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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 예술에서 배우자

신동엽 | 139호 (2013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모두가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1.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20세기 100년을 지배한 효율성을 대체하는 21세기적 시대정신으로 불리는 창조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차르트나 피카소와 같은 혁명적 예술가들이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기발한 기업가들은 어디에서 창조적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었을까? 누구나 인류의 삶을 바꾼 창조적 인물들을 닮고 싶어 하나 이들의 업적은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창조성은 소수의 타고난 천재들에게나 해당되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능력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게 된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동료들과 함께 창조적 인물들이 가장 많이 모인 집단인 예술가들 중에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예술가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기타 연구를 토대로 창조성이 형성되고 발휘되는 환경적 조건을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는 책을 저술하고 있다. 경영학자인 필자가 뜬금없이 예술에 대한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타고난 천부적 재능 이외에 창조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이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도 창조적 업적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필자가 DBR 지면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듯이 창조성은 21세기 시대정신이다.

 

창조성이 거스를 수 없는 21세기 시대정신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더라도 21세기 창조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다. 창조성을 21세기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성이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고 심층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성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가장 손에 잡히지 않는 극도로 모호한 개념 중 하나다.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원리는 물론 개념 정의마저 학자마다 다 다르다. 창조성은새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기반이 되는 능력이라는 지극히 일반론적인 개념 정의 이외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다. 예를 들면, 창조성이란 개인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조직이나 제도, 사회적 환경의 산물인가에 대한 합의도 없다. 또 창조성이 사고와 행동의 과정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 결과에 관한 것인지도 명확하게 정립돼 있지 않다. 창조적 산출물이 우연히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치밀한 의도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도 논쟁적이다. 창조성을 천재들의 영역으로 보는 입장도 있고 보통 사람도 창조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창조성이 타고난 유전적 자질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교육되고 양성될 수 있는 것인가 등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창조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최근에야 비로소 시작된 데 있다. 창조적 천재들의 이야기는 지난 5000년간의 역사시대 동안 예술과 문학, 철학, 역사 등에서 즐겨 다뤄온 주제 중 하나였으나 체계적인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즉 창조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일대의 거장 심리학자인 로버트 스턴버그 교수와 동료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문사회과학 분야들 중 창조성이 가장 많이 연구된 심리학의 경우만 살펴봐도 1975년에서 1994년까지 20년 동안 창조성과 관련된 연구는 전체 심리학 연구의 1.5%에 불과했으며 심리학 교과서들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스턴버그 교수는 창조성이 체계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웠던 이유로 신비주의적 접근을 지적한다. 즉 고대 사회에서부터 창조성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으로서 신에게서 받은 영감이 그 원천이라는 신비주의적 전제가 당연시돼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성의 정확한 이해에 더 큰 방해물은 도구주의적 접근이다. 21세기로의 전환기를 전후해 창조와 혁신이 기업경쟁력의 새로운 원천으로 강조되면서 경영컨설턴트나 저널리스트,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갑자기 창조성의 원천들을 피상적으로 나열하는 책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접근은 창조성을 기업의 이윤추구와 같은 성과창출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도구주의적 한계를 가진다. 즉 창조성이라는 흥미진진한 현상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나 확고한 학문적 근거도 없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수박 겉핥기식의 창조성 모형들이 유행처럼 남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접근은 20세기를 지배하던 효율성으로부터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조성으로 시대정신이 전환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중대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장은 경쟁력 강화의 효과적 수단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다가 더 나아 보이는 수단이 등장하면 급속히 관심이 사라지는 유행으로서의 창조성은 본래 창조성이 가지는 역사성과 시대정신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킨다.

 

도구주의적 접근의 또 다른 한계는 창조성을 연장이나 공구와 같은 도구로 보기 때문에 사용자의 뜻에 따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관리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과정, 그리고 대상을 관리 가능한 영역에 한정해 개인이나 조직, 사회의 창조성을 섣불리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우를 범한다. 그러나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과정은 워낙 다양하고 광범위해서 기계나 연장처럼 관리한다는 것은관리 불가능한 대상을 관리하려는 헛된 시도(Managing the Unmanageable)’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전 세계적 유행에 맹목적으로 동조해 창조성을 행정과 경영의 핵심 도구로 추구했다가 좌절 끝에 다시 20세기적 효율성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사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관리 불가능한 대상을 관리하겠다고 시도하는 도구주의적 접근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새로운 100년을 주도할 시대정신으로 평가되는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원리를 깊이 있고 정확하며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현재까지 인류의 학문적 자산으로는 확실한 해답이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러 학문 분야들에서 창조성의 한두 가지 단편들을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한 걸음마 단계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차선의 대안은 무엇일까?

 

2. 예술에서 창조성의 원리를 배우라

필자는 현재로서는 예술이 창조성의 원리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해 줄 최고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효율성 사고가 지배했던 현대 산업사회에서 예외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됐던 창조성을 집중적으로 다뤄온 유일한 분야가 바로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은 의식주 수준의 1차적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제품들을 대량으로 싸게 만드는 것이 당면과제이던 20세기 산업사회의 효율성 만능주의 패러다임에서는 결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었다. 20세기 100년 동안 예술은 경제나 정치 등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 분야들과는 멀리 떨어진 변방의 아웃사이더였다. 따라서 예술은 소수의 예외적인 기인들이나 천재들의 영역으로 치부됐고 결코 체계적으로 이해되거나 주류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창조성이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하면서 예술이 사회 발전의 주류로 자리매김을 할 때가 온 것이다. 21세기 창조사회는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예술의 시대.

 

창조성은 예술의 본질 그 자체다. 예술은 창조성이 없으면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전들은 예술을새로운 미적(美的)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은창조두 가지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연구한 학자들은 예외 없이 창조성을 다른 분야들과 구분되는 예술의 핵심 특징으로 강조하고 있다. 워싱턴대의 예술사회학자 하워드 베커 교수는 예술세계(Art World)를 미적 창조성의 생산과 확산에 관여하는 다양한 집단들로 파악했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 교수는 문화예술 분야를 아예창조산업(Creative Industries)’으로 부르기도 했다. 토론토대의 경영학자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도 전통적으로 예술과 과학 분야에 집중돼 있던 창조적 계급(Creative Class) 21세기에는 여러 다른 분야들로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이 21세기 국가발전 전략으로 제시한 14개의창조산업대부분이 문화예술 분야이다. 21세기 초 가장 창조적 인물로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주도한 애플의 모든 창조적 상품들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한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이해는 극도로 예외적인 소수 천재들만의 영역으로만 인식돼천부적 재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나 신이 선물로 주는 듯 불현듯 찾아오는예술적 영감에서 그 원천을 찾는 신비주의적 접근이 주를 이뤄왔다. 또한 예술과 예술가들을 주로 연구해왔던 예술학이나 미학 등의 인문학에서는 예술작품의 심미적 가치나 예술사조 측면에서 가지는 의미 등 예술 작품의 내용 그 자체는 깊이 있게 연구해왔으나 그런 예술작품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창조적 행위의 원천이나 과정, 조건, 환경 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예술이론이나 미학 등과 같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뛰어난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과 영감을 통해 풍부한 지식과 좋은 취향을 획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나 예술 창조성이라는 흥미진진한 현상의 원천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필자는 창조적 예술작품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이런 창조적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 환경적 조건에 관심을 가진다. 즉 필자는 창조적 예술작품의 탄생에 천재적 예술가들의 창조적 재능과 영감이 중요한 원천이 된 것은 사실이나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 예술가들이 어떤 시기에,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어떻게 예술을 접하게 됐으며,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했으며, 어떤 기회들과 장애요인들을 가졌는지 등과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다.

 

 

3. 예술창조성에 대한 인문학적 감상과 사회과학적 이해의 차이

필자는 독자들이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에서 잠시 벗어나 사회과학자의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위대한 예술가들과 예술작품들에 대해 필자가 권하는 사회과학적 관점은 작품의 심미적 우수성의 감상에 관심을 가지는 인문학과는 전혀 다른 질문과 해석을 던진다. 사회과학적 접근은 왜 이 걸작들이 예술적 관점에서 뛰어난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왜 하필이면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창조적 예술작품들이 집중적으로 탄생했을까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다.

 

사회과학적 관점은 인문학과 달리 예술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시야를 거시적으로 확장해서 그 작품을 낳은 환경과 조건,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즉 사회과학적 접근법은 사고의 폭을 전후, 좌우, 상하 등 360도 모든 방향으로 확장해서 그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면 인문학은 그 미학적 탁월함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사회과학은 시간 기준에서 한 단계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요소들이 그 작품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고 그 다음 시대로 넘어가 그 작품이 다른 예술가들이나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 동시대 주변 환경으로 눈을 돌려 어떤 주변 사람들이나 조건들이 그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필자는 21세기 창조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반으로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인문학보다는 사회과학적 접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위대한 창조적 예술작품에서 아무리 큰 감동과 영감을 받아도 자신이 그런 창조적 산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 예술품이 탄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환경과 조건들, 그 구체적 과정을 사회과학적으로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면 그런 환경과 조건들을 의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자신도 창조적 산출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확률을 대폭 높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에 대한 실제 예를 이해하기 위해 경계구조, 분권화, 동기부여라는 세 가지 사회과학적 요소가 창조적 예술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는 예술작품 자체의 심미적 특징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예술이론이나 미학 등 기존 인문학에서 다루지 않는 전형적인 사회과학적 요소들이다.

 

4. 예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1) 무경계 구조: 창조성은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에서 나온다.

세계 문화예술사를 통틀어 예술창조성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지역은 15세기 피렌체, 20세기 초 파리, 20세기 후반 뉴욕 등일 것이다. 기존의 인문학적 예술론에서는 이런 시기와 지역에서 활동했던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창조적 작품의 예술적 탁월함에 초점을 맞춰왔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니진스키, 케이지, 폴락, 커닝햄, 워홀 등 무수한 천재들의 위대함과 그들이 남긴 걸작들의 예술적 가치는 익히 들어왔던 그대로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 내용과 천재성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에서 잠시 벗어나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이런 시기와 지역들을 꿰뚫는 환경적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 지역들에서 집중적으로 창조적 걸작들과 천재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이 세 지역과 시기에 배출된 세계적 거장 예술가들과 걸작들의 수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밀도가 높다.

 

세계 예술창조성의 역대 3강으로 볼 수 있는 이들 지역과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무경계 구조다. 즉 이 시기에 이 지역들에서 예술 분야들 간의 영역 구분을 탈피해 전혀 다른 다양한 영역들 간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이 예외적으로 활발했던 것이 바로 창조성의 비결이었다. 예술 분야들 간 명확한 구분과 강한 경계는 각 분야 내부에서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응집력 강화에는 도움이 되나 다른 분야들과의 단절을 초래한다. 따라서 분야들 간 영역구분이 명확한 환경에서 각자의 분야에 선택과 집중하는 사회 구조는 기존 예술 사조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발전과 심화에는 도움이 되나 그 틀 자체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창조와 혁신을 만들어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경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다른 분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경계파괴는 사회과학에서 특히 강조해온 창조와 혁신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원천이다. 예술 분야에서 시도된 경계파괴는 1950년대 사회과학의 화두였던 학제 간 접근(interdisciplinary approach)이나 자연과학에서 최근 유행어가 된 통섭(conciliation)보다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을 뿐 아니라 폭과 깊이 또한 월등하다. 예술에서의 경계파괴는 음악과 미술처럼 서로 다른 예술 분야, 같은 예술 분야 내에서도 다른 장르, 다른 전통, 다른 지역, 다른 시기, 다른 사회적 위상 등 존재하는 모든 구분 짓기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포함된다. 예술창조성의 전성기에 피렌체, 파리, 뉴욕 등은 바로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이질성과 다양성의 만남을 촉진하는 무경계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예술 분야들 간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이 가장 활발했다. 피렌체에서 발원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르네상스 맨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듯 회화, 조각, 건축, 문학, 음악, 무용 등 예술 분야 간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의 경계 넘어서기였다. 메디치가()는 이런 다양한 예술 분야들이 서로 만나도록 해준 플랫폼 역할을 한 것이다.

 

모든 분야의 현대 예술이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는 20세기 초 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서로 다른 예술 분야 간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러시아발레단(Ballet Russes)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초연이다. 단장인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발레단이 막 새로 지어진 파리 샹젤리제극장에서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스트라빈스키의 충격적인 음악과 당시로서는 야만적이고 기괴하게 느껴졌던 니진스키의 안무로 봄의 제전을 초연했던 1913 519일은 음악과 무용, 미술 등에서 모두 현대 예술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그 후 불새 등으로 이어진 러시아발레단의 파리 공연 시리즈에는 피카소, 달리, 샤갈 등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도 무대나 의상 디자인 등에 참여해 그야말로 시각예술, 음향예술, 공연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 분야들 간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이 이뤄졌다.

 

20세기 중후반 뉴욕 역시 마찬가지다.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같은 불확정성(indeterminacy) 아이디어를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1940∼1950년대를 전후해 음악, 미술, 무용 등에서 동시에 뉴욕에서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다른 예술 분야들 간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의 결과다. 음악에서는 케이지가 피아노 스트링 사이에 무작위적으로 이물질을 끼워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음악이 탄생하도록 만든조작된 피아노(prepared piano)’로 연주를 했고 미술에서는 폴락이 물감을 붓으로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대형 캔버스에 뿌리는 기법을 사용해 최종 결과를 자신이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의 흐름이 결정하게 하는 액션페인팅을 선보였으며, 또 커닝햄은 미리 정해진 안무 없이 각 무용수가 몇 가지 동작만 가지고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 공연마다 현장에서 새로운 안무를 만들어나가는 현대 무용을 만들어냈다.

 

경계 넘어서기는 다른 예술 분야 간 이외에도 다양한 차원에서 끊임없이 시도되며 인류 예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다른 문화권 예술가들 사이의 만남도 그중 하나였다. 피렌체, 파리, 뉴욕에 몰려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은 출신 문화권이 다양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경계 넘어서기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피렌체 두오모성당 천장 건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피렌체 지역 건축가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그 어떤 전제 조건도 없이 공모했다. 20세기 초 파리에서도 피카소, 달리, 미로 등은 스페인 출신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샤갈, 스트라빈스키, 니진스키 등은 러시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래 뉴욕은 아예 출신지를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야말로 멜팅 폿(melting pot)이다. 다른 문화권들 간 만남은 예술창조성으로 직결됐다. 입체파의 최초 작품으로 흔히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불리는 피카소의아비뇽의 여인들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됐던 아프리카 토산품 박람회에서 아프리카 나무 조각들의 각진 면 처리와 강렬한 구도에 충격을 받아 탄생했다. 또 현대무용의 거장 마사 그래험은 1930∼1940년대에 기교 위주로 발전해온 서구 무용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인도, 태국, 동남아, 중동 등 다양한 문화권의 춤을 연구했으며 우리나라의 최승희가 일제 강점기 때 승무나 보살춤 등 우리 전통 무용을 현대무용에 연결해 세계적 극찬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런 추세 덕분이었다.

 

경계 넘어서기는 심지어 시간을 넘어서서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기도 한다. 영화냉정과 열정 사이로 유명해진 두오모성당은 1차 완공 후 50여 년간 이 거대한 건물의 천장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해결하지 못해 미완성으로 있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약관의 부르넬리스키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돔 천장을 건축하는 방법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거의 1400여 년 전 1세기경에 지어진 로마의 판테온 건축술에서였다. 또 마사 그래험과 머스 커닝햄의 스승이자 현대무용의 초기 선구자로 평가되는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20세기 초 당시 서유럽형 고전 발레를 넘어서서 새로운 형태의 춤을 찾기 위해 고대 이집트 벽화와 인도 유적지 조각의 동작을 연구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이질적 분야 간 만남은 고급 예술과 대중예술 간 위상의 경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라벨, 쇼스타코비치, 거쉰 등 현대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은 20세기 초 흑인 대중음악으로 부각되던 재즈를 적극적으로 작곡에 활용했으며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 등이 1960∼1970년대 뉴욕에서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을 결합하고 여기에 다른 매체들까지 적극적으로 통합해 팝아트를 창시한 것은 잘 알려진 예다. 20세기 말 음악, 미술, 디자인,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를 아우르는 핵심 사조 중 하나인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대표적 작곡가인 필립 글래스는 핑크플로이드나 예스 같은 1970년대 록밴드들의 공연 방식을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적극적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관점, 아이디어, 지식, 문화 등이 활발하게 만나는 정도는 국가나 사회, 지역, 시기에 따라서 다르며 같은 시기, 같은 사회에서도 분야나 조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것은 개인 예술가의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회적 요소들이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영감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라도 이런 경계 넘어서기가 얼마나 활발한 시기와 지역에서 활동하느냐에 따라 그 창조성의 발현 정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이끄는 조직에서 창조적 혁신이 활발하게 발생하기를 원한다면 리더들이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부서 간이나 분야가 모든 경계를 없애서 무경계 조직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2) 분권화: 창조성은 중앙집권적 동원이 아닌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구조에서 탄생한다.

창조성이 전 세계적으로 21세기형 성장의 핵심 기반으로 인식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은 창조성을 정부 주도로 중앙집권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호주 등 다른 나라들도 이미 2000년경부터 우리와 유사한 방향으로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부주도적 중앙집권적 동원체제가 창조성 발현에 효과적일까? 예술 창조성의 발현 과정을 사회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예술 창조혁신이 왕성하던 지역이 갑자기 쇠퇴하는 경우를 보면 예술가들이 자율적이고 어떻게 보면 무질서해 보일 정도로 자유롭게 시도하던 창조혁신을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시스템을 구축하려다 의도치 않게 창조성의 원천 자체를 파괴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구조가 창조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해 획일적 사고가 지배하게 되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의사결정이 오류를 범하는 경우 일부가 아닌 전체가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랜 기간 한 사회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해오던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붕괴될 때 갑자기 창조성이 꽃피는 경우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다. 즉 분야를 막론하고 창조적 혁신은 다양한 실험들이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시도될 때 창출 가능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이나 사회는 단기 효율성은 높을지 모르나 창조성은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시민들로 구성된 피렌체 시민협의회와 메디치 등 일부 가문들의 자율적 후원에 의해 꽃 피우기 시작한 르네상스 예술이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교황청과 정치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그 동력을 잃기 시작한 것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후 서유럽 예술의 중심은 세계에서 가장 분권화되고 민주적 사회시스템을 가진 네덜란드, 그리고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등 자율적 분권화가 강한 지역들로 이동해갔다.

 

이와 반대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은 예술 창조성을 피폐하게 만들기 일쑤인데 최근 미국에서도 극우파 정권이던 아들 부시 대통령 정부가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Arts)의 배분과정에 개입해 미국의 주류 청교도적 가치관에 적합한 예술가와 예술 작품만 지원하는 조치를 강행하려다 예술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다. 강력한 극좌파 정권 또한 중앙집권적 구조로 인해 극우파 이상으로 예술 창조혁신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스탈린이 직접 쇼스타코비치의 혁신적 오페라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Lady Macbeth of Mtsensk)’을 타락한 자본주의적 작품으로 공개 비판하면서 강제 중단시킨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은 무너진 구동구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바람직한 예술과 바람직하지 않은 예술을 강압적으로 구분해 지원하거나 탄압함으로써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들이 사라지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라는 척박한 한 가지 사조만 남게 된 것은 좋은 예다.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예술이 얼마나 척박해지느냐는 체코 민주화 후 대통령에 선출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벨이 공산 정권 서기장이 사용하던 집무실 그림에서 받았던 충격에서 잘 알 수 있다. 하벨은 벽에 걸린 엄청난 규모의 정치선동적 그림을 보고는 공산 정권의 실패는 이념보다 중앙집권적 전체주의 체제가 낳은 예술적 취향의 획일성과 저급함, 빈곤에서 초래됐다고 한탄했다.

 

반대로 중앙집권적 권력이 지배하던 사회가 분권화되고 자유로운 체제로 변화하면서 예술 창조성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발현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막강했던 동서 로마제국, 교황청, 신성 로마제국 등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권력이 지배하던 중세 암흑시대가 붕괴되면서 각 도시 중심의 분권화된 사회가 도래한 결과 르네상스가 발생한 것은 잘 알려진 역사다. 중앙집권 체제가 분권화되면서 예술 창조성이 급증했던 예는 전통 예술과 현대 예술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파 미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직이론과 네트워크이론의 태두인 컬럼비아대의 해리슨 화이트 교수는 1965년에 출간된 <캔버스와 커리어(Canvasses and Careers)>라는 걸작에서 프랑스 인상파 미술의 등장을 작품 내용의 독창성이나 화가의 천재성이 아니라 그 이전 200여 년간 프랑스 예술계를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해온 막강한 왕립 예술원, 즉 아카데미 시스템의 붕괴에서 찾고 있다. 40여 명의 소수 엘리트들로 구성된 아카데미의 살롱전은 인상파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매년 한 번씩 개최되던 거의 유일하고 권위 있는 등단 기회였는데 아카데미는 미술 수집가들과 구매자들이 모이던 살롱전의 기획은 물론 전시작 선정까지 독점적으로 결정했다. 따라서 모든 화가들은 아카데미가 주최하던 살롱전에 입상하기 위해 아카데미가 선호하던 작품 제작에만 몰두했다. 요즘 루브르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한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거대한 규모의 종교화나 역사화 등이 그것이다. 또 아카데미는 바람직한 예술의 내용과 형식도 중앙집권적으로 규정했는데 예를 들면,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주제, 자연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 인간 회화에서 고결한 모습과 자세, 구성의 균형과 조화, 통일성 등을 모두 갖춰야만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한다고 명시적으로 못 박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후반 경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시민사회의 등장과 급속한 산업화 등으로 아카데미의 지지 기반이던 왕족과 귀족들이 몰락하고 상공인, 즉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주도 계급으로 등장하면서 프랑스 미술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다. 일단 중앙집권적으로 화단을 지배하던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갑자기 약화되면서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스타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작품을 시도하는 화가들이 늘었다. 또 미술작품의 고객도 대저택의 큰 벽면을 장식할 수 있는 대작을 선호하던 왕족과 귀족들이 몰락했고 새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집을 장식할 만한 훨씬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원하게 됐다. 그런데 아카데미와의 긴밀한 커넥션을 가졌고 또 스스로도 상당한 심미안을 가졌던 왕족이나 귀족들과 달리 이들 신흥 부르주아는 예술작품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좋은 작품들을 구할 수 있는 화가들과의 직접 연결될 통로도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아카데미 시스템에서 소외됐던 일군의 비제도권 화가들과 이들을 새로운 구매자인 부르주아 상공인들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화상(gallery), 그리고 이들을 위해 어떤 작품이 좋은지를 전문적으로 감식해주는 새로운 직업군전문 비평가들이었다. 이들이 서로 결합된 구조에서 탄생한 첫 번째 미술사조가 바로 인상파였다. 결과는 획기적이었다. 아카데미가 독점적으로 화단을 지배하던 시절 살롱전에서 번번이 낙선하던 주변부 화가들이 단숨에 프랑스 미술계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고 이들이 짧은 시간 안에 그려낸 작은 크기의 작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들과 동시에 무수한 전문 화상들과 비평가들이 군웅할거하면서 서로 경쟁하며 끊임 없이 새로운 시도들이 쏟아져 나오며 인상파는 20세기 현대미술로의 징검다리가 됐다.

 

즉 화상들은 경쟁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아카데미 스타일의 획일화된 화풍이 아닌 화가 각자만의 독창적 스타일을 선호했고 전문 비평가들이 이런 시도들의 미학적 의미를 각자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설명해줬다. 따라서 이때부터 화가들은 아카데미라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권력의 심사 통과 요건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 있는 작품들을 창작해내는 데 주력하게 됐다. 특히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화풍을 만들어내느냐 여부가 화가로서의 위상을 결정하는 핵심 관건이 됐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인류 역사상 르네상스 이래 최고의 예술 창조성 집합지로 불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파리 예술계였고 결과적으로 미술, 음악, 무용 등 모든 분야의 현대예술이 탄생했다.

 

분권화와 자율성, 수평적 구조 등은 예술가 개인의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과 전혀 상관없는 사회적 요소들이다. 만일 이런 사회과학적 시각을 모른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상파는 기존 주류 화단과 다른 예술관을 가진 마네와 모네 등 천재적 화가들이 우연히 동시에 등장하면서 탄생했다는 단순한 해석만을 믿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3) 내재적 동기부여: 창조성은 인센티브와 이익추구가 아닌 예술 자체로의 몰입에서 나온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는 예술세계도 급속하게 시장화시키고 있다. 미술시장의 글로벌화에 따라 스타 작가들의 작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으며 음악이나 무용과 같은 공연 분야의 경우에도 스타가 출연하는 공연의 티켓이 너무 비싸 스폰서들과 일부 부유층만이 즐길 수 있고 대다수의 진정한 예술애호가들은 엄두도 못 낸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예술진흥 정책에는 예술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상식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작품활동을 통한 이익 창출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 예술가들이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잡념 없이 창작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창조적 작품들이 양산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의 창조혁신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가난한 예술가라는 상투적 표현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는데 경제적 대가를 바라고 걸작을 만들어낸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예술 창조혁신은 아무런 대가나 목적 없이 예술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에서 탄생했다.

 

순수 예술 창작에 접근하는 태도에는 관객이나 구매자의 취향과 선호를 반영해서 관객이 많이 오거나 비싸게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반대로 관객이나 구매자의 취향과 상관없이 예술가 자신의 독창적 미학에 따라 창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예술의 창조혁신사를 사후적으로 분석해보면 최소한 순수 예술 분야에 관한 한 절대 다수의 창조적 혁신은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에서 나왔다. 따라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창조적 예술작품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경우는 음악에서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잘 알려진 예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현대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이나 케이지의 ‘433가 초연 시 청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등 혹평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미술에서도 생전에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한 반 고흐나 상업미술로 폄하됐던 잭슨 폴락 등 부지기수다. 즉 대부분의 창조적 예술 작품들은 최소한 창조적 혁신이 발생했던 당시에는 거의 팔리지 않으며 후대에서야 그 가치가 인정돼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개념예술(conceptual arts), 설치미술, 현대음악, 현대무용, 부조리연극 등이 주도하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 예술에서는 그 정도가 극에 달한다. 이에 대해 현대음악의 거장 블레즈는 예술은 항상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수준이나 안목, 시대적 대세를 앞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본질이라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 예술가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것(avant-garde)이 아니라 대중이 시대에 뒤떨어져(après-garde)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들이 일반 관객이나 시장, 또는 공공기관 등의 취향에 따라 당장 시장성이 있고 잘 팔리는 유행 따라잡기에 몰두하는 경우 현대 예술의 창조혁신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적 혁신에 몰두할까?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 관심, 흥미, 몰입 등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때문이다. 사회과학의 동기부여 이론에서 보면 어떤 행동을 동기부여하는 원천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행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그 행동을 잘 수행함으로써 기대되는 보상에 대한 선호에서 나오는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동기부여에 더 영향을 미치는가는 행동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하루 종일 나사 한두 개만 조이는 단순반복작업을 시키고 생산 개수에 비례해 임금을 지급한 포드자동차 공장의 성과급제도나 이를 현대화시켜 최근 우리나라 대부분 조직들에서 앞다투어 채택하고 있는 단기 성과주의적 연봉제는 외재적 동기부여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런데 창조성의 동기부여는 내재적 동기가 압도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과학 연구의 결론이다. 그것은 외재적 동기에 의한 행동은 보상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최소의 노력으로 보상만 획득하면 된다는 효율성 사고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상 획득에 요구되는 최소의 요건만 최대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충족하기만 하면 되므로 이미 검증된 가장 효율적인 행동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 혁신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은 다양한 새로운 대안들을 시도하는 데서 출발하므로 외재적 동기부여는 예술이나 학문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오히려 의도치 않게 창조적 혁신의 동기를 억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창조적 혁신이 핵심 소명인 예술이나 대학 등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와 단기 성과주의가 활개치고 있어 우려된다. 예술 분야를 보면 순수 음악가들이 청중 동원과 후원 확보에 급급해 쉽게 이해되는 대중적인 레퍼토리나 크로스오버를 주로 연주하거나 화가들이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시장성 높은 그림 제작에 몰두하는 등 심각한 지경이다. 또 심지어 몇 년 전 우리나라 순수 예술 발전의 핵심 인프라로 설립한 한국예술종합학교 평가에서 성과지표로 취업률이라는 어이없는 통계로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은 예술종합학교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예술과 같이 창조혁신이 핵심인 분야는 단기 성과주의와 경제적 보상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장지상주의를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예술창조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경제적 인센티브를 중심으로 한 시장메커니즘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하는 문제는 예술이론이나 미학에서 다루는 예술가 개인의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과학적 이슈다. 따라서 사회과학적 통찰력이 없이 단순히 인문학적 지식과 감수성만 가진 리더가 창조성의 진작이 중요하다는 필요성을 깨달으면 성급하게 경제적 자원을 대규모로 투자하고 당장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다 예상치 못하게 정반대로 창조성의 원천을 파괴해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5. 예술창조성의 사회과학과 리더십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은 창조적 예술작품 그 자체의 감상에는 효과적이나 그런 창조적 작품이 나오게 된 환경적 조건을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가 그런 창조성을 구축하고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지식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각계각층 리더들의 예술강좌 수강에 대한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기업 CEO나 공공조직의 수장들이 촌각을 쪼개서 예술강좌를 수강하는 이유는 단순히 문화적 교양을 쌓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면에는 창조성의 본산인 예술을 이해하면 스스로도 창조성이 높아져서 최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전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21세기형 창조경영이나 창조경제에서의 성과창출과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상당 부분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예술작품 그 자체의 감상에 몰입하는 인문학적 접근을 넘어서 창조적 예술의 탄생에 기여하는 요인들과 조건, 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사회과학적 관심이 필요하다.

 

필자는 독자들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걸작 고전들, 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들과 그 작품들을 최대한 많이 접하고 그 창조적 예술성과 치열한 삶에서 우리 각자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깊은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독자가 단순히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를 넘어 한 조직이나 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리더나 CEO라면 창조적 걸작들의 인문학적 감상을 넘어서서 이런 창조적 예술들이 탄생하게 된 환경적 조건과 과정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치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고 본다. 21세기 창조사회를 보다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자형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직이론 분야의 세계 최고 학술지 등 저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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