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ting Machiavelli-12
편집자주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의 몰락
1512년 11월7일,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해임됐다. 그로부터 3일 후, 권력을 잡은 메디치가문은 전(前) 정권의 심복이었던 마키아벨리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그가 소데리니 총독의 핵심 참모였으니 메디치가문의 조치도 이해할 만하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새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일부 유력인사들이 메디치가문의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적발됐는데 그 20여 명의 반(反)메디치 인사 명단에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반란 혐의로 즉각 체포됐고 바르젤로 감옥에 투옥됐다.
‘스트라파도(Strappado)’라는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이 감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밧줄로 죄수의 두 팔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가 대리석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형벌이다. 어깨가 탈골되는 것은 예사고 잘못 떨어지면 뇌진탕으로 목숨을 잃는 무서운 고문이다. 신심(信心)이 투철했던 사보나롤라 수도사도 단 한번의 날개꺾기에 자신의 죄목을 술술 불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6번이나 날개꺾기를 당했지만 매번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으로써 고문관들을 놀라게 했다. 얼굴에 피멍이 든 채 비틀거리며 일어난 마키아벨리는 “조국에 대한 나의 충성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마키아벨리의 이 외침은 단순히 억울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다. 그는 투옥과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고전(古典)을 인용하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태도를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고문을 받으면서 내뱉었던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면서 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거짓말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비난을 받았던 소크라테스는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고 외쳤다.1 마키아벨리는 고문의 고통 속에서 플라톤의 고전 <소크라테스의 변론>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에게는 고문보다 고전이 더 위대했다. 마키아벨리는 감옥에서 모진 고통의 순간을 견디면서도 메디치가문에 해학적인 시를 지어 바치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이었다.2
운명의 여신은 마키아벨리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다. 반역 혐의로 감옥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웠던 마키아벨리에게 운명의 여신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목숨을 걷어가고 메디치가문의 첫 번째 교황을 탄생시키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1513년 2월21일,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같은 해 3월11일,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 1475-1521)가 새 교황 레오 10세(Leo X)로 취임하게 된다. 피렌체 출신의 첫 교황이자 메디치가문의 수장이기도 했던 레오 10세는 대대적인 사면을 발표했고 바르젤로 감옥에 갇혀 있던 마키아벨리도 이때 특사로 풀려났다. 시에나로 망명했던 소데리니까지 사면할 정도였으니 교황권을 얻은 메디치가문의 감격과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22일간 쇠사슬에 묶여 모진 고문을 받았던 마키아벨리는 겨우 감옥에서 풀려나 산탄드레아의 허름한 시골집에 칩거한다. 이렇게 1513년부터 시작된 마키아벨리의 은둔생활은 1527년, 임종할 때까지 계속됐다. 무려 14년 동안 그는 실업자로 살았던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아끼던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시시껄렁한 일자리를 주기도 했고 나중에 마음을 바꾼 메디치가문이 <피렌체의 역사>를 집필할 수 있는 기회도 줬지만 모두 정식 직업은 아니었다. 말이 14년이지 ‘엉덩이를 잠시 책상에 붙일 틈도 없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황제와 교황, 시대의 영웅들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하의 마키아벨리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절망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군주론>의 탄생
이 낙심과 좌절의 시간을 견디며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했다. 조국 피렌체에서 추방돼 망명객으로 외국을 떠돌던 시인 단테(Dante, 1265-1321)가 <신곡>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붕괴돼가던 19세기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절망 속에서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나왔듯이 <군주론>도 이런 좌절 속에서 탄생했다. 마키아벨리에게 닥친 혹독한 가난과 철저했던 고독은 오히려 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역사의 이면을 들추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에게 밀어닥친 이 불운을 신이 부여한 기회로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이 비참한 지경에 떨어져 있든, 아니면 영화의 절정에 서 있든, 그것을 폄하하거나 칭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수없이 보아왔듯이 패잔의 몸이 되든지 영달의 절정에 있든지, 그것은 모두 신들이 인간에게 부여한 커다란 기회에 의해 그러한 위치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3
마키아벨리는 신이 주는 기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시련을 견디다 보면 새로운 희망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희망의 각오는 처절하기만 하다. 절대로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비춰 단언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운명의 파도를 타기는 쉽지만 거역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즉 밑그림대로 일을 도모할 수는 있지만 그 밑그림을 찢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속뜻은 전혀 알 수 없고 아무도 모르게 샛길로 빠져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어떤 것이든 닥쳐오는 재난에 이리저리 시달리더라도 결코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4
마키아벨리는 이런 절망과 희망의 가느다란 경계선 위에서 <군주론>을 썼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해직당한 자신을 메디치가문이 다시 불러주는 것이다. 유럽 각국의 통치자들과 이탈리아의 영웅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교황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한 메디치가문의 부름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뼈아픈 좌절과 가느다란 희망 속에서 탄생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어떤 책일까?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처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독재자가 읽어야 하는 악의 교과서인가?
<군주론>의 진정한 의미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한 오해는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권모술수의 책으로, 혹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서로 읽을 때 발생한다. <군주론>에 대한 오독은 정치공학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주도됐는데 그들의 눈에는
<군주론> 3장의 내용이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대중이란 머리를 쓰다듬거나 없애 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소한 모욕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모욕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해를 가할 때는 보복의 우려가 없도록 해야 한다.”5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자비한 통치가 정당화되고 있다. 대중이란 단어를 지금의 용어인 ‘시민’이나 ‘직원’으로 바꾼다면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비정한 권력의 비밀과 비즈니스의 지침을 속삭이며 시민과 직원의 목을 조르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주론>을 자기계발서의 하나로 읽고 ‘악의 교사’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마키아벨리를 대면하는 사람은 3장에 등장하는 이 냉혹한 글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무지한 대중을 탄압하는 불한당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군주론> 3장의 주장은 “언어, 풍습, 제도가 다른 지역의 영토를 지배하게 될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르게 마련인데 그것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과 함께 행운이 따라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한 말이다. 특별한 통치의 현실에 직면한 군주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조치란 것이다.6 사회과학자들은 지금까지 <군주론>을 잘못 이해했다. 이 책은 통치에 대한 기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즉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친 마키아벨리의 처절한 자기고백이며 키케로로 상징되는 기독교적, 중세적 가치에 대한 의도적인 뒤집기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군주론>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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