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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디엔비엔푸 전투: 佛 외인부대도 극복 못한 자연과 정보의 벽

임용한 | 99호 (2012년 2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전투는 1953년 하노이 북서쪽 고원 평야 지대에서 프랑스군과 월맹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월맹군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기 위해선 먼저 월맹군 게릴라 부대를 개활지로 끌어내 집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정글과 협곡으로 둘러싸인 폐쇄 지형인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 스스로를 미끼로 던져 고립시킨 후 게릴라들이 몰려들기를 기다렸다. 사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충분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월맹군 게릴라들이 몰려들었을 때 우세한 화력과 항공 전력으로 일거에 박살낸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월맹군은 프랑스군의 전술을 이미 꿰뚫고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해 맹렬히 공격했다. 울창한 정글과 곳곳의 동굴은 월맹군의 포대와 대공포대를 완벽하게 숨겨주는 은폐막이 됐다. 강력한 대공포화에 설상가상으로 베트남의 몬순 기후를 미리 변수에 넣지 못한 탓에 항공 지원이 불가능해지고 프랑스군의 보급이 끊겼다. 결국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적에 대한 오만과 경시, 정보의 부재, 전술 지형과 기후 판단의 잘못 등 전쟁에서 벌어지는 치명적 실수가 종합적으로 불러일으킨 참사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전쟁 중에 베트남은 일본군에게 점령됐다. 종전이 되자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리됐다. 북쪽에는 호찌민(胡志明)이 지도하는 공산정권이 성립했다. 남부에는 왕정이 세워졌다. 베트남은 가난한 농업 국가였고 오랫동안 부패한 왕정과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시달렸던 터라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히 강화됐다.
 
남베트남이 위기에 몰리자 과거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가 남부 베트남 왕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합국의 동의를 얻어 베트남에 다시 진군했다. 그러나 나중에 프랑스의 뒤를 이어 베트남에 참전한 미국도 감당을 못했을 정도로 베트남의 저항정신은 강력했고 부패한 남베트남은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호찌민과 보응우옌잡
 
베트남을 프랑스가 감당하기에는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대단히 약화돼 있었다. 병력은 물론이고 군수도 부족했다. 포와 항공기는 미군에 의존했다. 나중에 소총은 자신들의 것으로 어찌 장만했지만 처음에는 소총도 미군 것을 빌려 썼을 정도였다.
 
반면 북베트남군, 즉 월맹군은 흔히 생각하는 비정규군이 아니다. 월남전이라고 하면 베트콩을 연상하지만 남부 베트남에서 활약했던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풍부한 실전 경험과 훈련을 거쳐 상당히 강력한 군대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호찌민과 호찌민의 동료이면서 북베트남군을 이끌었던 명장 보응우옌잡(武元甲) 장군은 유연하고 합리적이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20세기 초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이념이 앞서고 군사작전에서도 경직되고 군사 외적인 요소에 너무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부분에서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호찌민은 요리사 출신이었고 보응우옌잡은 신문기자 출신으로 30대 이전까지는 군사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은 미국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과 접촉해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를 구출해주며 그들에게서 장비를 지원받고 특수전과 게릴라전을 배웠다.
 
두 사람은 타고난 명민함과 통찰력으로 단순한 게릴라 지도자의 수준을 넘어 뛰어난 전략, 전술가로 성장했고 서구 군대의 특성과 약점까지도 파악했던 것 같다. 그들은 프랑스군이나 미군이나 전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많은 젊은 군인들은 월남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본국에서도 부당한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여론이 거셌다. 그들은 적의 전의를 꺾는 것을 승리를 위한 최우선 전략으로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베트남전의 교훈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전의를 꺾는다는 건 좋은 전략이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이런 추상적, 정서적인 목표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목표가 추상적이므로 방법이 막연하거나 아니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목표와 적당히 연관이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실천력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이 말의 숨은 의미는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게릴라전에 천혜의 요소를 갖춘 베트남
 
게릴라전은 일반인의 생각과 반대로 희생이 크고 성과는 적은 전투방식이다. 게릴라를 이용한 정찰과 교란은 그 자체의 가치보다는 주력군의 작전목표하에서 보조적인 목표를 지닐 때에만 의미가 있다. 주력군의 목표 없이 불가항력의 적을 만나 끝까지 싸운다는 방식의 단순 저항적인 게릴라전은 저항으로서의 의미는 있지만 결국은 소멸돼 갈 뿐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정글과 독특한 토양으로 게릴라전에 천혜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나 미국이나 베트남 국민의 민심을 휘어잡을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는 한 그것은 더욱 어렵고 군인들을 기업인과 민간인이 대체하기도 힘들어진다. 군대가 주둔할 수밖에 없는 한 전투와 불상사는 계속 발생할 것이고 민중들은 그들과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차마 속내를 밝힐 수 없었겠지만 먼저 전의를 꺾는다는 전술이 결코 적의 전의를 꺾는다는 의미만 있었던 건 아니다. 베트남 국민들로 하여금 프랑스나 미군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그들이 제공하는 체제의 우월성을 기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남베트남이 강하고 단결된 국가로 탄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게 진정한 의미였을 것이다.
 
민심도 얻지 못하고 통치와 행정조직이 제대로 기능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엄청난 정글 지대로 이뤄진 땅을 오직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면 거대한 병력이 필요했다. 프랑스도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국가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출혈이었다. 게다가 2차대전을 경험한 프랑스 국민은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었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국내 여론도 좋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조달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국공내전(國共內戰)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막대한 전쟁물자가 북베트남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1953년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Henry Navarre) 장군은 날로 불리해지는 전황을 반전시키려면 월맹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게릴라를 쫓아만 다녀서는 적을 소탕할 수 없었다. 병력이 너무 분산되고 한번에 커다란 타격을 주기도 어렵다. 월맹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려면 먼저 그들을 개활지로 끌어내 집결시켜야 했다. 나바르는 미끼를 던져 월맹군을 모으기로 했다. 미끼는 살아 있는 프랑스군이었다.
 
프랑스군이 선택한 지점은 하노이 북서쪽, 라오스 국경 근처에 있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였다. 고원 위의 평야지대인 이곳은 주변을 정글과 협곡이 가득한 산지가 포위하고 있었다.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19번 도로 하나뿐인데 좁고 정글로 둘러싸여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했다. 접근 가능한 곳은 하늘뿐이었다.
 
1953년 11월 프랑스군 1만6000명이 이곳으로 낙하 투입됐다. 부대는 최정예인 제1외인부대와 프랑스 정규 공수부대,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인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고원 평야에 무덤처럼 솟은 야산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야포 60문을 배치하고 활주로까지 닦았다. 폐쇄된 지형, 도가니와 같은 곳에 스스로 들어가 적에게 포위된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충분한 대포를 비치한다. 적이 몰려들면 우세한 화력과 항공 전력으로 일거에 박살낸다는 구상이었다. 보급이 끊길 우려도 없다. 우세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공중보급을 이어갈 것이다.
 
이 전술은 아무래도 한국전쟁 때 미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파하던 방어전술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이런 전술로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가 지평리전투였다. 이 전투에 프랑스 외인대대도 참전해 기념비적인 전공을 세웠다. 여담이지만 이때 한국인 몇 명도 외인부대에 입대했고 디엔비엔푸전투에 투입됐다고 한다.
 
프랑스의 예상을 뒤엎은 베트남의 공세
 
1954년 3월 기다렸던 베트남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전황은 예상을 깼다. 월맹군은 맹렬한 포격과 공격으로 단숨에 프랑스군 진지 하나를 붕괴시켰다. 공중지원과 보급을 위해 전투기와 수송기가 출동했지만 비 오듯 퍼붓는 대공포화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착륙이 어렵게 되자 보급품을 공중에서 투하했지만 거의 전부가 월맹군의 손에 들어갔다.
 
잘못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프랑스군의 전술이 완전히 노출됐고 적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반면 월맹군은 적의 전술을 완전히 파악했고 대응책을 세웠다. 자신감을 가진 월맹군은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했다. 병력은 기갑사단 1개를 포함한 5개 사단으로 5만 명이 넘었다. 포는 200문으로 프랑스군을 압도했고 곳곳에 대공포를 충분히 밀집시켰다.
 
프랑스군은 지형의 차이도 인식하지 못했다. 적을 잡을 생각에 자신에게 유리한 여건만 보고 자신들을 옭아맬 지형은 전혀 보지 못했다. 지평리와 달리 월맹군은 주변의 고지에서 프랑스군을 내려다보며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울창한 정글과 동굴은 월맹군의 포대와 대공포대를 완벽하게 숨겨줬다. 전투기가 뜨면 벌거숭이 민둥산에서 완전히 노출된 중공군을 쓸어버릴 수 있었던 지평리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프랑스군은 폭격으로도 적의 포대 하나를 파괴할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진 프랑스 포병 대장은 자살해 버린다. 더 황당한 것은 베트남 기후의 특징인 몬순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몬순이 닥치자 항공지원은 더욱 어려워졌다. 항공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보급이 끊어졌다. 천하의 어떤 강한 군대도 보급 없이는 싸울 수 없다. 부상자를 후송할 수도 없었고 약이 없어 치료할 수도 없었다. 부상병들은 동굴 같은 참호와 야지에서 죽어갔고 병사들은 식량과 탄약이 고갈됐다. 그렇다고 싸워서 포위망을 뚫을 수도 없었다. 육로는 완전히 차단됐고 월맹군은 지뢰로 전역을 둘러쌌다.
 
그래도 프랑스 외인부대는 놀라운 전투를 벌여 베트남군 사상자가 2만2000여 명에 달하는 등 큰 희생이 따랐다. 그러자 보응우옌잡 장군은 또다시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땅굴을 파서 프랑스군의 진지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월남전 참전 수기에 따르면 베트남 땅은 흙 땅임에도 대단히 단단해서 삽과 곡괭이가 제대로 안 들어갈 정도였다. 다만 물을 부으면 쉽게 파지는데 다시 굳으면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월남전 내내 베트남군은 이 특이한 토질을 이용해 땅굴 진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다.
 
마치 중세의 공성전처럼 월맹군이 참호와 땅굴을 파고 근접해 오자 프랑스군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군이 위기에 빠지자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낙하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외인부대원들까지 자원했다. 그리고 적진 한가운데로 낙하했다. 세계 전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용기였지만 이 용감한 전사들은 거의 프랑스군 진지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지뢰밭에 떨어지거나 월맹군 진지에 떨어져 사살됐다.
 
프랑스의 참혹한 패배
 
1954년 5월7일 오후5시30분, 주요 진지를 모두 빼앗긴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 4000명이 전사하고 6300명이 포로가 됐다. 열악한 포로 생활로 많은 수가 사망했고 겨우 2567명만이 생환했다.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 외인부대는 전설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그 어떤 우수한 자원도 완벽하게 잘못된 전술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군의 작전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치명적인 실수의 종합판이었다. 적에 대한 오만과 경시, 정보의 부재, 전술 지형과 기후 판단의 실수, 지형과 조건의 차이를 배려하지 않은 과거 경험의 맹목적인 반복 등 프랑스군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집중적인 실수의 근원은 수렁과 같은 베트남 전의 전황에 대한 초조감이었다. 난감하고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사람들은 서두르고 무엇이라도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점점 더 불가능한 상황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럴 때 잘 쓰는 말이 ‘바쁠수록 돌아가라’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이럴 때일수록 근원적인 부분, 가장 크고 본질적인 부분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은 후일 역사로 증명됐듯 미군도 군사력에 의존해 지배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디엔비엔푸와 같은 모험적 작전을 벌일 게 아니라 군사적 개입을 중단하고 사회적, 경제적 협력을 모색하는 식의 정책적 전환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1만여 명이 넘는 최고 엘리트 병사들의 희생을 낳았고 베트남에서도 철수해야 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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