적도 예외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열두 척의 배를 가지고 수백 척의 배를 가진 적군과 싸워 이겼다.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면 기적은 일어난다.

 

그러나 황희 정승의 방법을 흉내내기만 하면 성과가 없다. 황희 정승의 마음가짐이 되지 않고서는 효과가 없다.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리바리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오직 황희 정승의 마음가짐을 닮을 때만 효과가 있다. 그의 마음가짐을 닮기만 하면 해결책은 저절로 찾아진다. 지금 한국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열두 척의 배로 수백 척의 배를 가진 적군과 싸울 때처럼 어렵지는 않다.

 

이제 한국인들은 일어서야 한다. 한국인들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황희 정승이나 이순신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이기동성균관대 대학원장 kdyi0208@naver.com

이기동 교수는 일본 쓰쿠바대에서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대만 국립정치대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수학했다. 2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7년 사서삼경을 최초로 완역하는 등 유학(儒學)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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