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90년대 최고의 액션 스타로 활약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영화 터미네이터(1984년)에서 미래에서 온 로봇전사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근육질 몸매, 무뚝뚝한 표정, 뚝뚝 끊어지는 독일어 투의 어색한 영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터미네이터 슈워제네거의 영화 속 대사 “아일 비 바크(I’ll be back)”는 세계 각국 연예인이 따라하는 유행어가 됐다. 그는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스크린이 아닌 정치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돌아왔다.
최근 그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방한이 반가운 이유는 왕년의 액션 스타여서만은 아니다. ‘터미네이터’ 주지사는 방한 중에 국내 기술로 개발된 고속철도 열차인 ‘KTX-산천’을 시승했다. 캘리포니아 주는 재정난에 허덕이면서도 2000년대 초부터 추진해온 426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도 건설 사업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연방정부의 재정지원까지 끌어내 시속 350km로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를 잇는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고속철도가 완공되면 캘리포니아의 주요 대도시가 고속철도를 통해 이어지는 광역경제권이 형성된다. 한물 간 교통수단인 철도가 자동차 왕국, 그것도 캘리포니아에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철도의 부활은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철도는 마차를 밀어내고 산업혁명을 이끈 교통시장의 ‘터미네이터’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 철도는 자동차, 항공기 등 혁신적인 기술로 무장한 후발 주자에 밀려 대중교통 시장을 내주기 시작했다. 자동차처럼 편리하지 않고, 비행기처럼 빠르지도 않은 어정쩡한 철도의 몰락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상황은 달라졌다. 신흥시장의 수요 증가와 석유 생산설비의 한계로 유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후변화의 두려움도 커졌다. 이 결과 상대적으로 적은 에너지로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철도의 강점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석유 종말시계>의 저자 크리스토퍼 스타이너는 “유가가 1갤런(약 3.78L)당 18달러 시대가 오면 곧 철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철도 부활을 운 좋은 시장 환경 덕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철도 업계에서는 그 동안 자동차와 항공기를 따라잡기 위한 고속 열차의 속도 경쟁과 친환경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지속됐다. 일본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리니아 신칸센은 최고 시속 581km로 부산∼평양 거리인 도쿄∼오사카를 70분에 주파한다. 탑승 수속 시간(15분)까지 포함해 75분이 걸리는 비행기보다 더 빠르다는 게 일본 측 관계자의 얘기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에서도 공항까지 이동시간이 길고 보안 검색이 까다로운 비행기보다 도심에서 간편하게 탑승할 수 있는 고속철도를 선택하는 비즈니스맨이 늘고 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살아남으려면 가장 느린 얼룩말보다 빨리 뛰어야 한다.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은 가장 민첩한 사자보다 더 빨라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비즈니스 세계도 비슷하다. 제자리를 유지하려고만 해도 갑절로 뛰어야 한다. 이른바 ‘레드 퀸(Red Queen)’ 효과다. 한물 간 것처럼 보였던 철도가 다시 돌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철도 주연, 비행기·자동차 조연의 영화 ‘터미네이터’ 속편을 찍는다면 첫 대사는 ‘I’m back’으로 써야하지 않을까.
박용
- 동아일보 기자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설 국가보안기술연구소(NSRI) 연구원
-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정책연구팀 연구원