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만주지방에 여러 부족으로 분열돼 있던 여진족을 완전히 통합한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1616년 후금(나중의 청)을 건국했다. 이후 후금은 1618년 4월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 푸순(撫順)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당시 명나라는 산하이관(山海關) 동쪽으로 진출해 선양(瀋陽), 푸순을 경계로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 공격은 심각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다.
조명(朝明) 연합군, 후금에 대항하다
1619년 명나라는 동서남북의 사로군(四路軍)으로 편성된 총 10만의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토벌군에는 총사령관 양호와 동로군 사령관 유정처럼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던 장수들이 투입됐다. 중하급 장교와 병사들 중 상당수가 임란 참전용사들이었을 것이다.
이 출진에 앞서 명나라는 조선에도 출병을 요구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 사실을 대단히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2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냈던 사실을 감안하면 도의적으로나 국제 관계상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약 1만의 정예병을 선발했다. 포수(조총병 및 각종 화기부대) 3500명, 사수(궁수) 3500명, 살수(창병 등 백병전 부대) 3000명이었다. 전통적인 조선군은 기병, 보병의 비율이 6대4 정도 되는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이 창안한 기효신서의 전술을 도입했다. 이때의 편제는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편제였다. 병사들은 정예병이었고 부원수였던 김경서(본명은 김응서)는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장수와 함께 기효신서의 전술을 조선군에게 훈련, 보급하는 임무를 맡은 적도 있었다.
총사령관 강홍립은 문관이었지만 김경서, 김응하, 이계선 등은 임진왜란 때 명성을 날린 실전형 지휘관들이었다. 김경서는 맹장이면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인물로 상당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성리학의 명분론에 사로잡힌 문관들과 지휘관들 중에는 왜군의 투항병을 받지 않고 살해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김경서는 이들을 휘하로 거두어 실전에서 효과를 보았다. 장수답고 호쾌한 사고 덕분에 왜군 장수들과도 말이 잘 통했다. 강화(講和)가 논의되던 시절엔 임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이었던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면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김경서는 형식과 행정절차를 우습게 봤다. 문관들과도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탐욕스럽고 백성과 병사를 학대한다는 이유로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관리의 부정부패란 기준이 모호해서 이런 탄핵 상소만으로는 진실을 판단하기 힘들다. 좌우간 광해군은 그런 일로 중요한 무장을 흔들지 말라고 하며 그를 끝까지 보호했다. 김응하는 평양성의 논개로 알려진 계월향의 연인이다. 그도 김경서와 비슷한 무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1만의 군대는 임진왜란으로 검증된 실전형 무장과 신형 전술로 잘 훈련된 부대였다.
열악한 보급 체제와 전술 훈련
강홍립 부대가 출정한 것은 한여름인 1618년 7월이었다. 그러나 바로 만주로 들어가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압록강에서 대기했다. 사연이 복잡하지만 조명 연합군이 본격적인 전투에 나서게 된 것은 출정식을 거행한 지 7개월이나 지난 1619년 2월이었다. 2월21일 조선군은 창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유정이 지휘하는 동로군과 합류했다. 겨울철이었지만 식량과 의복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가난한 조선은 서울에 집결한 병사들이 출정식을 할 때 군장조차 지급하지 못하고 겨우 막걸리 한 사발만 먹여서 올려 보냈다. 그나마 이들에게 의복용으로 목면 2필씩 지급하자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이 2만 필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은 여러 방면으로 재원을 각출하고 노력해야 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조선군의 구성도 바뀌었다. 명나라군은 조선군의 병력이 자신들이 요청한 수에 크게 부족하다며 전적으로 포수의 증원을 요청했다. 덕분에 조선은 포수 5000명을 추가로 증강했다. 이 과정에서 전체 병력과 병종별 비율에 변화가 발생했다. 그 수는 명확하지 않은데 포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명나라 군은 조선군을 독립전투부대로 활용하지 않고 병종을 특화시키고 명나라 군의 일부분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군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요즘 우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의 역할을 폄하하고 심한 경우 명군이 없었어도 상관없을 뻔했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다. 조선은 직업군인이 거의 없었고, 일본군은 전투력만으로는 거의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농민을 징집해서 이들과 상대할 군대로 만드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이 점은 임란을 지켜본 유성룡도 솔직하게 인정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양국이 군 편성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군의 포수 비율이 기형적으로 커졌으면서도 명나라군과 혼합편성이 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명군의 최종 목적지는 후금의 수도격이던 싱징(興京)이었다. 후금군의 병력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명군보다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아직 화포가 없었고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구식군대였다. 하지만 후금군은 전술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지휘부는 노련하고 건강했다. 반면 명군은 부패했고 지휘부의 분열은 극심했다. 장수와 관리들이 식량을 빼돌려서 병사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았고 사기는 전쟁 이전부터 크게 저하돼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
명군의 일차 집결지는 훈허(渾河) 강변에 있는 사르후(薩爾滸)였다. 3월 1일 산하이관 총병 두송이 지휘하는 서로군이 먼저 혼하에 도착했다. 그는 사르후를 지키는 후금군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 다른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훈허를 건너 사르후를 공격했다.
두송은 큰 실수를 했다. 상대가 명군보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 위주의 군대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두송의 공격부대는 후금의 거점을 탈취했지만 후방에서 후금의 대군이 등장했다. 그들은 두송의 공격부대를 우회해서 방심하고 있던 후방의 수비대를 먼저 유린하고 공격부대마저 포위 섬멸했다. 후대에 롬멜과 패튼이 본받는 기동전의 전형이다.
이어 사르후로 오고 있던 북로군도 전멸시켰다. 이곳은 평야 지역이고 명군은 보병 중심이어서 부대가 와해되면 병사들이 후금군의 기병을 피해 달아날 수가 없었다.
명군 주력이 각개 격파되자 남로군은 후퇴했다. 그러나 후퇴 명령을 받지 못한 동로군은 사르후 근처에서 후금군 주력에 노출됐다. 동로군의 주력은 후금군의 돌격에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전멸했다. 조선군은 명군의 뒤에서 행군하다가 유정군이 전멸한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무슨 수를 취하기도 전에 후금군이 쇄도했다.
강홍립은 즉시 수비진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급한 탓에 중영과 우영은 언덕에 진을 쳤지만 좌영은 벌판에 진을 쳐야 했다. 게다가 이들 진영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분리됐다. 좌영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본 강홍립은 다시 명령을 내려 좌영을 언덕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받고 진을 옮기는 사이에 후금군의 기병이 몰아닥쳤다.
김응하가 지휘하는 좌영군은 사격으로 후금군의 일차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갑자기 서북풍이 심하게 불면서 조총에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 틈에 후금군이 돌입했고 좌영군은 전멸했다. 김응하는 큰 나무 뒤에 서서 활로 적군을 사살하다가 뒤에서 접근한 후금군의 창에 찔려 사망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살아 돌아온 병사가 거의 없어서 이 전투의 실상이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한편 좌영군이 공격을 받자 강홍립은 우영군을 보내 좌영군을 지원하게 했다. 이것도 실수였다. 우영군이 벌판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벌판으로 내려온 우영군은 제대로 진도 갖추지 못하고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고립된 강홍립과 중영군 5000명은 항복하고 말았다.
패전의 원인
사르후 전투 패배의 1차적 원인은 척계광의 전술과 화포에 대한 명군의 과신이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장애물을 설치한 뒤 기병의 돌격을 화기로 분쇄하는 전술은 숙달했지만 기병전술의 본질은 기병 돌격이 아니라 기동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 바람에 병력을 너무 넓게 분산시켰고 각개격파를 당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에 비하면 상당히 잘 훈련된 군대였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싸우기에는 보급체제나 전술훈련이 너무나 부족했다.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군은 장기 복무로 지쳐 있고 의복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고 있었으며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이틀째 굶은 상태였다.
접전 직전에 좌영과 우영의 배치가 우왕좌왕했던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지휘부의 판단도 잘못됐지만 그 후로도 보면 조선군은 행군속도부터 명군이나 청나라 군대보다 훨씬 느렸다. 진형 배치나 전술 기동은 당연히 원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기동훈련의 부재이다. 조선군은 언제나 기동훈련이 부족했다. 나라가 가난해서 돈이 드는 기동훈련은 거의 하지 못했다. 덕분에 단위부대나 수성전에서는 상당히 강했지만 부대 간의 협력전술이 요구되는 전장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보급추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이 탓이었다.
오늘날 기업 환경은 수시로 바뀐다. 자기 기준, 혹은 이전 기준으로는 아무리 잘 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준비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면 그 집단은 사르후의 조선군처럼 허약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르후의 참패가 남겨준 교훈이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가 남긴 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조선은 이 전투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강홍립의 패전이 후금군과 싸우지 말라는 광해군의 밀지 덕분이라는 말로 핑계를 대기에 급급했다. 덕분에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벌어질 때까지도 조선군의 약점은 치유되지 않았다.
광해군 입장에서 보면 이 소문은 엉뚱하게 광해군을 탁월한 국제감각을 지닌 실리외교의 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원래 이 이야기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축출된 광해군을 비난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었다. 전투 양상을 보아도 밀지가 있었다면 좌영과 우영의 전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시 후금은 만주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였다. 그들이 명나라와 자웅을 겨룰 만한 세력이라고 본 사람은 조선에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후금은 포로로 잡은 조선군을 후금군으로 편입하거나 노예로 팔았다. 만약 이 항복이 광해군의 밀지였다면 광해군은 아직은 여진의 부족연합군에 불과한 군대에 미리 겁먹고, 혹은 명나라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서 1만의 조선군을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명나라의 강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변명은 광해군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마녀사냥인 동시에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어떠한 명장도 한 번의 패전이나 실수도 없이 승리를 구가할 수는 없다. 기업과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실패에 솔직한 사람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자격이 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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