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이 학식이 풍부한 원로 교수에게 고전(古典)의 정의를 물었다. 이 학자는 “남들은 다 읽었는데, 나는 안 읽은 책”이라고 짧게 답했다. 유명한 책 이름을 들먹이며 아는 체를 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그 책을 완독한 이는 드물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다.
요즘 기업 현장의 유행어인 지속가능 경영도 이 고전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녹색 경영’ ‘지속가능 경영’을 슬로건으로 내건 기업은 많지만 이를 조직 내에 체화하고 체계적으로 실천하는 기업은 드물다. 이수열 전남대 경영대 교수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지속가능 경영 보고서’를 발간한 62개 국내 기업 가운데 ‘지속가능 경영 로드맵’을 가진 기업은 25.8%에 불과했다.(DBR 48호 참조) 지속가능 경영 보고서를 발표하는 기업이 이 정도면 나머지 기업은 어떨까. 상황이 이러니 지속가능 경영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글로벌 기업의 행보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10월 14일 ‘지속가능한 농업 헌장(Sustainable Agriculture Commitment)’을 발표했다. 농산품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고 농부들을 지원하는 새 프로젝트를 미국은 물론 아르헨티나 중국 인도 등의 신흥시장에서도 펼치겠다는 것이다. 농민 100만 명을 대상으로 작물 선택과 지속가능한 농법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100만 명의 중소 농가가 생산한 농산품 10억 달러어치를 구매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했다.
이틀 뒤 글로벌 식음료 회사인 펩시코(PepsiCo)가 월마트의 뒤를 이었다. 이 회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공동 개발한 웹 기반 농장 물 관리 시스템인 ‘i-crop’을 자사와 거래하는 농가에 제공하기로 했다. i-crop은 계측기로 측정한 밭의 토질 데이터와 지역 기상대의 기상 정보를 종합해, 물을 주는 시기와 양을 자동 계산해주는 웹 기반 물 관리 시스템이다. 영국 22개 농가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도 실시했다. 펩시코는 ‘i-cop’ 서비스를 2011년 유럽으로 확대하고 이후 중국 인도 멕시코 호주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월마트와 펩시코가 농촌을 주목한 것은 우연일까. 두 기업의 행보는 글로벌 기업이 추구하는 지속가능 경영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준다. 지속가능 경영은 기업과 사회, 자연이 상생하는 비전과 전략을 체계화하고 기업 가치사슬 전반에 변화와 혁신을 확산시키는 노력이다. 1차 산업인 농업이 공급사슬 혁신의 최종 종착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월마트가 납품 규모가 큰 대형 농장을 대상으로 재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요구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농업이 바뀌지 않고서는 식품 공급체인 전반의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물이 없으면 콜라나 식품도 더는 만들어 팔 수 없다.
반면, 말과 구호로 지속가능 경영을 내세우는 기업은 공급체인이나 조직 내부 등 가치사슬 상류의 혁신보다는 소비자 접점의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영역에만 몰두한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일부 기업은 환경 보호 등의 이유를 대며 소비자에게 갖가지 부담을 슬그머니 떠넘기기도 한다.
새로운 전략에 맞게 기업 가치사슬 전반을 혁신하는 일은 말로만 떠드는 기업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차별화된 경쟁력이다. 물론 강력한 시장 장악력과 교섭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그럴 역량이 아직 미흡하다면, 또 지속가능 경영에 자신이 없다면, 말만 앞세우기보다 기업의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자원 낭비와 비효율이라도 없애야 한다. 생산 공정에 투입되는 재료 중 총량 기준으로 7%만이 제품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전 세계 농산물의 30∼40%는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지 못하고 소실된다고 하니 말이다. 버려지는 자원만 줄여도 기업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진짜 녹색 기업 감별법도 이 대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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