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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고전 읽기

초국적 기업, 글로벌화의 종착역

이동현 | 69호 (2010년 11월 Issue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들의 글로벌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첫째는 20세기 전반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결국 ‘국가의 부(the wealth of nations)’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첨예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1776년 애덤 스미스가 자유 무역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뒤 학계에서는 비교우위에 기반을 둔 자유 무역이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출은 선이고 수입은 악이라는 중상주의 사고가 판을 쳤다. 중상주의 접근은 결국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졌고, 국가 간 빈부 격차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전쟁이라는 참극을 낳았다. 이에 따라 전쟁 이후 세계 질서를 다시 재편하려던 선진국들은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강화했고, 관세 인하를 통해 자유 무역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가 만들어진 뒤 모두 8차례의 협상을 통해 관세를 인하하고 무역을 증진시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95년부터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가 GATT 체제에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물론 GATT나 WTO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이런 노력들로 인해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는 더욱 진전됐다. 덕분에 기업들은 훨씬 호의적인 상황에서 글로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둘째는 기업들의 주된 글로벌 활동이 무역에서 해외직접투자(FDI)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완제품이 국경을 넘는 무역과 달리 해외직접투자를 통해서는 생산요소와 노하우가 국경을 넘어 현지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뤄진다. 해외직접투자의 활성화는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다국적 기업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들이 등장했다. 기업 활동이 현지에서 이뤄지는 만큼 현지화(localization)가 글로벌 경영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해외직접투자의 역할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됐다. 해외직접투자가 개도국이나 후진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함께, 해외직접투자를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의 새로운 형태로 폄하하는 시각이 공존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는 꾸준히 늘었고, 이와 더불어 다국적 기업도 계속 생겨났다. 또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글로벌 경영의 초점을 해외직접투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경영으로 바꿔 놓았다.
 
바틀릿(Bartlett)과 고샬(Ghoshal) 교수가 1989년 출간한 <국경없는 경영(Managing Across Borders)>은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본격적으로 다룬 고전이다. 그들은 기업이 특정 국가에 진출하는 사건(event)을 다룬 해외직접투자보다 이미 많은 나라에 투자해서 여러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기관(institution), 즉 다국적 기업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바틀릿과 고샬은 무역에서 해외직접투자, 다국적 기업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경영의 제3의 물결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들은 가전과 소비재, 정보통신 산업에서 미국 유럽 일본의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을 심층 분석해서 다국적 기업의 경영을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기준을 제시했다.
 
다국적 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핵심 자산을 어디에 배치하는지, 해외 자회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글로벌 경영에서 얻은 지식을 어떻게 개발하고 전파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틀릿과 고샬 교수는 이 세 가지 핵심 기준에 따라 전통적인 다국적 기업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 유형은 좁은 의미로 정의된 다국적(mul-tinational) 기업이다. 다국적 기업은 글자 그대로 각각의 국가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다국적 기업을 의미한다. 정의의 명확성을 위해 ‘다국가(multidomestic)’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국가 기업은 주로 필립스나 유니레버 같은 유럽의 다국적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다국가 기업은 자신들의 핵심 자산을 여러 나라에 분산 배치한다. 예컨대 필립스의 경우(1987년 기준)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에 가장 큰 연구개발(R&D) 센터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도 R&D 센터를 두고 있었다. 또 본사와 해외 자회사의 관계도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해외 자회사들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들의 주도하에 현지 시장을 공략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와 함께 현지에서 습득한 지식을 주로 현지 시장에 적용했다.

두 번째 다국적 기업의 유형은 핵심 자산을 주로 본국에서 갖고 있는 글로벌(global) 기업으로 다국가 기업과 정반대의 특성을 보인다. 마쓰시타나 NEC 등 주로 일본의 다국적 기업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인 도요타는 상당 기간 일본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주로 수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또 해외 자회사의 권한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해외 자회사들은 주로 주어진 범위에서 본사의 지침을 충실히 실행하는 역할만 했다. 핵심 지식도 대부분 본사에서 개발되고 본사에서 사용됐다.
 
세 번째 다국적 기업의 유형은 다국가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복합 형태인 국제적(international) 기업이다. P&G나 GE 같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국제적 기업은 핵심 자산은 본사에 집중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산은 해외에 분산 배치했다. 예를 들어 P&G나 나이키는 핵심 자산인 R&D나 마케팅 기능의 경우는 본사에 집중했지만, 생산 설비나 영업 기능은 전 세계에 배치했다. 본사와 해외 자회사의 관계는 다국가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중간 형태, 즉 자회사에 어느 정도 권한을 주지만, 주로 본사가 제공하는 핵심 역량을 활용해서 사업을 전개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 지식은 주로 본사가 개발해 해외 자회사로 이전하는 형태였다.
바틀릿과 고샬은 세 가지 유형의 다국적 기업들이 그동안 성장해왔지만, 새로운 글로벌 환경 하에서 세 가지 모델 모두 약점이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다국적 기업의 모습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필립스는 지나친 현지화로 현지 적응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범세계적 효율성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소니나 마쓰시타를 비롯한 일본의 가전업체들이 대규모 생산설비에 기반을 둔 규모의 경제로 유럽 시작을 공략했을 때, 필립스는 유럽 전역에 분산 배치된 소규모 생산설비의 비효율성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반면 일본의 NEC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현지 적응에는 실패했다. 정보통신 산업은 범세계적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각국마다 통신에 대한 규제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NEC는 각국 사정에 맞게 경영하는 현지화에 약점을 보였기 때문에 경쟁사인 유럽의 에릭슨에 뒤처지는 낭패를 봤다. 이처럼 기존의 다국적 기업들은 국제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글로벌 효율성이나 현지 적응력, 범세계적 학습 능력을 모두 갖추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저자들은 새로운 다국적 기업의 형태로 제4의 모델인 ‘초국적(transnational) 기업’을 제안했다.
 
초국적 기업은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비전을 공유하면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범세계적 학습이 이뤄지는 다국적 기업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초국적 기업은 전문화됐으면서 동시에 차별화된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초국적 기업에서는 핵심과 주변부라는 구분이 의미가 없다. 핵심 자산은 글로벌 기업처럼 중앙에 집중되지도 않고, 다국가 기업처럼 각 지역에 분산돼 있지도 않다. 본사와 해외 자회사들이 전문화된 핵심 자산을 각자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네슬레의 본사는 스위스지만, 캔디 사업의 핵심 자산은 영국에 있다. 따라서 본사와 해외 자회사의 관계도 종속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고, 상호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비전을 공유한 거대한 글로벌 네트워크 하에서 본사와 해외 자회사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각자의 전문성을 통해 기여하는 셈이다. 1962년 설립된 후지 제록스(Fuji Xerox)는 제록스의 일본 합작회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컬러 복사기나 프린트 사업을 주도하는 독자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0년에는 제록스의 중국과 홍콩 사업권을 넘겨받을 정도로 후지 제록스의 위상이 격상됐다. 뿐만 아니라 초국적 기업에서는 범세계적인 지식 개발과 공유가 이뤄진다. 누구나 지식 개발의 주체가 될 수 있고, 특정 지역에서 개발된 기술이나 노하우는 전체 네트워크로 확산된다. P&G는 특정 시장에서 성공한 기술이나 노하우를 현지에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자회사로도 확산해서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을 잘 구축했다.
초국적 기업의 개념이 너무 복잡하고,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의 경험이 쌓이고 해외 사업의 기반이 탄탄해지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초국적 기업의 모습을 갖춘 기업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삼성과 미국 LG의 위상이 본사보다 높아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 방문 교수로 연구 활동을 벌였다. <MBA 명강의>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현대편> <깨달음이 있는 경영> <초우량 기업의 조건>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경영학 지식을 다양한 조직에 확산하는 일에 역량을 쏟고 있다.
 
편집자주 경영학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경영학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이자 현대인의 필수 교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경영학 100년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고전들과 그 속에 담겨있는 저자들의 통찰력은 무엇인지 가톨릭대 경영학부 이동현 교수가 ‘경영고전읽기’에서 전해드립니다.
  • 이동현 | - (현)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
    -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 방문 교수
    -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현대편>, <깨달음이 있는 경영>, <초우량 기업의 조건> 저자
    dhlee67@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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