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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쌍령전투:매뉴얼 없는 조선군, 치욕의 졸전

임용한 | 138호 (2013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상선에서 항전하고 있던 인조를 구하기 위해 제도(諸道)의 감사나 병사들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갔다. 1637 12일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 역시 경상도에서 소집한 근왕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 동쪽 16㎞ 지점에 있는 쌍령에 도착했을 때 긴장감이 높아졌다. 조선군의 전술은 불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 같은 형세였다. 목표와 진격로가 모두 뻔했다.

 

병자호란 쌍령전투

 

 총병력 12만 명의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다가오는 조선군을 기다렸다. 조선군의 전술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근왕군이 길을 나눠 동시다발적으로 포위망에 충돌해서 적을 교란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진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전라도군은 용인을 거쳐 수원 광교산 쪽으로 진출했고 충청도군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 지역인 험천(동막천)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청군은 병력은 물론 전술운용 능력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이 정도의 교란에 흔들릴 군대가 아니었다. 청나라군은 처음부터 수적으로 압도적인 명나라와 싸울 작정으로 단련한 군대여서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싸우기보다는 뛰어난 정찰능력과 신속한 기동력, 소수 정예로 적의 중심을 파괴하는 종심타격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따라서 조선군과 싸울 때에도 병력의 우세에는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쌍령은 이름 그대로 낮은 두 개의 구릉이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쌍령 북쪽에는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하천이 비스듬히 흐른다. 조선군은 청군이 북쪽에서 올 것이므로 이 하천을 해자 삼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허완은 우측 고지에, 민영은 좌측 고지에 진영을 설치하고 목책을 세웠는데 두 봉우리가 서로를 엄호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13일 청군이 접근해 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쌍령전투에 관한 조선 측 기록은 이 전투가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좌병사 허완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과 군사 4만을 합해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해 적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조선군의 3가지 실책

 포진에서도 조선군은 세 가지 실수를 했다. 임진왜란 후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알고 포수(조총을 든 총병을 포수라고 부름)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런데 허완은 중등과 하등 포수를 맨 외곽 1선에 좌우로 길게 배치했다. 그 다음 최정예의 일등급 포수를 원진으로 배치하고 백병전을 담당하는 창검병을 3선인 제일 안쪽에 배치했다. 이것은 전투배치가 아니라 허완을 경호하는 형태였다. 초관(哨官) 이택이 이 배치방식에 항의했다. 이택은 포수를 1, 2선으로 분리하지 말고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은데 허완은 최정예 포수가 적다는 이유로 반론을 들어주지 않았다. 두 번째 실수는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에 진을 친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실책은 화약을 절약한다고 포수당 2냥씩밖에 화약을 나눠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투가 개시되자 적군 33명이 두꺼운 나무 방패를 들고 전진해 왔다. 그들은 하천을 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리 기동해서 산줄기를 따라 접근해 왔다. 조선군 포수는 용감하게 전진해서 일제 사격을 퍼부어 이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중하급 포수들이 너무 흥분해서 사격하는 바람에 화약이 다 떨어졌다. 포수들은 화약을 달라고 소리쳤다. 청군 진영에는 조선말을 아는 병사들이 있었다. 화약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일제히 돌격해서 목책을 돌파했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진입하자 포수들은 총도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난전 중에 허완도 전사했다.

 청군은 이제 민영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민영군은 수비대형을 유지하고 조금 침착하게 사격을 했다. 적은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영군도 화약을 2냥씩만 배급한 탓에 화약이 떨어졌다. 다시 화약을 분배하느라 서둘다가 그만 한곳에 쌓아온 화약이 폭발하고 말았다. 민영군은 놀라 동요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청군 기병이 돌격했다. 전군이 전멸하고 민영도 전사한다. 이때 돌격전을 감행한 청군 기병은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 전투는 4만 명이 300여 명에게 전멸한 전투라는 충격적인 오명을 남겼다.

 

4만 명이 300여 명의 적군에 전멸당한 치욕의 전투?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졸전(拙戰)으로 꼽히는 쌍령전투의 패배로 인해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표해야 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꼽힌다고는 하지만 쌍령전투가 그렇게 충격적인 전투는 아니다. 기록에는 4만 명의 병력이 동원됐다고 하나 전투가 벌어진 쌍령 지역을 살펴보면 절대 4만 명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실제 경상도 근왕군도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수도에도 1만 명의 병력을 두기는 버거웠다. 조선 후기에는 총과 대포가 많이 보급돼 활이나 창은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처럼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고 설령 그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큰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경상도에서 4만 명을 동원했다는 건 불가능하며 설사 그렇게 차출했다고 해도 그만한 무장과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총과 화약은 비싼 무기였다. 그러므로 허완과 민영이 이끈 부대 약 2000명이 경상도에서 조달할 수 있는 제대로 무장한 병력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청군 300명에게 전멸했다는 대목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청군 전체의 병력이 300명이 아니라 돌격전을 펼친 기병이 300여 명이라는 것이다. 전체 병력에서는 조선군이 더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4만 명이 300여 명에게 전멸한 전투라는 평가는 옳지 않다.

 

패전의 근본 원인은 매뉴얼의 부재

 조선군의 문제는 평소의 실전훈련 부족, 이로 인한 기초적인 전술 매뉴얼의 부재였다. 조선군이 훈련 자체를 게을리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화약이 비싸고 실전훈련은 위험하다 보니 훈련을 소홀히 하고 실전지침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 쌍령전투에서의 전황은 이런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한다.

 1인당 지급한 화약 2냥은 고작 10발 정도를 발사할 양이었다. 조총 10발을 쏘려면 5분은 걸린다. 화약 제조에 비용과 재료가 워낙 많이 소모돼 화약을 아껴야 했던 건 당연했다. 유럽 국가들도 곧잘 화약을 아낀다 하면서 이런 실수를 했다. 다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는 화약 소모가 훈련 때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화약과 실용적인 탄약 보급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총은 사격속도가 느려서 기병이 저지선을 돌파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청군의 기병돌격을 저지하려면 창검병을 외곽에 배치해 저지선을 펴고 고지에서 사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목책에 의지해서 사격전을 펴다가 기병이 목책을 돌파하면 대항수단이 없어 붕괴했다.목책을 바리케이드 삼아 사격하는 건 일본군이 즐겨 쓰던 수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효과적이 아니었다.

 화약이 떨어졌다고 적이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고, 화약을 분배하다가 불을 내고, 모든 화약을 한군데에 모아 놓은 것도 실전훈련의 부재를 증명한다. 특히 실탄을 달라고 소리치다가 우리 실정을 노출해서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실수는 임진왜란 때도 겪었던 일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경험조차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던 게 쌍령전투 패전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병자호란 내내 낮은 곳과 높은 곳 논쟁이 있었다. 우리는 높은 곳을 선호한다. 그러나 고지로 올라가면 사격 정확성이 크게 떨어지고 화약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사격효율이 좋은 평지에서 일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느냐, 고지에 주둔하느냐는 갈등이 모든 부대에서 벌어졌다.

 이런 논쟁은 병서의 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전훈련과 경험을 통해 효과적인 전술을 찾고 최소한의 실전 매뉴얼을 갖춰야만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있다. 매뉴얼을 맹종하는 건 문제지만 실전에서 검증된 지침과 새로운 전술 창안의 기반이 될 객관적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매뉴얼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실용적 지침 없이 적을 만나면 작전논의는 추상적인 관념론으로 흐를 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념론은 결국 책임 회피로 이어진다. 이는 패전보다 더 나쁘다. 미래에 두 번째의 패전, 더 큰 패전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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