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상선에서 항전하고 있던 인조를 구하기 위해 제도(諸道)의 감사나 병사들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갔다. 1637년 1월2일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 역시 경상도에서 소집한 근왕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 동쪽 16㎞ 지점에 있는 쌍령에 도착했을 때 긴장감이 높아졌다. 조선군의 전술은 불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 같은 형세였다. 목표와 진격로가 모두 뻔했다.
병자호란 쌍령전투
총병력 12만 명의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다가오는 조선군을 기다렸다. 조선군의 전술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근왕군이 길을 나눠 동시다발적으로 포위망에 충돌해서 적을 교란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진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전라도군은 용인을 거쳐 수원 광교산 쪽으로 진출했고 충청도군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 지역인 험천(동막천)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청군은 병력은 물론 전술운용 능력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이 정도의 교란에 흔들릴 군대가 아니었다. 청나라군은 처음부터 수적으로 압도적인 명나라와 싸울 작정으로 단련한 군대여서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싸우기보다는 뛰어난 정찰능력과 신속한 기동력, 소수 정예로 적의 중심을 파괴하는 종심타격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따라서 조선군과 싸울 때에도 병력의 우세에는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쌍령은 이름 그대로 낮은 두 개의 구릉이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쌍령 북쪽에는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하천이 비스듬히 흐른다. 조선군은 청군이 북쪽에서 올 것이므로 이 하천을 해자 삼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허완은 우측 고지에, 민영은 좌측 고지에 진영을 설치하고 목책을 세웠는데 두 봉우리가 서로를 엄호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1월3일 청군이 접근해 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쌍령전투에 관한 조선 측 기록은 이 전투가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좌병사 허완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과 군사 4만을 합해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해 적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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